정문의 작품

반대로 도는 시계바늘

미송 2023. 9. 25. 10:45

 

 

 

모두가 떠났다고요? 혼자 남았다고요? 아닙니다. 떠난 게 아니라 아직 오지 않았고 기다릴 뿐입니다. 돌아봐 죽도록 사랑한 기억이 없다면, 와야 할 누군가 안 온 것이고 춥게 느껴진 빈 터는 그가 차지할 자리입니다. 인생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흐르지 않고, 거꾸로 미래에서 현재, 그리고 과거로 흘러 언젠가 봉우리에 서면 계곡은 그저 지나온 자국일 뿐입니다.

 

이제 나 먼저 스스로를 털어버려야겠습니다. 과거의 먼지 하나라도 내 탓으로 돌렸지만 앞으로는 절대로 내 탓이 아닌, 누구의 탓도 아닌, 오직 날씨 탓으로 돌려 아무 죄 없습니다. 양심의 가책은 과거에서 오는 게 아니라 미래에서 오기에 결백합니다. 이런 생각이 자기합리화일까요? 아닙니다. 과거에 희생당하여 오늘이 불행하다면 그럴 수도 있지만, 과거는 오직 미래의 봄이 들어앉을 터라서 안 그렇습니다.

 

다만 속일 수 없는 흔적이 있다면 멍든 자국입니다. 푸릇푸릇 과거가 지난 발자국에 비바람, 눈보라, 또 많은 한숨이 겹쳐 보일 듯 말듯 하지만, 언젠가 그 자리를 빙 둘러 돌을 쌓고 씨를 뿌려 꽃을 가꾸겠습니다. 그때는 약간 눈물 흘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진작 꽃밭을 일구었어야 되었는데 이상하게 길이 늦어져 그동안 너무 많이 아팠을 테니깐 말입니다. 토닥토닥 흙을 두드리고 매만져 달래주겠습니다.

 

과거에 미래의 화단을 마련함은 나를 용서한다는 뜻입니다. 못난 사람이 과거에 묶여 살고 꿈자리나 뒤숭숭하지, 시간은 늘 미래에서 출발하여 현재와 과거로 흐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안 그렇습니다. 그래서 슬퍼할 것은 세상에 별로 없습니다. 분노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스스로가 용서되면 세상 모두가 용서되기에 봄을 가져다가 모두에게 나누어 주고 나도 한 움큼 끌어안겠습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시계바늘은 잘못되었습니다. 불행은 이런 착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반대입니다. 누군가 지금 먼 미래에 봄을 들고 반대인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달리는 시계바늘을 타고 오는 중입니다. 지금이 몇 시냐고요? 죄송하지만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봄을 들고 오는 그가 어디만큼 왔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꼭 오고야 말 그가 서 있는 곳과 지금의 거리만큼이 시간이겠습니다.

 

20061029 이정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