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과 칼럼

신진숙- 시의 심급(深級)과 심금(心琴)

미송 2012. 5. 17. 07:28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에는 이런 말이 있다. “지금 또 여기에 말[言]이 있다고 하자. 그것이 이와 같이 밝은 지혜[明知]인가 이와 같지 않은 것인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같은 것과 같지 않은 것이 모두 비슷한 것이기 때문에 곧 궤변(詭辯)과 다를 것이 없다[今且有言於此, 不知其與是類乎, 其與是不類乎, 類與不類, 相與爲類, 則與彼無以異矣].” 인간은 언어 없이는 어떤 이치에 접근할 수 없다. 그러나 언어는 완전하지 않다. 언어는 한정된 세계만을 지시할 뿐이다. 세계 밖으로 누락된 진실에는 도달할 수 없다. 말로써 다른 입장들은 억압되고, 하나의 가능한 의미만이 진실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완전한 소통은 없다. 통상적인 의사소통은 언어의 바깥을 간신히 배제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언어로써 ‘명지(明知)’할 수 없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라캉이 말한 ‘문자’의 개념을 떠오르게 한다. 문자는 하나의 동일하고 안정적인 기원을 투명하게 지닐 수 없다. 문자가 지시하는 대상/의미는 문자의 표면에 머문다. 모든 문자는 은유의 구조와 같다. 문자가 열어 놓은 것은 의미의 전달 가능성이자 불가능성이다. 문자 내부에는 문자화할 수 없는, 억압되고 누락된 것, 즉 ‘그 무엇’이 실재한다. 따라서 아무리 정교한 언어라 해도 의미는 불확정적이며 불명료하다. 라캉의 견지에서 본다면, 문자의 심급(深級)은 바로 이 불가능성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그렇다고 이 말이 문자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문자는 의미화할 수 있는 것과 의미화할 수 없는 것을 ‘누빔점(quilting point)’으로 맞물린다. 이를 통해 문자는 의미와 비의미 모두를 흐르도록 한다. 바로 그 점에서 라캉의 언어에 대한 이해가 장자와 만난다. 즉, 언어로써 모든 소통을 대신할 수 있다는 믿음은 곧 환상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하는 진정한 의미의 소통 혹은 소통의 주체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상호주관적인 언어에 대한 믿음 역시 그 바탕으로 돌아가 다시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통은 문자 내부에 혹은 문자의 바깥으로 누락되거나 망기된 것, 그래서 문자의 이면에 머무는 의미의 실재 혹은 비의미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소통보다 앞서는 것은 모호하고 결코 표현될 수 없는 말의 ‘심급’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에서 더욱 자명하다.

불가능한 감각과 사유

문자의 심급은 문자의 최종적 권위를 뜻한다. 그것은 어떤 분명하고 명확한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다. 심급의 자리는 오히려 비어 있다. 그것은 끝없이 이어지는 문자들의 연쇄 속에서 강박적으로 요구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반복적으로 요구되는 것 자체를 의미할 뿐, 그 의미를 메울 명료한 지시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비의미로서 심급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심급은 표층을 보증하는 확실한 심층적 의미와는 무관하다. 모든 의미의 시작이자 보증서로서 문자의 권위와 권력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라캉의 시각에서 본다면, 이 비어 있음이 곧 문자의 증서이다(필립 라쿠-라바르트, 장-뤽 낭시 《문자라는 증서―라캉을 읽는 한 가지 방법》 참조). 의미의 빈 공간이 하나의 의미를 만들어내고 또 유통시킨다. 물론 우리의 목적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심급이 끝없는 연쇄를 통해 의미로부터 미끄러져 나간다는 것이다.

 

어떤 문자도 완전하지 않다. 문자에 대한 통상적 합의는 심급으로 존재하는, 주체를 향한 불가해한 무의식적 요구에 대한 하나의 ‘누빔점’에 불과하다. 심급은 장자가 말한 어떤 시비나 논쟁을 뛰어넘는 지점이기도 하다. 따라서 아마도 의미의 누빔점으로 작용하면서 동시에 누락된 비의미들을 비추는 시적 언어가 이러한 심급에 대한 은유라는 것은 맞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시는 어떤 심급에 대한 증거인가.

모든 열쇠의 방향은 오른쪽
열리지 않으면 반대쪽

우리가 인생을 조금 더 받아먹어야 한다면
차라리 불가능한 것을 믿자
우리는 절망에 사과한 것 없다

내가 나로 망하는 것
모두로 인해서가 아닌 오로지 나 하나로 침몰하는 것
그리하여 죽은 것도 아니고 살아가는 것 아닌 중간인 것
왔던 길 말고 돌아왔던 길 그 속에 인생인 것

그리하여 불가능한 것들을 읽고 쓴다
두 개의 다른 열쇠로 하나의 문이 열릴 것이지만
그 문 하나로
무엇을 무엇에게 넘겨줄 것이며
누가 누구에게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모든 열쇠는 주사위들 위에 앉아 있다
모든 예약은 불가능하다
맞추어야 할 뼈가 맞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모든 세계는 열리는 쪽
모든 열쇠의 할 일은 입을 막는 쪽

―이병률 〈불가능한 것들〉 전문 (《유심》 2011. 5)

의미와 비의미를 구분하는 기준점은 언어이다. 언어화할 수 있을 때 하나의 의미가 구성된다. 문자와 말로 표현되는 순간, 그것은 소통할 수 있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의미화할 수 없는 부분 역시 의미의 바탕이다. 비의미란 의미의 반대가 아니라 의미가 어둠 속에 남아 있는 것을 의미한다. 즉, ‘어둠’으로 남겨진 의미들은 의미의 부재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의미화되기 이전 상태, 내적 강도로서만 존재하는 전조(前兆)이다. 이것은 의미와 비의미를 대칭시킬 수 없음을 뜻한다. 이는 ‘의미 없음’이 단순히 비의미가 아니라 아직 의미가 아닌 상태, 그러나 실재하는 의미로서 (비)의미를 의미하는 것이다. 시적 문자를 보증하는 것 역시 바로 이것이다. 시적 문자의 심급은 바로 이와 같은 것, 의미가 불가능해지는 지점 즉 의미의 빈 곳에서부터 출발한다. 시인들이 보여주는 불가능한 것들에 관한 감각과 사유는 바로 이러한 맥락들로부터 기인한다. 이에 나는 이병률 시인이 보여주는 ‘불가능한 것’에 대한 사유를 이러한 시각에서 읽어내고자 한다.

 

시인은 문자(시)가 의미의 “열쇠”인가 묻는다. 오른쪽 아니면 반대쪽으로 돌리기만 하면 의미가 열리고 닫히는 투명함이 가능한가 묻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이와 같은 물음도 들어 있다. 하나의 문자가 이성과 감성, 참과 거짓,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등과 같이 대칭적으로 구성될 때, 시라는 은유는 존재할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은 어떤 결론을 향한 것은 아니다. 다만 시인은 의미가 의미의 불가능한 지점에서 생산될 수 있다는 것을 사유하고자 할 뿐이다. 이는 의미와 비의미의 “중간”을 가리킨다(그러나 중간은 결코 수량적 의미가 아니다.). 그리하여 시인은 불가능한 것들을 읽고 쓴다. 따라서 의미를 소통시킨다는 것은 이 불가능한 것들의 실재를 이야기하는 것보다 선행할 수 없다. 시라는 문자가 만일 열쇠일 수 있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이 열려고 하는 의미의 방향 너머로 가라앉은 비의미의 심급을 시의 (보)증서로서 소환하는 동안이다. 그러므로 “모든 열쇠의 할 일은 입을 막는 쪽”이 아니겠는지. 시인이 이제부터 생각하고자 하는 소통의 의미는 이 불가능한 것에 대한 감각과 사유에서 출발할 것이다. 시가 의미보다 더한 의미의 전조일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시가 이처럼 불가능한 것들의 심급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면, 소통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시를 통해 울림을 얻고 상호주체적 감각들에 도달하는 것은 환각일 뿐이지 않은가.

문자의 심급과 편향성

그러나 나는, 이토록 성급하기만 한 물음들을 뒤로 한 채, 다만 심급이 아닌 심금(心琴)을 이야기하려 한다. 말장난처럼 들릴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하고, 지금 내가 심금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심급이 지닌 모호하고 (비)의미에 가까운 어둠을 실제의 삶과 일시적으로나마 누벼 주는 지점이다. 즉, 라캉의 실재이자 장자가 말한 지혜와 지혜 아닌 것 모두를 뛰어넘는 심급에서 시작되는 문자의 은유에도 소통은 ‘있다’.

여기서 문자의 두 번째 중요한 특징이 드러난다. 문자는 보이지 않는 (비)의미를 심급으로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누군가에게 ‘전달된다’. 그리고 문자의 진정한 역설이 발생한다. 즉, 문자의 의미를 지탱하는 것은 누락된 (비)의미에 있음이 밝혀진다. 소통이란 불가능한 것들이 전달될 때, 비로소 마음을 움직인다. 문자 그대로의 표면적 의미만으로는 소통의 본질에 다가서지 못한다. 불가능성의 영역은 내가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고 상호주관적으로 얽힐 가능성의 조건이다. 그것이 문자만으로 시가 (타인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이유일 것이다. (불가능한 의미의) 심급이 (의미의) 소통을 보증한다. 그러므로 소통은 관념과 구체, 투명함과 투명함의 문제가 결코 될 수 없다.

이에 나는 소통의 의미를 동일성이 아닌 ‘편향성’에서 찾으려 한다. 그리고 그 논의의 출발점을 “도시”에 대한 시인의 상상으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도시는 소통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모두 드러내며, 대부분의 현대 시인들이 도시에 대한 애증을 멈출 수 없었다는 점을 상기하는 것도 좋으리라.

우연히 날아온 화살에 등을 맞았다
뒤를 돌아보니 신비한 빛이 발밑으로 들이쳤다
등이 아프지는 않았다
나는 화살을 등에 꽂고 거리를 지나다녔다
겨울엔 찬미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천천히 바람을 가르며
거리 위를 새겨 나간다

길의 감촉도 모른 채 떠남을 탐했다
길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문명의 숲에서 충혈된 눈으로
비만한 이미지를 본다
모두 집안에 묘지를 두어 엎드려 절한다

어둠에 잠긴 강은 늘 소리를 낸다
소리의 환각을 타고
긴 여행을 떠난다
살갗을 타고 흐르는
차갑고 낯선 공기
모두 마법에 걸려 있다
복잡한 사람이고 싶지 않다
내가 생각하는 최선은
단 한 가지만 생각하는 삶

―이재훈 〈방랑의 도시〉전문 (《시로 여는 세상》 2011 여름)

근대 이후 시인에게 도시는 영감과 이러한 영감을 구속하는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공간이 되었다. 도시에서의 생활은 시인의 삶을 추동하는 동시에 가혹할 정도로 건조시킨다. 모든 혁명을 대체한 기술의 자가발전 능력에 수치를 느끼면서도 여전히 열정적으로 도시 안에 머문다. 시인은 날마다 이해할 수 없는 군중의 얼굴을 낯설게 마주하는가 하면 그 속에서 같은 감정, 이를테면 고독과 같은 것을 발견하고 안도한다. 우리는 모두 “화살을 등에 꽂고 거리를 지나다니지"만 알지 못한다. 피 흘리고 있다는 것을 감각할 수 없다. 바로 그 점에서 도시인은 절대적으로 동일한 삶을 산다. 따라서 도시는 현대의 시인에게는 꿈의 통로이자 감옥이다. 시인은 도시 어디엔가 살면서 정착하지 못하는 존재들로 남겨진다. 이재훈 시인이 정확히 읽어내고, 또 우리가 공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도시는 딱딱한 건조물로 이루어진 미로이며, 시인은 이 미로 속을 끝없이 헤매 다니는 동안, 의미화할 수 없었던 수많은 (비)의미들로써 시를 쓴다. (이에 대하여 시인은 “여행”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재훈 시인은 에두르지 않는다. 그의 사유는 정직하다. “비만한 이미지”를 뚫고 단 하나의 의미(“소리의 환각”)를 듣고자 한다. 그의 관념에 대한 편애는 바로 여기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나 또한 시인이 말하는 “단 한 가지만 생각하는 삶”을 그렇게 편향되게 상상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소통은 편향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닐까. 이때 편향이란 나르시시즘적 동일화가 아닌 것, 전체화할 수 없는 기우뚱한 기울임으로 이해되어야 마땅하다. 심급에 존재하는 의미의 불가능성이 소통의 장으로 올라올 때 그것이 지니는 진정한 의미는 세계가 만들어내는 수많은 자기동일성의 무대를 깨트리고 편향과 편애로 흘러가도록 놔두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전체주의적 기획과도 연결되지 않는다. 소통은 그야말로 파열점에서 만들어진다. 심금은 하나의 주제, 하나의 이야기로 번역될 수 없다. 심급의 불가능성이 소통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만 이해되어야 한다.

바지락은 바지락바지락 씻어놓았겠다
성난 놈으로만 골라낸 청양고추는 꼬리까지 빳빳하고
보름에 다 와 갈 때 캤다는 바지락 속살하고
이틀 나무젓가락 들고 이마 맞대고 후루룩 후루룩
맑으면서도 맵싸하고 칼칼하면서도 그윽한 국물에다

식으면 조금 서글퍼지는 밀가루 내음이 어우러질 것인데
그러할 참인데 이렇게 오뉴월 백주대낮에
혼자 중얼대며 혼자서 바지락 칼국수 끓여먹는
이 중년은 누구인가 이 중년인 것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휴대전화에 저장된 아내와 아들딸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이마에 송글송글한 땀방울 훔쳐대다가 콧물을 훌쩍거리다가
제국항로 비행운 사라진 하늘 한가운데를
올려다보는 회복기 기러기아빠의 한낮―
너무 환해서 캄캄한 한낮의 바깥에서 뻐꾸기 뻐꾸기 운다

―이문재 〈국수 생각>부분 (《유심》2011. 5)

엄마는 내 머리를 빗겼다 벌레를 잡을 때는 석유를 발랐다 나는 천정과 벽 틈으로 굴러 다녔다 새벽에 촛불을 켜는 수도승을 엄마는 집 안에서 지켜보았다 빛은 안에서 켜야 해 동굴 벽 가려워서 죽을 거 같아요 손바닥을 비비면 불꽃이 인단다 따뜻해질 거야 훨씬 가벼워질 거야 머리 가죽이 벗겨질 정도로 머리를 묶는 새벽 어린이는 왜 이렇게 일찍 바깥으로 나가는 건지 비가 오는 진창길 위에서 나는 항상 가슴에 붙인 손수건을 떨어뜨렸다 담장을 빙빙 돌았다 수도승은 노래를 하고 있었어 안개 속에서 옷 안에 손을 넣어 맨살을 벅벅 긁으면서 말야 머리카락이 빠져나왔다 너 언제 떠나왔니? 아이들은 잘 벗겨진 머리 가죽을 들고 열심히 달렸다 온몸에 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잃고 저녁 끝까지 교실 안에 남아 있던 시간 새벽은 그 순간부터 멈춰 있다 새벽 이후를 상상하는 것으로 나는 모든 계절을 보냈다 머리에서 잘 떼 낸 새카만 머리 가죽을 손에 들고

―이영주 〈조회시간〉(《미네르바》 2011 여름) 전문

두 편의 시는 ‘가족’을 소재로 하고 있으면서, 전혀 다른 소통의 차원을 드러낸다. 이들의 문자는 매우 편향되었다. 그것은 소통이 왜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가를 말해 준다.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굳이 한 편의 시가 중년 남성을, 다른 시가 어린 여자의 일생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 또 같은 이유로 한 편의 시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다른 시가 훈육의 고통을 이야기한다는 점을 밝힐 필요 또한 느끼지 않는다. 삶은 내적 강도로서만 존재한다. 무엇이 무엇보다 숭고할 수 없다. 하나가 하나를 억압하고 가치화의 투쟁에 성공하는 순간, 그것은 철저히 문자적이다. 시가 던지는 불가능한 것에 대한 감각과 사유는 이러한 외설적 문자들에 대한 저항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소통의 의미 역시 문자의 표층에서만 가능한 외설적 동의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오히려 두 시인의 편향성에 대하여 더 사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문재 시인의 시에는 소리들이 가득하다. 모든 사물이 소리를 낸다. 그것은 장자가 말했던 언어에 대한 관점과도 공유된다. 장자는 〈제물론〉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바람이 천만 가지 구멍에 불게 되면 소리가 각기 다르되 각기 스스로 멈추게 하고 모두 스스로 취하게 되나니, 갖가지 소리를 내게 하는 것은 누구이겠는가[夫天?者, 吹萬不同, 而使其自己也, 咸其自取, 怒者其誰邪!].”라고. 이는 장자가 천뢰(天?)를 통해 자연 자체를 일컫는 말이다. 그것은 인뢰가 대대(對待)함, 서로 마주하고 의존하는 것이 있는 것과는 다른 무위로서의 자취(自取)를 의미한다. 물론 이문재 시인이 사물의 소리를 낼 때, 그것은 바로 이러한 대대를 바탕으로 하며, 그것은 시를 통한 소통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바지락이 내는 “바지락바지락” 소리가 바로 그것이다. 이 소리를 들으며 국수가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화자의 마음에 자연스러운 연속성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러한 소리들의 연결은 역설적으로 국수를 먹는 사람의 소리를 대대함이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현대인이 지닌 고독함은 바로 자신의 소리를 대대함이 없다는 데서 찾을 수 있는 것이리라.

 

이영주 시인은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소통 없는 세계의 불모성을 폭로한다. 꿈을 유보하는 자본주의 세계의 아이들이 훈육되는 방식은 잔혹하기 그지없다. 그것은 아이들이 잘 벗겨진 머리 가죽을 들고 열심히 달리는 풍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경우 잔혹성은 그것이 물리적으로 폭력적이라는 데서 기인하지 않는다. 진짜 원인은 이 잔혹함이야말로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합리성이라는 데 있다.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면에서 본다면 잔혹할수록 합리적인 것이 된다. ‘잔혹하다는 것은 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하는 원리가 작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꿈꾸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진정한 미래가 아니라 “새벽 이후”의 시간에 대한 상상일 뿐이다. 존재의 심급으로 작용하는 미지에 대한 은유, 현재 너머의 시간에 대한 은유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 (자본주의적으로) 소통하기 위해서라면 이제 소통을 꿈꾸지 말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감각의 편향이 어떤 사유를 촉성하는가 하는 것이리라. 즉, 편향성은 전체주의화되어 가는 세계의 기호들로부터 탈구하여 새로운 의미의 장소를 만든다. 더구나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세계는 그 자신 이외의 어떤 것도 편애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의 본질인 전체주의 역시 구성원의 평등을 기반으로 구성된다는 것 역시 잊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시인들의 이러한 기울임이 없다면, 시인은 의미의 심급으로부터 어떤 보증도 받을 수 없다. 이것이 ‘심금’ 혹은 공감을 결코 감정적 동일시로만 이해할 수 없는 이유이다. 주관적 영역에서 출발한 시가 타자의 마음을 통과할 때까지, 시인들은 문자에 대한 편애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마음의 문자, 문자의 마음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생각들을 극대화하면, 시인은 문자를 통해 문자를 버리게 되지 않을까. 일상적인 언설들과 무관한 자리로 이동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문자를 떠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모든 것에 대한 일체의 설명과 설득을 배제한 언어만이 진실로 소통 가능한 자리를 여는 것은 아닐까. 한데, 이러한 물음은 다른 물음, 즉 시에 대한 오래된 물음들과 만난다. 가령 문자는 마음이 될 수 있는가, 마음은 어떻게 본질적으로 문자인가 하는 답이 없는 선적 물음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문자의 이상적인 상태이자 환상이 아닐는지. 그러면서도 또 묻게 된다. 환상을 배제한 어떤 문자도 불가능하다는 것. 환상은 문자의 심급이 가진 수많은 이름 중 하나가 아니던가.

이는 내가 함민복 시인의 다음 시를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구름의 주차장에서
구름을 기다렸네
구름은 오다
구름을 버리고 흩어졌네
눈알을 달래
마음을 풀었네
눈알과 마음을 믿은 죄로
세월은 가고 나는 늙어
구름이 되어가고 있네
나는
나를 타고 움직이고 있었네

―함민복 〈구름의 주차장〉전문 (《시인수첩》 2011 창간호)

“구름”이라는 문자의 심급은 마음이다. 마음만이 이 문자의 증서로 작동한다. 그러나 마음은 결코 알 수 없다는 점에서만 심급이 될 수 있다. 때로는 무한으로, 때로는 편협함으로 구현되는 마음을 통해 “구름”이라는 문자가 진정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문자와 마음이 결합하는 행복한 순간들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죽음과 삶, 소멸과 생성, 아름다움과 절망 등 모든 감정이 들어 있어야 할 것이다. 함민복이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 모든 감정이 문자의 진정한 증서이자 깊이로 작용하는 풍경이다.

 

이미지라고 해서 다 같은 이미지가 아니듯, 함민복의 구름은 구름이라는 문자와 그 너머 모두를 하나로 포획함으로써 부피와 질량을 지닌 하나의 물질이면서 동시에 무한한 관념을 끌어안는다. 구름을 기다리는 것은 그 안에 근본적으로 그 자신으로 도래할 수 없는 불가능성이 존재한다. “구름은 오다/ 구름을 버리고 흩어”져 버린다. 이에 시인은 보고자 하는 욕망으로 달궈진 “눈알을 달래/ 마음을 풀었”다고 말한다. 그 역시 있음이면서 없음인 “구름”과 같다는 깨달음에 도달한다. 있음이란 없음을 타고 있으며, 없음이란 있음을 타고 있는 것이다. “구름”이 장자가 열어 준 자연 그대로의 ‘물화(物化)’와 닮아 보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사실, 시를 읽고 쓴다는 것은 문자의 심급에 도달하는 것을 방해한다. 수다는 이해할 수 없는 자연 그대로의 문자 상태, 언어 이전이면서 언어 자체인 상태에 대한 어떤 이해도 제공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장자는 천뢰를 이야기하며, 자이(自已)를 말했다. 그것은 실제로 인간의 문자체계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라캉이 실재로서 ‘그 무엇’을 예견했던 것도 이 이해로부터 물러난 그러나 실재하는 것에 대한 설명이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명확하게 표현한다고 해도 결국 불가능한 의미의 심급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시를 해석하는 동안 내가 감수해야 했던 것은 바로 이 심급을 지울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던 듯하다. 문자의 주인이 실체화되는 순간, 나는 피(彼)와 아(我), 안과 밖을 나누고 명료성에 도달하고자 하는 지적 함정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문자를 풀어내는 동안 구성되는 의미화는 한편으로는 수많은 문자의 어둠과 전조를 전지(剪枝)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여전히 문자의 싹이 어떤 것인지 보고 있지 못함이라.

 

장자의 말이 떠오른다. ‘싹’이 돋게 하려거든, 다만 “그만두어라. 그만두어라[已乎, 已乎].”

 

신진숙 | 문학평론가. 2005년 《유심》으로 등단. 저서로 《윤리적인 유혹, 아름다움의 윤리》가 있음. 현재 경희대 학술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