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과 칼럼

박양근의 수필문학을 위한 에스프리

미송 2012. 6. 18. 07:05

 

박양근의 수필문학을 위한 에스프리

-수필집 《문자도文字圖》를 중심으로

 

 

 

1. 프롤로그-기호학의 패러디

 

 

대중문화 시대가 도래到來하고 대중문학이 부상하게 되자, 고급문화 고사枯死론이 심심찮게 대두되고 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 아래에서는 진지하고 심도 있는 성찰을 추구하는 고급문학이 살아남기 힘들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은 이런 우려를 일시에 불식시켰다. 문학의 위기에 대한 책임이 어쩌면 새로운 양식과 기법, 상상력의 계발과 탐색을 소홀히 한 작가들에게 있었다는 반증과도 같았다. 새 기법과 상상력으로 문학의 새 지평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에코의 소설을 명작의 반열에 오르게 한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우선 재미였다. 그러면서도, 추리소설과 역사소설의 양식을 빌린 이 소설은 고급문학의 특징인 삶에 대한 진지하고도 심오한 성찰과 수준 높은 문학적, 철학적 사유가 도처에 깃들어 있다.

 

그에게서 주목할 것은 기호학에 대한 패러디이다. 기호학은 원래 삼라만상이 모두 의미와 메시지를 갖고 있는 기호로 보며, 이를 해석해 숨은 의미를 찾아내려는 학문이다. 에코는 《장미와 이름》에서 모든 기호들이 다 수학적으로 풀어지거나 고정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기호와 그것이 지시하려는 것 사이에는 단절이 있다는 포스트모던적 인식을 보여주었다. 즉 에코는 이 소설에서 “이 세상에 그 의미가 고정된 기호란 없으며, 기호는 얼마든지 잘못 읽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코난 도일의 탐정소설에 대한 패러디와 같은 형태로, 그가 창조한 셜록 홈즈 역시 기호 읽기를 통해 모든 사건들을 해결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탐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장미의 이름》은 우연히 살인사건에 잘못된 의미와 패턴을 부여해 사건을 해결하려다 오히려 자신이 살해당하는 보르헤스의 추리소설 《죽음과 컴퍼스》와 맥이 닿아 있다.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집시소녀를 상징하는 ‘장미’는 ‘비밀’과 ‘신비’를 의미하지만, 끝내 밝혀지지 않은 ‘장미의 이름’은 아마도 메마른 우리들 삶에 생기를 불어주는 유연하고도 아름다운 타자他者의 모습은 아닐까 싶다. 죽어가던 문학을 살린 힘은 바로 여기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비약하건데, 우리 수필문단에는 이런 실험적 수필쓰기에 앞장서고 있는 일군一群의 작가들이 있다. 이른바 새로운 수필쓰기에 착목하고 있는 작가들이다. 박양근은 그 중에 한 작가일 것이다. 그는 영문학자로 비교적 늦은 시기에 문단에 데뷔하였다. 수필로 『월간에세이』에 등단한 것이 1993년이요, 그 후 『문학예술』로 2002년에 문학평론가로 데뷔하였으니, 문력으로 보면 일천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에 그의 필력은 누구도 좇을 수 없을 정도로 왕성하여 수필창작과 수필평론에 있어 발군의 업적을 낳고 있다.

 

그가 세 번째로 상재한 수필집 《문자도》의 생경한 작품들을 일별하면서 필자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 마디로 그의 수필은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이런 경향성은 전통적 수필에 익숙해진 독자들에게는 때로 기상천외한 낯섦에서 오는 의식의 혼란과 주제 파악의 난해함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기호학과 현상학을 차용한 낯선 풍경과 존재 파악의 깊이에서 오는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에코의 소설이 명작의 반열에 올랐듯, 박양근의 수필은 인간에 대한 심오한 성찰과 수준 높은 문학적, 철학적 사유를 음미하는 즐거움을 줄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박양근의 수필세계는 한 마디로 낯설다. 문학적 언술에서는 통상적 기의 Signifikat 대신에 확장되고 변형된 다른 기의가 결합되어 언어 기호들의 의미 구조를 낯설게 한다고 언명한 위르겐 링크 Jurgen Link의 기호학의 한 현상을 그는 신봉하고 있는 듯하다. 전체적으로 하나의 새롭고 복합적인 기호의 탄생으로 문학적 언술은 문학적 낯설게 하기를 중심으로 구성요소를 갖고 있는 모든 텍스트를 지칭한다고 볼 때, 박양근의 수필은 이런 기호학의 패러디에 충실하고 있다 하겠다.

 

이런 경향은 문학이 “무의미한 것들의 유의미화”의 과정이요, 고정관념의 탈피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 세계에 조금만 발을 들여놓아도 그 낯섦이 주는 언어 기의에 독자들은 당황하지만, 담론 자체가 주는 객관적 선험으로서의 언표장言表場을 통해 미셀 푸코가 규명한 언표의 개념을 우리는 그의 수필의 도처에서 읽을 수 있다. 그렇기에 박양근의 수필읽기는 어쩌면 대단한 인내를 필요로 한다. 그의 수필이 다분히 기호학의 패러디와 현상학을 미학에 적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모든 수필이 이런 경향성에 경도되어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박양근의 수필을 읽기 위한 이런 스키마 skima를 포석으로 하여 이제 구체적인 그의 작품의 내면 풍경을 음미하기 위한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2. 문학을 위한 4성 대위법

 

바흐가 살고 있던 바로크 시대의 음악은 다성 음악시대였다. 하나의 멜로디가 진행되고 그 밑에 반주가 받쳐주는 게 아니라. 동시에 여러 개의 멜로디가 진행되는 형태였다. 이 경우 여러 개의 멜로디를 동시에 무리 없이 진행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대위법이라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했다. 바흐의 대위법은 각각의 멜로디 하나하나가 독립적인 의의를 가지면서도 동시에 전체적인 화성효과를 낸다. 문학 작품의 경우에도 이런 다성적 구조가 숨어 있다고 하면 어떠할까?

 

현상학을 미학에 본격적으로 적용한 이는 에드몬트 후설 Edmund Husserl 의 제자인 로만 잉가르덴 Roman Ingarden 으로 ‘순수지향적 대상’에서 ‘실재적 대상’으로 존재론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를 보였다. 여기서 잉가르덴은 문학작품을 4개의 계층적 구조로 보고 있다고, 진중권은 그의 《미학오디세이》에서 밝히고 있다.

 

그 첫 단계를 문학작품의 표피에 해당하는 ‘언어적 음성 형상의 층’ 이요, 두 번째의 층은 전체 작품의 구조적 골격이 되는 ‘의미 단위의 층’으로 보아 비로소 무의미한 음향들이 의미를 지닌 문장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세 번째의 층은 ‘묘사된 대상성의 층’으로 작품 속에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여 얽히고설킨 사건을 만들어낸다고 보았다. 끝으로 네 번째의 층은 ‘도식화된 시점의 층’으로 인물과 사건이 시공간적 배경 속에서 감각적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이런 단계를 거쳐 묘사된 대상은 통일된 질서를 이루며 우리 눈에 들어오게 된다고 보았다. 문학작품이란 이렇게 유한한 수의 규정된 장소와 무한히 많은 빈곳을 가진 도식적인 형상에 불과하여 드가 Degas의 그림의 경우, 무용수의 앞면만 보이고 뒷면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채워지지 않은 성질’로, 순수 지향적 대상의 빈곳을 채워 넣어야 하는 바, 이런 작업을 ‘구체화’라 하였다.

 

박양근의 <문자도>는 “눈이 내린 산야나 사막에서 바라보는 밤하늘은 상상만으로도 눈물이 난다.”라는 말로 서두를 풀어내고 있다. 이런 문학적 언술을 뒷받침하기 위해 화자는 세 개의 의미의 축을 세워 의미 단위의 층을 쌓는다. 세 개의 에피소드를 연결한 담론의 그물망은 시간적 질서로 보아 [7년 전→작년→한해를 걸린 봄]으로, ‘생리작용’이라는 동기를 미끼로 하여 황야를 달리다 멈춰 하늘을 본다. 화자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별자리다. 순간 보통사람의 감수성과 분별력마저 잃고 넋 놓고 바라보는 별자리. 공간배경은 미국의 그랜드 캐니언에서 호주로 옮겨간다. 시간적 배경은 겨울에서 여름으로의 이동이다. “소변이 마렵지 않았지만 살구를 깨물었을 때처럼 다시 눈이 이어졌다.”고 했다. 북반구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랜드 캐니언과 호주의 사막에서 본 별자리의 동일성에 대한 자각이다. 그리고 세 번째 에피소드는 도인촌으로 연접된다. 음성형상의 층과 의미단위의 층을 연결하면 다음과 같다.

 

• 첫 번째의 층 →(공간)그랜드 캐니언의 겨울 황야 →[별자리]→하늘의 그물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무지에 대한 절망

• 두 번째의 층 →(공간)호주 중심부 사막 →[밤하늘] →죽음 같은 절망

• 세 번째의 층 →(공간)지리산 도인촌 →[만다라] →묵언의 언어, 사유의 침묵

 

이 담론에서 묘사의 핵심인 대상성의 층에 ‘만다라’가 놓여 있다. “흐린 날에는 어두컴컴해진 실내를 기괴하게 붉히는 불꽃이 되는가 하면 청명한 날에는 현란한 추상무늬로 내 머리를 어지럽히기도 했다.”는 만다라에 대한 심상은 언어구조를 낯설게 하면서, 언어 기호의 의미를 읽게 한다.

 

 

누구에게든 그의 삶을 이끄는 나침판이나 지렛대가 있게 마련이다. 그 힘을 빌어 느낌과 앎과 배움을 조화롭게 아우르면 너와 나의 경계선이 사라지고 무인칭의 실존만 남게 된다. 이처럼 내 삶에서 만다라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문자도였다. 지금 돌아보아도 크레타 섬의 미궁에 갇힌 신세 같지만 그것이 내 삶을 그나마 끌어가는 끈이어서 고맙기만 하다.

-<문자도>에서

 

그렇다. 보르헤스 Jorge Luis Borges 는 이 세상을 하나의 거대한 미로迷路로 보았고, 현실 역시 언어로 이루어진 미로로 보았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소설을 쓰는 것은 언어로 미로를 짓고, 동시에 세상 또는 현실이라는 그 미로에서 출구를 찾아 빠져나가는 것을 의미했다.

보르헤스의 단편 <바벨의 도서관>을 보자. 보르헤스는 우주와 인간의 역사를 상징적인 도서관으로 보았다. 이 점에서 박양근이 우주를 문자도로 본 것과 어쩌면 닮아 있다. 서구의 도서관은 층 마다 육각형의 방으로 되어 있고, 책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은 결국 한바퀴를 돌아 원점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진리를 찾는 혼란의 미로인 도서관에는 인류 역사의 모든 기록이 서가書架에 진열되어 있다.

 

마치 <문자도>에서 작가가 찾고자하는 삶의 진리가 만다라처럼 펼쳐져 있듯, “단언하지만 도서관은 끝이 없다”라고 보르헤스는 말하고 있다. 또한 “광대한 도서관에 동일한 책이란 없고, 동시에 모든 책들은 또 동일한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그렇기에 보르헤스가 보는 우주의 축소판으로 보는 도서관은 박양근에게 있어서는 ‘문자도’요, 이런 ‘문자도’에는 세상과 우주에 관한 모든 정보가 도서관처럼 들어 있다. 보르헤스에게 책이 현실이자 환상이요, 우주라면, 그에게서는 ‘문자도’가 바로 우주며 현실이 된다.

 

요즘 나는 별 자리에서 일깨운 문양을 다른 곳에서 찾곤 한다. 유전자 지도며, 동식물의 세포 그림을 들여다보거나, 문양을 가진 돌도 나름의 생명지도를 가지고 있을 거라 꿈꾸기도 한다. 세상은 문자와 기호로 엮어진 지도이고 우주는 만다라라는 생각도 해본다. 작가는 문자도에 얹혀 기어가는 달팽이 순례자가 아닐까 싶다.

-<문자도>에서

 

이렇게 보면, 그의 창작 의도는 분명해진다. [세상은 지도요, 우주는 만다라]라는 작가 박양근의 탁월한 발상의 근거를 확인하게 된다. 현실과 환상을 해체하려던 보르헤스의 포스트모던적인 발상이 박양근에 이르러, 구체화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는 모더니즘의 종언終焉을 선언하고 새 시대에 맞는 참신한 문학 양식을 모색한 존 바스 J. Barth의 <고갈의 문학>을 떠올리게 한다.

이제, "세상은 문자와 기호로 엮어진 지도이고 우주는 만다라라는 생각도 해 본다."는 수필 <문자도>의 의미화를 통한 주제의식은 분명해진다. 잉가르덴이 문학을 위한 4성 대위법으로 본, 네 번째 단계의 층인 ‘도식화된 시점의 층’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준다. 우리에게 삶의 나침판이나 지렛대가 필요하듯, 작가 박양근에게서는 ‘문자도’를 떠올리게 한다.

 

3. 음운론적 실험성

 

소설 속의 대상은 실재적 대상과 구별된다. 실재적 대상은 무한한 속성을 갖고, 속성은 하나같이 규정되어 있다. 하지만, 소설 속의 대상은 규정되어 있지 않다. 때문에 앞서 현상학을 말한 잉가르덴의 언명과 같이 현상학을 미학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구체화의 단계에 들어서야 한다. 즉 언어적 음성형상과 의미 단위, 묘사된 대상성, 도식화된 시점에서 비어 있는 부분을 채워주는 미적 대상의 구체화 단계를 밟아야 한다. 구체화를 통해서만이 빈 곳은 채워지고 균열 상태의 시점들이 하나의 연속된 시점으로 연결된다. 이때 독자는 그 도식의 빈자리에 자신의 삶의 경험을 채워 넣음으로써 비로소 미적 대상으로 탄생하게 된다. 이제 박양근이 수필문학에서 기호학과 현상학을 통해 전개하고 있는 수필쓰기 양상의 구체화를 짚어보고자 한다.

 

수필작가 박양근은 모험적인 작가이다. 수필문학에서의 낯설게 하기가 그러하듯 수필의 다양화에 그의 시선은 착목하고 있다. 언어 기의의 낯섦이나 수필형식의 새로운 모형의 전개는 기존의 작가들의 입장에서는 생경한 거부감을 일으킬 수도 있는 장면이다. 수필 <여항>에서 보듯 기・승・전・결의 형태나, <나링거여, 나링거여>와 같은 [프롤로그→시공깔기→마당 글 펼치기→에필로그}의 형태적 특징은 앞서의 <여항>과 맥을 같이하면서 수필문학과 논리적인 글의 이종결합의 모형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수필 <봄날에 켜는 가을소나타>나 <춘・매・>는 기호학의 패러디를 떠올리게 한다.

 

어제는 경이로운 대상을 만났다. 매일 나서는 산책길인데도 지금까지 눈에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아.

주.

까.

리.

순간 고향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일곱 잎사귀를 벋치며 적막한 여름 한낮을 견디며 멀뚱멀뚱 서 있는 아주까리다. 겸연쩍을 정도의 큰 씨앗주머니를 달고서도 보란 듯이 뻗대며 뒷산 밭을 지키던 키다리 식물이다. 지금쯤은 인적 없을 묵정밭에서 홀로 자랐다가 삭풍에 사라질 들풀로나 남아 있을까. 그 일년생 생명이 여기선 다년생으로 자라는 중이다.

기.죽.지.않.고.

-<봄날에 켜는 가을소나타>에서

 

 

사유를 전개할 때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실마리의 문제이다. 실마리를 무엇으로 잡느냐에 따라 사유의 전개는 달라진다. <봄날에 켜는 가을소나타>는 화자가 호주에서 역주행하는 계절을 지켜보는 사유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한국이 봄이라면 호주는 가을이다. 원주민인 아보리지언의 거주지. 화자는 토렌즈 강의 사계절에 매료되어 새벽 산책을 하고 있다. 쇠오리에게 두었던 시선이 강변의 갈대꽃을 보면서 문득 고향의 갈대숲을 떠올린다. 경이로운 대상과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일곱 잎사귀를 뻗치며 적막한 여름 한낮을 견디며 멀뚱멀뚱 서 있는 아주까리다. 겸연쩍을 정도의 큰 씨앗주머니를 달고서도 보란 듯이 뻗대며 뒷산 밭을 지키던 키다리 식물.” 그런 아주까리가 화자에게는 반갑기 그지없다. 일년생 생명이 그곳에선 다년생이어서 더욱 그러한가. 씨가 떨어진 땅에서도 어린 아주까리가 오종종하게 자라고 있다. 기 죽지 않고. 이 작은 만남이 화자에게는 참으로 소중하게 다가온다. 가을 소나타를 듣는가.

 

작가는 아주까리와의 만남의 의미를 기표보다는 언어적 기의에 두려고 했던가. 아주까리를 사물의 이름이나 기호로 보기보다는 음절 하나하나의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아.주.까.리]라는 네 개의 행갈이를 통해 문장 쓰기를 실험하고 있다. 이런 시각적 효과는 아주까리가 자라고 있는 모습에 대해서도 [기.죽.지.않.고.]라고 표현함으로써 언어기호를 패러디하면서, 언어가 갖는 현상학적 측면의 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수필 문장 쓰기의 실험이 과연 당위적이냐, 아니냐의 판단은 일단 유보하고 변화에 익숙해지면서 새 패러다임을 추구하고자하는 작가의 노력을 엿보게 한다. 이런 음운론적 구조의 낯설기 하기는 다다이즘적 텍스트에서 찾아볼 수 있는 언어의 기표와 기의에서 이루어지는 실험으로 보아 일단은 주목해볼 만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다시 수필 <춘・매・>를 보자.

 

요즈음에야 풀과 화초들의 이야기가 조금씩 들립니다. 직립의 나무를 바라보면 감탄하다 못해 의아하기조차 합니다. 그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모양이 시원찮고, 가지가 빈약하고, 뿌리가 부실할지라도 나무다라고 말하기 바랍니다. 의젓하고 당당하고 숙연한 준목俊木이라면 감지덕지할 따름입니다. 이것을 찾을 분들이 쪼그라진 나를 보면 반면교사反面敎師와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을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하얀 꽃나무가 눈에 들어옵니다. 한겨울 숲을 어제까지 지나쳐도 들어오지 않았던 모양새입니다.

매・화・

춘・매・

흐르르, 꽃잎을 떨어뜨리면서 다른 꽃을 피워내는 춘・신・

반월형 연지蓮池에서 춘신을 알려주는 가상한 자태가 대견하다 못해 가슴마저 저립니다.

-<춘・매・>에서

 

공간배경은 앞의 수필 <봄날에 켜는 가을소나타>와 매한가지로 호주濠洲다. 토렌즈 강을 낀 보타닉 가든 장미화원이다. 화자는 그 곳에서 [춘・신・]을 알려주는 매화와 만난다. “한국은 한겨울이고 여기는 한여름이었습니다. 그러니 매년 만나던 봄을 잃어야 했습니다. 그게 남회귀선 아래로 내려온 업보라며 마음을 달랬는데 7월의 마지막 날에 매화가 봄을 되찾아 준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매화가 반갑지 않으랴. 그 매화에 대한 감정의 진폭인가. [매・화・]의 방점은 독자의 주의를 끌기 위한 시각적 효과도 있겠지만, 언어의 낯설게 하기일 것이다. 수필 <영혼의 의자>에 말미 “등. 이. 따. 뜻. 해. 진. 다.]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푸코는 언표의 개념을 새롭게 규명함으로써 사유의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한 일이 있다. 즉 타자기에 배열되어 있는 문자판은 언표가 아니지만, 누군가가 그 문자판을 두들겨 A, Z, E, R, T를 치면 그 AZERT는 하나의 언표가 된다고 하였다. 물론 여기서 AZET는 아무 의미가 없는 말이지만 단순한 존재의 차원에서 문자들이 의미의 문턱을 넘어선다고 하였다. 이렇게 푸코는 철학을 지금까지 잊고 지내던 영역으로 끌어내리고 있다. 박양근이 시도하고 있는 담론 역시 언표적 장이라는 역동적인 가능성이 펼쳐지는 열린 장으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4. 수필문학을 위한 에스프리

 

 

박양근은 수필과 평론을 통해 실험과 개척 정신에 뚜렷한 지평을 보이고 있다. 이는 한국수필문학의 미래를 위해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사는 몇몇 선구자에 의해 새롭게 씌어진다고 할 때, 그의 문학적 행보는 주목 받을 만하다. 모든 이가 잠자리에 든 시각에도 깨어 아침을 준비하는 한 사람의 선지자에 의해, 여명黎明의 햇살은 이윽고 온 누리를 밝힐 일이어서다.

 

지금까지 필자는 그의 수필이 지니고 있는 기호학의 패러디와 문학을 위한 4성 대위법, 음운론적 실험성을 살펴보았다. 이제 이를 통괄하는 그의 문학을 위한 수필쓰기의 구체화, 이른바 수필문학을 위한 그의 에스프리를 작품을 통해 살펴봄으로써 박양근 수필의 진수를 밝혀보고자 한다.

 

①나는 글쓰기를 길을 나서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굳이 먼 길이 아니더라도 좋을 듯싶다. 바라기의 대상은 원근을 가리지 않으니까. 무엇을 찾느냐보다 가까이 있는 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더 중요하기에 일상생활이 단조롭더라도 눈을 뜨고 찬찬히 살펴보면 경이로운 것이 한둘이 아니므로 그래서 길을 나서는 것이다.

-<글의 길>에서

②글은 삶을 이어주는 신비스런 통로입니다. 문인의 소명은 그런 것이니 겸손하지 않고서 어찌 문학정원으로 들어가는 문을 찾을 수 있습니까. 신을 맞이하기 위해 신의 나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 이치라면 내가 이 글을 품어 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글에 안겨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명예라는 유산보다는 수난이라는 훈장을 더 자랑스럽게 여기는 무관無冠이 될 수 있습니다. 글을 맞이하는 참 자세이며 참 이치라고 하겠습니다.

-<그 곳에, 문도文徒의 땅이 있다>에서

③글은 내게는 배신의 아픔만을 남기고 다른 남자의 품으로 떠나는 못 말릴 정부다. 가시고기의 새끼처럼 미완의 글을 천덕꾸러기처럼 남겨두고 휙 떠난다. 그래도 그것을 축복이라고 여긴다. 그것이 없으면 삶을 어찌 버텨가며 낮 동안의 생활을 견뎌가겠는가.

-<두 집 살림>에서

 

박양근의 수필세계는 다양하다. 앞에서 보듯 기호학과 현상학에 경도된 언어의 구조적 낯설게 하기에 철저히 무장하고 있어 사변적, 지적이면서도 다분히 서정적이고 미적 감수성을 등에 업은 수필들이 창작되고 있다. 이를 변신에 능한 작가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고전적 문법에 충실하면서도 실험의식이 강하다고나 할까. 그의 글쓰기는 ①에서 보듯, 마치 길 떠나는 사람의 자세를 닮았다. 먼 길이 아니거나 단조롭다 해도 찬찬히 바라보면 경이로운 대상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그는 아주 편한 마음으로 길을 떠난다. 수필을 위한 탐사요, 산보散步이기도 하다. 이 때 그가 지녀야 할 자세가 있다. ②와 같이, “내가 글을 품어 안는 것이 아니라 글에 안겨야 한다.”는 이 평범한 자세가 곧 참 자세일 것이다. 또한 ③에서 보듯 수필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마치 정부를 두고 작은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과 같다고 했다. “그것이 없으면 삶을 어찌 버텨가며…”라는 작가 정신이 그의 수필쓰기의 버팀목이자 지렛대일 것이다.

 

이런 수필정신은 그의 수필 도처에서 구체화되고 있다. 수필 <규화목>이야말로 작가정신을 일깨우게 한다. 동해안 경보화석박물관을 그저 지나치지 않는다. 화산재에 매몰된 나무줄기의 틈 사이로 지하수에 녹은 광물의 침전물이 스며들면 유기물이 없어지고 나무의 지적과 나이테만 남아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공룡이 살았던 쥐라기 시대에 뒤이어 백악기에 번식했다는 1억 5천년이 넘은 수령의 규화목을 바라보며 미망의 깨우침을 얻는다.

 

고목에 박힌 목리木理가 석리石理가 되었다. 가마 속에서 구워진 청자무늬도 규화목의 문양에는 비할 바가 없는 듯하다. 며칠 동안 타오르는 가마불의 고통은 억 년의 지열에 비하면 순간의 화상일 따름이다. 죄다. 규화목은 죄다 태워서 하나를 얻었다. 그것은 화택火宅 속의 등신불이다. 그 이치를 넌지시 깨우쳐 주는 나무들이 내 발걸음을 붙잡는다. 불현듯 하나의 화두가 떠오른다.

나는 무엇을 태울까.

-<규화목>에서

 

<규화목>은 앞서의 예로 든 ①-③을 통괄하는 그의 수필쓰기를 발효시킨 농즙과도 같은 글이다. 작가 정신의 구체화이다. 쥐라기에서 백악기에 이르는 무수한 세월, 안으로 침묵한 장인의 세계, 곧 박양근의 수필 정신이 아닐까. 그것은 ‘소리 유품’이기도 하다.

조그만 그것이 손바닥에 안긴다. 찡한 온기가 깍지 낀 손가락 사이로 전해온다. 마음이 유달리 심란한 때에는 그 몸매를 아우르듯 쓰다듬어보기도 한다. 소리로 지켜온 세월을 셈하면 오십하고도 십여 년. 임자를 떠나보낸 유품이 이제는 침묵의 분신으로 내 곁에 남아 있다.

-<소리 유품>에서

 

선친의 유품에 대한 각별한 화자의 애정이 묻어 있다. 선친의 행적을 전해 줄 유품 하나 간직하고픈 탐심貪心에 점찍어 주었던 속내를 비췄다. 다행히 다른 형제 누구도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하여 유품으로 받은 선친의 소리심장. 연緣과 혼이 밴 영물이다. “산길이 만들어진다. 작은 암자가 세워지고, 붉은 장삼을 걸친 그 분이 소리 없이 앉는다. 손이 쥐인 목탁에서 우러난 귀 익은 소리가 내 몸을 감싸준다. 마음도 덩달아 가부좌를 튼다.”고 했다. 그만이 쌓은 수필문학의 성城일 것이다.

 

그의 수필을 위한 에스프리는 이어진다. “미열을 마다 않고 현관문을 나섰다. 바람에 날린 눈가루가 목덜미에 떨어졌다. 몸뚱이에 내려앉는 눈을 털어내는 사슴처럼 본능적으로 몸을 떨었다. 그랬다. 나는 사슴이었다. 눈 덮인 곳이면 어디론가 떠나가는 사슴이 되고 싶었다.”(<설록을 찾으러>에서) 수필에의 길을 찾아나서는 화자의 소망이 잔잔하게 그려져 있다. 수필문학을 위한 에스프리다. 

 

5. 프롤로그-반역의 시계

 

수필 작가인 동시에 수필평론가인 영문학자 박양근. 문단의 연조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세상 사람들은 대개 실속보다는 겉치레에 민감하다. 그래서 한국문단은 정체되어 있다. 연조를 따지고 선후배를 지나치게 들먹인다.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노라니 그도 중요할 수는 있다. 하지만 문학을 위해서라면, 그가 걸어가는 행적과 행보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노회한 작가들이, 글보다는 행동으로 주변을 오염시키거나, 설익은 잣대로 좌지우지한다면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새로운 시선, 변화에 민감하고 개척 정신을 지녀야 한다. 아마도 작가 박양근은 그런 선 위에 서 있지 않을까 싶다.

 

기호학과 현상학에 민감하면서 항시 새로운 수필 쓰기에 몰두하는 작가. 그의 수필문학을 향한 에스프리의 일면을 필자는 《문자도》에서 찾아보려고 하였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필자의 지식과 지혜, 논리의 부족 때문일 것이다. 그저 주마간산으로 산책에 나선 이 글의 보완을 뒷사람에게 맡겨두고 싶다.

 

끝으로 박양근의 반역反逆, “내가 시계를 거꾸로 찬 계기는 우연히 생겼다. 세상을 등지겠다는 거창한 명분이 아니었다.”(수필 <반역의 시계>에서)라는 언술을 다시금 떠올리고자 한다. 그의 반역이 한국수필문단에 활력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

 

(텍스트:박양근수필집, 《문자도》, 수필문학사 수필선집 281, 2007)

한상렬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