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과 칼럼

신진숙<문학적 공간의 생산>

미송 2012. 5. 23. 07:07

문학적 공간의 생산

 

덧없음, 그것은 아마도 우리 세계의 본질일 것이다. 모든 견고한 것은 대기 속에 녹아버린다. 경험은 기억이 되지 못한다. 대지는 흔들리고, 진리는 영원성을 상실한다. 모든 관계들이 굳어지기도 전에 폐기된다. 삶의 양식과 공동체를 묶고 있던 모든 것이 액화(液化)된 이래 자아와 세계는 결속력을 잃는다. 성좌를 읽으며 우주의 먼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었던 시간들은 소멸된 지 오래다. 소음과 속도에 중독된 일상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새로움이 끊임없이 다른 새로움으로 대체되면서 가속화된다. 현대세계에서는 어떤 새로움도 진정으로 새롭지 않다. 새로움의 유통기한은 짧다. 인간은 삶의 일부였던 많은 것들이 골동품이 되어가는 것을 경험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지켜보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이제 우리 모두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삶의 방식을 구조조정하거나 기억들을 갱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학은 이 덧없음과 함께, 덧없음을 넘어서 온다. 기실 현대의 문학은 덧없음이라는 자신의 진정한 조건과 대면해야 한다. 이제 문학의 가능성은 부재(不在)와 공허(空虛) 한가운데로 향해 있다. 어떤 의미도 오래 지속될 수 없으며, 어떤 진실도 환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문학은 부재의 형식 속에 자신의 거처를 마련하여야 한다. 덧없음은 현대 문학의 바탕이자 존재론적 형식인 것이다. 하여 문학은 언제나 이미 이 덧없음과 그 너머를 들여다보고자 노력한다. 모든 것이 녹아내리는 가운데 문학이 지닌 어떤 비극적인 정신이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우리가 생각하는 문학적 공간은 바로 이러한 맥락 속에서 사유되어야 하리라. 문학은 일상적인 언어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침묵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세계의 덧없음을 뚫고 새로운 삶의 공간을 열어 놓는 힘을 잃지 않는다.


 

비관계적 공명들

 

문학적 삶은 부유(浮遊)한다. 이념도 의미도 불투명하다. 모든 관계가 세속화됨으로써 문학은 자신의 의지대로 남아 있을 수 없게 된다. 불확실성과 불안의 감성만이 공감 가능하다. 세계의 문장들은 완성되기도 전에 기화(氣化)한다. 기호들은 발화(發火)하지 못한 채 교체된다. ‘새로워지라!’는 현대세계의 명령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문학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이제 문학은 인간과 우주, 자아와 타자 사이를 연결하던 의미의 오래된 통로들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이다.

 

그럼에도 문학은 포기하지 않는다. 작가는 덧없는 삶의 부재 앞에서 자신의 내면을 창조한다. 고유한 리듬과 기호가 살아 움직이며, 마음의 유로와 언어의 흐름이 겹쳐지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시인들이 현대세계의 비극을 시의 바탕으로 바꾸기 시작한 것과 같은 방식이다. 모든 것이 사라짐으로써 어떤 의미도 지속적으로 구성할 수 없는 공허 앞에서 문학은 존재의 의미를 되찾고,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상상할 수 있기를 원한다. 그것은 진정한 문학적 공간의 탄생을 예고한다.
신동옥의 시 〈빈집〉에서 울려오는 이상한 공명들에 주목해 보자.


당신은 구두를 가진 적이 없고
발가락이 아름답다
나의 구두가 안간힘으로 뾰족함을 벼려 당신의 지붕을 달랜다

나는 당신의 시공자가 아니다
나는 당신의 적이 아니다
나는 당신을 모른다

벽과 천장
배치와 망치
나날의 조감도
임무와 공기
노동과 희사

간결하게 이어가는 템포로 마침내 당신은 완결된다
당신은 조금 가깝고 나는 조금 소란하다

기본형 골조를 거느리고
텅 빈 내부로 흐너져 안기는

당신이라는 천장을 기워 입은 나는
당신을 옥죄는 치욕의 척추뼈

코르셋
나는 당신의 용적을 셈한다

나의 구두가 안간힘으로 뾰족함을 벼려 당신의 지붕을 달랜다
당신은 내 친구가 아니다

나는 끝장을 모른다

우리는 완벽하다

 

―신동옥 〈빈집〉(《창작과비평》 2011 겨울) 전문

 


신동옥 시인에게 문학적 공간은 일상적인 관계로부터 탈퇴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빈집”은 “친구”가 함의하는 사교적 관계들로부터 이탈한다. 문학적 공간 생산이 관계에 대한 성찰과 함께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계란 통상 한 존재에게 예상할 수 있는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관계가 인간의 정체성에 부여하는 절대적인 힘을 생각할 때 쉽게 이해된다. 자아의 존재 의미는 국가와 국민의 관계, 부모 자식의 관계, 동료 관계, 친구 관계, 연인 관계, 남녀 관계 등 다양한 관계들로 이루어진다.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존재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 배치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상적인 관계에 대한 수용만이 정상적인 삶을 약속한다.

이 말은 무서운 진실을 감추고 있다. 기실 모든 인간관계란 인위적이다. 그 경우 인간관계는 인간적인 시각을 벗어나는 것을 배제한다. 말하자면 지극히 미분(微分)적이거나 거대한 우주적 흐름을 절단함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다. 인간중심주의적 시선은 인간관계의 바깥을 부정하는 것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관계의 내부만이 진정으로 의미 있는 것으로 규정된다. 바깥으로의 탈출은 제지당한다. 인간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일원으로써만 삶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그렇지 않은 모든 것은 추방과 폭력에 노출된다.

 

따라서 관계 내에서 관계에 대한 진정한 성찰과 비판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시인이 “빈집”으로 들어가, 관계의 바깥에서 자신의 공간을 만드는 진짜 이유이다. 빈집이 지닌 비(非)관계성은 현대세계의 인위적 삶에 대한 비판이자 존재의 내면에 대한 성찰의 의미를 지닌다. “구두를 가진 적이 없”는 당신의 “발가락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이 아름다운 발은 구두와 사회 그리고 대지가 상호작용하는 하나의 관계로부터 탈구된다. 시인은 이러한 탈구를 “완벽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빈집과 시적 주체가 세계로부터 공제되지만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나는 당신의 시공자가 아니다”라고 고백하는 데서 알 수 있듯, 그의 모든 추구가 집(세계 내 물리적 공간)에 대한 어떤 소유권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유에 대한 부정은 시적 공간의 출발점이다. 더불어 이러한 비관계성의 시선은 어떤 종류의 적대관계로부터도 탈퇴하게 한다. 이제 “적”의 개념은 무의미하다. 이처럼 시인은 비관계적으로 관계 맺는 삶의 가능성을 상상함으로써 우리를 새로운 문학적 공간으로 옮겨 놓고 있다.


 

공간의 기억과 전유

 

한편 시인들은 현대세계의 덧없음과 맞서기 위하여 새로운 시간과 공간에 대한 사유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존재의 내면을 구성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성찰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중심에는 오래된 삶의 양식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존재한다. 기실 현대적 삶은 공간의 기억을 무화시킴으로써 가능하다. 현대적 의미의 공간이란 공간으로부터 사적인 기억의 흔적들을 지우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공간에 대한 주체화된 기억들은 공간을 획일적으로 균질화하고자 하는 모든 기획들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간 속에서 실제로 살아가는 존재들은 자신만의 공간적 실천을 통해 공간을 새롭게 전유한다. 추상적으로 기획된 공간을 개인적인 상상과 기억들로 재전유하고, 파편화된 상태로 머무는 물리적 공간을 자신의 내적 기억 속에 통합시킨다. 공간에 기입된 경험의 두께와 기억들은 추상화된 현대 공간을 다성(多聲)적이고 이질적인 공간으로 변환시킨다.

 

문학적 공간 역시 상상적으로 공간을 새롭게 재현하는 행위 중 하나이다. 문학의 공간은 끊임없는 변화를 요구하며 오래된 간판들을 갈아치우는 자본주의 공간의 차가움에 저항한다. 이는 이대흠 시인의 〈천원집〉이 지닌 시적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 동네 삼거리엔 구멍가게 하나 있는데요
가게나 점방이라는 간판도 없이 한 사십여 년 장사하는 집인데요
팔순인 월평 할머니가 하루에 과자나 두어 봉지 파는 곳인데요
물건 사러 온 손님이 가격표 보고 알아서 돈 주고 가고
외상값 같은 것도 알아서 머릿속에 적어 넣어야 하는 곳인데요
전에는 하루에 막걸리 두 말도 팔고 담배도 보루째 팔았대요
글 모르는 월평 할머니와 글 모르는 손님이 만나면
물건값이 눈대중으로 매겨지는 집이기도 하지요
물건값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쓸 사람이 정하는 것이라는
월평 할머니의 경제학이 통하는 곳이기도 한데요
가격표 같은 것은 그저 참고 사항에 불과한 것이고요
낱돈 없는 날에는 구백 원짜리가 천 원짜리가 되고
천이백 원짜리가 천 원짜리가 되어서
그냥 천원집이라고 불리는 집인데요
한 십 년 묵은 외상값이 부조금이 되기도 하는
천원집이 있기는 있었는데요

 

―이대흠 〈천원집〉(《시와 사람》 2011 겨울) 전문

 


이 시의 의미구조는 단순하다. 복잡하게 얽힌 의미의 실타래는 찾아볼 수 없다. 단순한 어미의 반복과 이 반복에 의해 깊어지는 의미가 있다. 이대흠 시인의 대부분 시들이 그러하듯, 이 시 역시 작고 사소한 삶이 지닌 보이지 않는 진실에 주목한다. 그런데 그의 진실은 현실적인 맥락으로부터 탈퇴한다. “천원집”은 자본주의 사회가 열어 놓은 어떤 종류의 비전과도 비슷하지 않다. 진보의 신화를 공유하지 않는다. 즉, “천원집”은 시간과 공간이 멈춘 곳이다. 그 때문에 하나의 공간과 인간들이 맺는 관계가 지속될 수 있었다. 속도의 바깥에 자리 잡음으로써 천원집은 소박하고 정겨운 삶의 장소로 남아 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점에서 천원집은 자본주의의 미친 속도를 잠재울 수 있는 하나의 공간이다.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삶을 그 자체로 고귀한 삶의 표징으로 되살려내는 시인의 시선이 따뜻하다. 시인은 천원집을 개인적 관계로부터 초월적인 신화의 차원으로 고양시켜 나간다. 이것이 “월평 할머니의 경제학이 통하는 곳”, 자본주의의 대안으로서 문학적 공간이 지닌 의미이다.

 

그러나 현대세계의 현실 공간과 문학적 공간의 대비가 성찰에 이르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감정적 개입의 강도를 조절하는 것이다. 서정이 주는 느낌은 그 자체로 사유이기도 하다. 느낌의 바탕인 직관은 몰입이 아닌, 존재에 대한 투명한 성찰로 이어진다. 그것은 서정적 관점에서도 마찬가지다. 또한 여기에서는 문학의 현대성과 반현대성에 대한 구분 또한 중요하지 않다. 서정과 대상 사이의 거리는 심미적 거리이면서 여전히 성찰적인 간격 안에 놓여 있어야 한다. 서정은 심미적이면서 동시에 이성적일 수 있는 자신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실험해야 하는 것이다.

 

권혁웅의 시 〈삼국지 열전―도원결의〉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소박하고 평범한 존재의 삶으로 치환함으로써 삶에 대한 비극적 인식과 희극적 위로를 동시에 보여주는 전략을 취한다. 여기서 전략이란 서정적 직관과 구분된다. 시의 화자와 대상 사이의 거리를 유도함으로써 비평적이지만 서정적인, 그래서 기묘한 하나의 시선이 구성된다.


혜성 초등학교 앞 혜성분식
오덕순 씨(가명, 1968~ )는
오뎅과 떡볶이와 순대의 변신합체
혹은 도원결의다
다른 시간에 태어났으나
같은 시간에 최후를 맞는
폼생폼사의 일기당천이다
하굣길 아이들이 복숭아 꽃잎처럼 떠내려 오면
오덕순 씨, 청룡언월도처럼 굽은 손으로
진형을 짠다
오뎅은 물에 뜬 몽충(蒙衝)이요
떡들은 화공(火攻)이며
순대는 일사불란하니
아이들이 물에 불은 것처럼 부른 배를 안고
정말 하굣길인 것처럼
와와, 흩어져 버린다
오래전에 혜성처럼 나타난 오덕순 씨, 요즘은
김밥태평천국, 컵강정마을, 원플러스원 피자의
우후죽순에 위세를 제법 잃었으나
그래서 장팔사모처럼 쭈글쭈글해졌으나
여전히 이십오 년째 도원결의다
혜성의 꼬리처럼 길고 긴
혹은 차갑고 쓰라린 변신합체다

 

―권혁웅 〈삼국지 열전―도원결의〉(《유심》 2012. 1/2) 전문

 

문학적 공간이란 실재와 기억, 과거와 미래, 부재와 상상, 소멸과 희망이 결합한 변증법적 공간이다. 따라서 문학적 공간은 동일화할 수 없다. 다질적인 공간들이 변증법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말하자면 오덕순 씨의 떡볶이집은 희극과 비극이 공존한다. 떡들을 화공으로 장착한 그녀의 도원결의는 실제로 “차갑고 쓰라린” “길고 긴” 자본주의의 고단한 노동을 의미한다. 그녀의 삶을 움직이는 것은 거대한 이데올로기이나 전망이 아니다. 그녀의 전쟁을 추동하는 힘은 오로지 생에 대한 욕망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삶, 개인적인 윤리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 자신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그녀가 속한 집단을 대표한다. 어떤 특정한 주체가 아닌 상태로 그녀가 그녀‘들’의 삶을 대표하는 것이다. 그녀는 식별될 수 있는 주체가 아니다. 하나의 명확한 혁명주체를 대표하지도 않는다. 도래하고 있는 새로운 정체성을 상징하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평범한 삶을 설명한다. “이십오 년 째 도원결의”만을 하고 있는 그녀의 삶에는 믿을 만한 동지도 없다. 정해진 삶과 내면을 소유할 수 없는 삶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의 것이 아닌 것들과 “변신합체”함으로써 삶을 유지해 왔다. 그야말로 “일기당천”의 삶을 살아온 것이다. 그녀의 전술은 오로지 필생(必生)이다. 반드시 살아남는 것. 그러나 오덕순 씨와 같이 묵묵히 사회구조의 문제를 자신의 삶으로 치환했던 사람들이 없었다면, 세계는 지금과 같이 유지될 수 없었으리라. 평범한 삶이야말로 세계를 진정으로 풍부하게 만든 기본 요소인 것이다. 따라서 존재들의 공간적 실천은 공간기획자들의 것보다 더 튼튼하다. 공간을 기억하고 또 전유함으로써 공간의 생산은 다양해진다. 이제 우리는 문학적 공간이 개방하는 정치적인 것에 도달한 것이다.


 

문명의 식욕과 책의 운명

 

우리의 문명은 늙음에 대해 무지하다. 어떤 늙음도 허락하지 않는다. 늙음은 죄이다. 끝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며, 새롭지 않으면 주목받지 못한다. 늙는다는 것은 삶으로부터 후퇴하는 것이다. 그것은 현대세계의 윤리가 개인의 윤리로 국한되면서부터 더욱 심화된다. 자기에의 배려가 자기에의 애착으로 축소된 것이다. 자기를 돌보고 건강을 염려하는 것은 이 시대의 사명처럼 변질됐다. 이제 자본주의의 모든 일상세계는 모든 시간을 감각을 즐겁게 하고 몸을 돌보는 데 투여하도록 권장한다. 현대의 인간은 건강과 청결을 유지하고 몸을 꾸미기 위해 기꺼이 소비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역설을 낳는데, 몸에 대한 배려는 자기 충족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즉, 몸은 하나의 기호와 같이 작동한다. 아름답게 가꾼 몸은 대중 앞에 전시되는 기호이다. 이처럼 전시되는 아름다움이란 미적 본질과는 무관하다. 아름다움은 욕망의 체계에 의해 구성된 하나의 기호에 불과하다. 모두가 욕망하지만 모두가 가질 수는 없을 때, 아름다움의 기호는 생명을 부여받는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실체도 정체성도 지니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기호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어떤 환영이기 때문이다. 실재가 아닌 ‘잉여’ 상태. 그것은 교환할 수 있는 사물들의 관계로부터 일탈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체계의 바깥에서는 그 자체로 어떤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즉, 몸은 환상과 신화가 만들어내는 하나의 관념인 것이다.

 

김기택 시인의 〈오늘의 특선 요리〉에서 비판하는 식욕의 본질 역시 여기에 있다. 문명의 식욕은 잉여의 가짜 식욕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생존과 무관한 식욕의 과잉이 현대문명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다.

높은 바람과 구름을 타고 다니는 독수리 날개의 넓고 튼튼한 부력만을 골라 냉장 숙성시킨 후 구웠습니다.
하루 중 가장 차갑고 맑은 시간에 터져 나오는 새벽닭의 힘찬 울음만을 엄선하여 바삭바삭하게 튀겼습니다.
시속 111킬로미터로 달리는 치타의 근육이 만들어내는 팽팽한 탄력만 가려내 담백하게 고았습니다.
발톱과 이빨이 간지러워 우는 고양이의 갓난아기 울음에서 애절한 눈빛만 솎아내 고소하게 볶았습니다.
수천 미터 밖 물살의 힘과 방향을 읽는 물고기 지느러미를 푹 끓여 고감도 감각만을 진하게 우려냈습니다.
두근거리는 토끼의 심장에서 연한 놀람과 어린 두려움을 떨림이 살아 있는 그대로 갖은 양념에 무쳤습니다.
주인을 향해 막무가내로 흔들어대는 개 꼬리에서 명랑하게 들뛰는 유전만을 갈아 즙을 냈습니다.
씹지 않아도 녹아서 핏줄로 전율하며 스며드는 육질과 육즙의 싱싱한 발버둥만을 양념으로 사용했습니다.

 

― 김기택 〈오늘의 특선 요리〉(《현대시》 2012. 1) 전문

 


현대인의 놀라운 식욕은 배고픔과 무관하다. 인간은 날마다 더 창의적이고 더 생생하고 더 몸에 좋은 음식을 원한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음식의 환상을 꿈꾼다. 식욕은 더 이상 욕구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철저하게 소비와 욕망의 문제이다. 기실 “독수리 날개의 넓고 튼튼한 부력만을 골라 냉장 숙성시킨” 음식은 식용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제공하는 환상은 사라져가는 식욕을 자극할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식탁의 진실, 청결하고 건강한 식탁이야말로 가장 폭력적인 타자의 희생을 담보로 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즉, 음식의 재료인 닭들은 이미 “새벽닭의 힘찬 울음”을 상실한 지 오래다. 그럼에도 힘찬 울음에 대한 환상만이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식욕을 창출하도록 이끈다. 따라서 식욕에 대한 섬세한 자극이 끊임없이 요구된다. 이제 음식의 환상은 음식의 본질을 대체해간다. “씹지 않아도 녹아서 핏줄로 전율하는 스며드는 육질”로 상징되는 식욕의 잉여상태는 그 자체로 인간의 삶을 음화로써 보여준다. 우리가 먹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음식의 이미지, 그 환영이다. 물어뜯을 이빨은 필요 없다. 이것이 음식을 통해 구현되는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공간은 더 이상 어떤 주체적인 욕망의 창안도 불가능하다. 생생한 것일수록 식욕은 가짜일 확률이 높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만 연루된, 타자의 삶에는 둔감하며 나아가 타자의 불행을 통해서만 삶의 안정감에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는, 외설적이고 빈약한 현대인의 내면을 감추기 위해 제공되는 은밀한 환상들 중 하나이다.

 

이 문명의 식욕에 대비되는 것인 “책”들의 운명이다. 조동범 시인의 〈늙어버린 책들의 세계〉에서 구현된 책들의 세계가 보여주듯, 책들의 운명은 젊음과 생생함을 추구하는 문명의 식욕과 정확하게 정반대편에 서 있다.


소문도 없이 책들이 늙어버렸습니다. 석양을 등에 지고, 늙어버린 책들은 찢어진 페이지의 이야기를 애써 반추합니다. 폐허가 된 서가로부터 책들은, 애초의 모든 세계와 원형을 떠올리고요. 오래전에 사라진 눈물을 흘리며 하염없는 유폐를 서성입니다. 책들의 과거는 소멸된 예언과 주술로부터 오래도록 소환되었지만, 사라진 주술처럼 세계는 영원토록 쓸모없습니다. 소문도 없이 늙어버린 책들을 읽으며 당대는 엄숙하고요. 진부한 서가로부터 세계는 진실하지만, 페이지마다 기록된 진실을 덮으며 독자들은 저마다의 눈물을 계량합니다. 소문도 없이 서가는 폐쇄되었고, 황폐한 세계로부터 누군가는 잃어버린 신화를 기원합니다. 찢겨진 페이지마다엔 사라진 눈동자가 선명하고요. 잃어버린 문자는 대륙으로부터 영원히 추방됩니다. 폐기된 기록을 호명하며 책들은 놀랍도록 늙어버립니다. 책들은 늙고, 사라진 세계에 대한 소문은 오로지 바다로부터 무성합니다. 소문도 없이 책들은 어느새 찢어진 페이지로 가득하고요. 추방당한 대륙의 석양으로부터 책들은, 소문도 없이 오래도록, 오래도록 타오릅니다.

 

― 조동범 〈늙어버린 책들의 세계〉(《시와 사상》 2011 겨울) 전문

 


“책들”은 “폐허가 된 서가”에 꽂혀 있다. 본디 책들은 “애초의 모든 세계와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오랜 인류의 느낌과 생각들이 축적된 책의 두께와 깊이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책들”로부터 들을 수 있었던 어떤 예언과 주술들은 그 힘을 상실한 지 오래다. 이제 문자들은 “쓸모없”는 것들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책의 진실은 “계량”되고, 감동은 계산 가능하다. 책의 아우라는 사라지고 없다. 하여 “잃어버린 문자는 대륙으로부터 영원히 추방”되고, 책들은 늙어간다.

 

그러나 책은 소멸하지 않는다. 대륙의 석양으로부터 추방된 늙어가는 책들은 “오래도록 타오”를 것이다. 역설적으로 책은 폐허가 된 곳에서 더욱더 오래 불타오른다. 그리고 책들은 황폐하고 황량한 세계의 한복판에 존재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문명이 젊음을 숭배하고 새로움을 찬미하는 동안 “책들”은 고요히 자신의 시간과 공간을 완성해 갈 것이다. 책들은 문명의 논리에 복종하지 않음으로써 늙을 수 있는 자유를 지닐 수 있게 된다. 책은 늙음 때문에 문명의 식욕으로부터도, 새로움의 감옥으로부터도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시인들은 은연중에 말하고 있다. ‘문학적 공간은 그 자체로 무용한 공간이다’라고. 그러나 이들은 또한 알고 있다. 문학의 무용성만이 문학의 의미라는 것을. 일상적 언술 체계로는 어떤 것도 말하지 못하며, 침묵의 언어만이 현대세계를 진정으로 다시 사유하게 만든다. 문학의 공간은 세계 내에 존재하지만 진정으로 일탈하는 지점들에서 생산된다.

 

 

신진숙 | 문학평론가. 2005년 《유심》으로 등단. 저서로 《윤리적인 유혹, 아름다움의 윤리》가 있음. 현재 경희대 학술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