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는 그가 1933년 1월 30일 총리가 된 지 1개월 만에 시작되었다. 2차 세계대전초 독일군이 연승을 거두자, 유럽에 거주하는 대다수 유대인은 나치와 그 위성국 치하에 들어갔고, 대서양에서 볼가 강, 노르웨이에서 시칠리아까지 그곳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모든 인간적 권리를 빼앗겼다. 재산은 몰수당했으며 그들 대부분이 게토와 집단수용소에 감금되었다. 당시 나치는 이미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도의 정책을 수립하고 있었다.
시체를 태워 연기를 내보내던 아유스비츠 굴뚝
폴란드어로 오슈비엥침,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영화로도 이미 알려질 만큼 알려진 곳이다. 끔찍하고 혹독했던 수용소의 잔해들은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 어디서든 누구나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를 관람하려 할 때, 혹시 당신도 반문할지 모른다. ‘지금 뭐가 아름답다고 했지?’ ‘인생이 어떻다고?’…… 의아한 낯빛을 보일지도. 이렇듯 모든 관문은 제목을 통과한다. 음식이나 수면의 공간뿐이 아니라 예술이나 우주 다른 행성의 입구까지도, 액세서리처럼 상징성을 띤 첫 章의 명찰을 매우 중요시 한다.
통칭 인생이라 해 볼까! 과연 인생은 날生 때부터 고유 형용사를 하나씩 가지고 나왔을까? 아름답고 추하고 착하고 악하고 진실되고 거짓되고, 진眞선善미美, 그 원래의 형상이나 특히 불변의 현상이란 게 인생에게 실제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지메는 현재진행형이다. 전쟁으로 점철된 인류역사에 뿌리를 둔 채, 아무렇지도 않게 혹은 무지막지하게 오늘도 실행되고 있다.
고 박경리 작가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에 처음 이사를 와서 <객지>라는 시를 썼다고 한다. 그녀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쓴 시에는, 집 밖만 나서면 짐승 떼들이 득실대었다는 모진 세월 이야기가 들어있다. 세상이 얼마나 외로웠기에……! 내 경우도 비슷하다. 자동차 내부에 대하여 전혀 몰랐을 땐 밤낮 구분없이 산과 들 따지지 않고 달렸는데, 언제부턴가 운전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자동차 기관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랬다. 내게도 인생은 그렇지 않았을까. 욕망과 질투로 충혈된 눈빛들이 또렷하게 읽혀지면 질수록, 겸허함이 늘기도 했지만 동시에 혐오와 경멸감도 늘었다. 솔직한 심정이다.
내 버려 둬. 아무 문제없을 거야!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 나오는 귀로와 도라 죠슈아 세 명의 가족도 그랬을 것이다. 이미 약혼자가 정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초점을 맞추어 귀로에게 기어든 도라. 탁자 밑에서 키스 한 번 나누고서 그들은 눈 깜짝할 새 귀여운 아들을 낳는다. 아들을 자전거에 매달고 달리게 된 그들은 분명 행복한 풍경 자체였을 테니, 누가 그걸 추하다 하랴.
하여간 아름다운 꼴을 못 본다니깐! 희대의 미치광이 히틀러는 왜 또 그렇게 유대인들을 미워했는지- 항간에는 그가 어린이주일학교에 다니던 시절, 예배당에서 천방지축 뛰어다니며 발자국 찍기 놀이를 하다가 장로에게 욕바가지를 먹은 후, 교회 특히 유대교라면 치를 떨게 되었다는 풍문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소문이니 확실한 이유는 모르겠다- 그러나, 단순한 이지메bulling 심리라고만 파악한다 해도 히틀러는 분명 정신없는(다른 말로, 머리가 없는) 인간이다. 상상해 보라. 정신없는 신체의 행동거지와 그 여파를! 수용소 포로들에게 오케스트라 행진곡을 들려주며 열을 맞추게 하고 통제를 했다고 하니, 물이 나오지 않는 샤워기로 독가스를 흘려보내 15분 안에 천오백 명을 죽였다니, 이런저런 만행의 결과로 600만 명의 유대인들이 그의 손에 죽었다니……(?)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귀로와 그의 어린 아들 죠슈아까지 수용소로 끌려 들어가게 되고 이를 본 아내 도라도 수용소 열차에 함께 몸을 던진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을 따라 가는 여자의 모습은 국경이나 민족을 넘어서는 불변의 모성母性! 어쨌든 사랑의 힘은 편견의 힘 보다 쎄다!
귀로의 성격은 도라와의 첫 만남과 연애의 과정 속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우선 모자를 벗고 무릎을 구십도 각도로 내리고 동끼호테 모션으로 오른팔을 빼면서 그녀에게 인사한다. 자기가 왕자가 되고 싶었는지 그건 모르겠지만, 도라에게 붙인 첫 호칭은 ‘공주님’이다. 우연한 마주침을 무척 즐거워하는 도라를 위해 마치 연극인이라도 된 듯 깜짝쇼를 벌이는 귀로는 우선 자신이 해피하다. 관객들 시선에는 ‘뭐 저렇게까지 오버액션이지…….’ 할 정도로, 비권위적이고 경쾌하다. 챨리채플린을 연상케 한다. 그런 그가 아들과 아유스비츄 수용소와 같은 참혹한 공간에 갇히게 되었을 때 어땠을까. 변함없이 이번에는 아들 앞에서 연기력을 발휘한다. 게임 시작!을 알린다.
자! 우리가 겪는 이 고통스러운 일들이 모두 게임 점수 1000점을 채우기 위해 시작된 거야, 라고 말한다. 죠슈아는 감쪽같이 속는다. 속아줬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빠의 리얼한 연기에 최면이 걸렸을지, 죠슈아에게 안 물어봐서 모르겠다. 어쨌든 그들은 1000점이란 고지를 향해 가는 선수들로 돌변한다. 끔찍한 수용소 안에서 언제 샤워실(가스실에 그렇게 제목을 붙였다)로 끌려가 죽을지, 영양실조로 죽게 될지, 머리카락만 남기고 알몸으로 목이 잘릴지, 예측할 것이 한 개도 안 남은 그런 상황에서 아들과 아버지는 게임을 시작한다.
행렬하는 중에 잠간 비어있는 방송실에 들어가 스피커로 아내가 일하는 곳을 향해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외쳐가면서!... 참말로 이 또한 기막힌 장면이 아니던가.
로마카톨릭 교회의 지도자였던 히틀러는 유대인에 대한 모독적인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까지 그들을 혐오하였다. “카톨릭교 여인은 유대인 아기의 유모가 될 수 없다. 그것은 교회를 모독하는 행위다. 그것은 마귀가 성령과 접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라고.
사실 세계와 인류의 모든 전쟁은 무기의 전쟁이 아니라 종교의 전쟁이다. 개신교(기독교)도들은 이를 아예 하나님의 역사와 마귀의 역사로 나누어 물고기 그림으로 도표화하기도 했지만, 나는 분명 믿는다, 예수의 본래의 취지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하나다(갈3:28-29)” 라는 것을. 보르헤스式으로 말하자면 ‘나는 물고기요 어부요 낚는 자요 낚기는 자’ 가 되는 것이다.
아버지는 죽는다. 쥐도새도 모르게 뒤꼍으로 끌려가 몇 발의 총성이 울렸는지 셀 수 없을 만큼 총알을 맞고 사라져, 더 이상 관객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아들과 최종 점수 따기를 약속하면서 이기면 탱크선물을 받게 될 거라고 단단히 최면을 걸어 아들을 꽁꽁 숨게 해 놓고서, 사랑하는 아내를 찾으러 분장을 하고 돌아다니다가, 후퇴명령을 앞둔 독일군의 불빛에 발각되고 만다. 아버지의 최후는 의외로 조용했다.
곧이어 오버랩 되는 죠슈아와 도라의 탱크 아래서의 상봉장면. 그리고 영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아버지! 아버지는 어디 있지? 그제서야 관객은 두리번거리다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아…저게 바로 사랑이구나. 뭉클한 가슴을 쓸어 담으며 자막 앞에서 멍하니 ‘인생은 아름다워’ 덜커덩 떨어진 간판을 바라본다. 아름다운가... 그래도.. 영화가 끝났어도......
2012. 5월 오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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