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에 관한 자기분석 / 이정문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이 1859년에 출판되었습니다. 25년간 연구하여 펴낸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입니다. 다윈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자신의 연구가 기존의 종교관을 뒤엎는 결과가 나오리라 판단하고 발표를 미루었지만, 막상 발표된 후에는 유럽에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기원전 4004년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그 동안의 통설을 뒤집었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거쳐 원숭이에서 진화되었다는 연구결과는 종교계를 발칵 뒤집었습니다. 그러나 다윈은 종교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 무엇의 무엇, 또 그 무엇의 무엇은 계속 연결되어 우리가 알 수 없는 그 어디엔가는 신이 존재하리라 믿었습니다. 방대한 자료와 실증적인 연구결과에 반대파들은 기가 질려버렸습니다. 그러나 다윈은 원숭이와 인간 사이, 즉 인간으로 진화하는 과정을 증명치 못하고 오직 잃어버린 고리라는 명제만 남기고 죽었습니다. 그 후 많은 고고학자와 인류학자에 의해 호모 사피엔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라는 유인원이 밝혀지고 현생인류의 직접 조상인 크로마뇽인과 자바인 북경인의 유골을 발굴함으로써 원숭이가 인간으로 진화되는 과정이 어느 정도 밝혀졌습니다.
동물과 인간의 차이는 여성이 자유롭게 언제든지 성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 다음은 종교적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직접적인 동물체험을 할 수 없어 그 속을 알 수는 없지만 개가 일출이나 일몰의 광경을 보고 과연 장엄함을 느낄 수 있을까. 인간처럼 어떤 경외감을 가질 수 있을까. 학자들은 인간만이 갖는 느낌이라고 합니다.
얼마 전부터 섹스에 관한 시를 생각하다가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내면의 색깔을 발견했습니다. 섹스와 관능의 색은 노랑입니다. 그런데 왜 나는 섹스가 노랑으로 느껴지지 않고 꼭 흑백이나 회색으로 느껴질까, 섹스에 관한 글을 쓰면 왜 필체가 음울해지고 폭력적이며 자기 파멸적으로 될까.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억압된 감정이 있어서 그럴겁니다. 그렇다면 그 억압된 감정은. 남녀칠세 부동석이다, 음흉하고 수치스런 행위다, 죄악의 원천이다. 사도바울의 말처럼 정욕을 정 견딜 수 없어서 차선책으로 결혼하는 것이고 독신생활이 바람직하다. 부처님도 아내를 버리면서까지 여자를 멀리 했다. 득도하는 스님은 다 독신이다 등등. 제 스스로 정체를 밝히려 들지 않았던 기존의 관념에 억눌렸던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은 자연스럽게 저로 하여금 나만의 <종의 기원>을 쓰게 만듭니다. 무의식적으로 나를 지배해온 모든 생각과 사회관념을 하나씩 증명해나가 원래의 내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길가메쉬 영웅전>이라는 메소포타미아의 신화를 보면 길가메쉬가 영원한 생명을 찾아 모험하는 중에 산 속에서 늙은 주모를 만납니다. 단순하고 간단한 그들의 대화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찾으러 가는 중이다.”
“영원한 생명? 호호, 헛수고 하지 마시오. 이 자리에서 먹고 마시며 여자나 즐기는 현명함을 택하시오.”
1. 오려 거든
오려거든,
블랙러시안 위스키 언더 락으로 비틀비틀
미니스커트 치켜 올려 허벅지 드러낸 모습으로 오라.
원형 물침대 포르노 티비 켜진 그 모텔 특실
두터운 커튼 드리워
교활한 하늘 안 보이는 어둠으로 오라.
네 손톱 아래 먹장구름 드센 바람
죽음과 삶의 틈새로 뻗은 낙엽 날리는 거리를 떠돌아
아무데나 몸 눕혀 목 졸리려니
꼭 미친년으로 오라
광기를 몰아 늦가을 밀어내는 우중충한 11월의 어느 날
그 무겁고 쓸쓸한 관능으로 오라.
2. 섹스
오해하지마
순결이나 정조 따위를 원한 게 아니야.
나신의 끝에서 꽃잎 질퍽한 흙탕이 어둠의 거미줄에 걸리기 원했어. 몸짓
따라 파고들다가 바닥의 문이 열리면 배창자 한 줄로 연결된 두 개의 바다가 만난 거야. 아무도 모르는 폭풍의 바다가,
서로 꼬이고 뒤틀리고 엉켜들고, 폐장과 심장을 물어뜯어 숨결과 피가 뒤섞여 너와 나의 생명이 뒤죽박죽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의 검은 바다가 펼쳐진 거야.
그 바다에 등 하나 켜놓고 나오길 원했지.
3. 안개도시
안개 속의 안개를 벗기고 또 벗기다가 오래 전의 안개가 또 한 꺼풀 잡혀, 매듭을 풀자, 스르르 내려앉아 드러나는
어깨선 유방 배 그 아래 또 그 아래, 어느 한 곳 아프지 않은 데가 없을 것이다.
밤하늘에 초승달 걸려 구름 한 점 없던 날, 보여지는 외로움에 움츠려 재빠른 걸음으로 공지천 건너 카페의 구석에
몸을 숨겼던 사내
그 아름다운 안개도시, 춘천.
4. 점멸등
바람, 가을 흩어진다
네가 떠난 새벽 넝마 같은 침대에 엉켜든 여러 갈래 길, 목 잘린 은행잎에 소스라쳐 거리로 뛰쳐나와 또 잃어버린 길이었던가,
교차로 가운데 서성이다 늦가을 비에 쫓겨 이제는 588에라도,588에라도 가야 할까 보다.
흩어지기 전에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
억세풀 울부짖는 벌판을 지폐 몇 장의 알몸에 얹어 낯선 여자의 살결에 묻고, 그래도 계속 울어대면 마약이라도 물어 제 스스로의 살결을 더듬고, 찬비 쓰다듬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 히쭉히쭉,
신호등이냐고요? 아닙니다. 텅빈 침대 가운데 매달인 점멸등입니다. 새벽에 일어나보니 홀로 껌뻑껌뻑 대고 있더군요. 흩어진 그녀의 속옷 위에서.
5. 마침표
검은 장미, 뼈 한 꺼풀 사르르 깍아내는 아픔, 그런 중독으로 매니큐어 짙은 손톱을 세워 오라. 숨결 거친 애무에 멍이 들어, 부딪치는 어둠마저 아파올 때, 훌쩍 들이마시는 소주 첫 잔의 입맛으로 거두어라.
너는, 그렇듯 사나워
나는, 그렇듯 황홀해
지우개 몸짓 따라 지워지다가 기어이 밤마저 다 지워진 뿌연 새벽에 아무 것도 아닌 채 잠들려니, 허벅지 살결로 끌어 마시며 죽
음을 비벼대 침입하라. 뽀얀 유방에 묻힌 숨 한 점. 그 화려한 마침표.
6. 가을여인
가랑가랑 비의 몸배 애처러워 그 허리 감아 끌자
늦가을 휘청 쓰러져 안겼다.
아, 찬 입술, 식어가는 체온
노랑저고리 벗겨 9월의 풍만한 가슴
붉은 치마 벗겨 10월의 농염한 둔부
또 정열의 샘
서랍장 열어 구름 뜯어다가 점점 찍고, 살살 눌러
또 점점 찍고, 살살 눌러
촘촘한 손길 입히고 감싸, 칠성판 위에 눕힌다.
밤마다 침상에 찾아들어
적막의 옷 벗기고 더듬고 애무하여, 그렇듯 몸부림으로 매달려
바다를 떠 머리맡에 펼치던,
속옷마저 입지 않고 찾아와 알몸으로 파고든 여인
쿵쿵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나무못 박는 소리가
비 내리던 날,
관 하나가 11월의 회색 하늘에 묻혔다.
20061112-2022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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