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과 칼럼

절망의 심연에서 솟아오르는 굿소리

미송 2012. 8. 3. 21:02

 

 

 

 

절망의 심연에서 솟아오르는 굿소리

 

김양헌

 

 

소음은 많아도 소리는 귀한 시대다. 봄나무에 물오르는 소리, 자갈밭에 달빛 내리는 소리, 벌개미취 꽃피는 소리, 버들피리 알 낳는 소리, 이제 이런 소리를 듣기는 거의 불가능해졌다. 자본이 지배하는 세계는 수많은 벽들을 만들어 소리를 왜곡하고 차단하였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심연에서 공명하여 우러나오는 소리는 이제 들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사는 도시에 소리가 사라진 것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가슴을 닫아걸며 "철컥거리는 소리가 마치 우레 소리" ('쇳대박물관'을 나와)처럼 크게 울린다. 너무나 많은 소리가 사방팔방에서 날아들어 귀가 멀 지경이다. 자동차 굉음과 컴퓨터 팬 소리, TV음향과 냉온풍기 소음은 잠시도 쉬지 않고 고막을 울린다.

 

이렇게 소음에 중독된 귀는 고요를 견디지 못한다. 마음의 심연을 울리는 고요의 깊고 거대한 소리를, 온몸으로 파고드는 불가해한 우주의 파장을, 이런 귀로는 결코 들을 수 없다. 듣지 못하니 인식할 수 없고, 인식하지 못하니 말할 수 없다. 말문이 닫혀 소통이 불가능한 사회는 짙은 어둠의 그림자로 뒤덮인다. 당신과 당신, 그대와 나 사이에 벽들이 가로막고 "문들이 쾅쾅 닫"혀 "아무도 그대의 가슴녘까지 갈 수 없" ('그 마당의 나무에서 들리다')다.

 

강은교 시인은 이런 절망부터 먼저 읽는다. 병든 귀들이, 세상의 무수한 '몸-귀'들이 앓는 소리를 시인의 귀는 듣는다. "이 무덤의 도시들, 그림자들"의 어둠, "어둠의 목도리처럼 감" ('나는 늘')고 몸부림쳐야 했던 화자 / 시인의 비애가 작품의 밑바닥을 적신다. 

 

절망의 비애, 허무와 고독은 강은교 시의 원동력. 퍼내도 퍼내도 남아 있는, 퍼내도 퍼내도 다시 고이는 어둠이 없었다면, 시라는 것이 시인에게 무슨 의미를 지녔겠는가. 시인은 절망을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어둠의 깊이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존재다. "절망은 희망의 속살" ('안녕 여기는 무지개 마을')이니, 속살의 냄새를 맡고 절망의 흐느낌을 들으며 아련한 희망의 좌표를 찾아 진실의 씨앗을 심는 존재가 진정한 시인일 터. 초기 시집들을 보면 알 수 있듯, 강은교 시인은 젊은 시절에 이미 절망의 심연에 들어서 있었다.

 

"內衣도 벗고 / 마지막 살마저, 뼈마저 벗고" ('바리데기의 旅行 노래, 五曲 캄캄한 밤), <허무집; 70년대동인회 1971) 칼산지옥, 불산지옥, 독사지옥, 한빙지옥, ...... 팔만 사천 지옥 지나, 약수(弱水) 삼천리 건너 서천서역으로 떠나는 바리데기의 숙명처럼, 삶과 죽음을 가로지르는 비장한 기운이 시편 곳곳에 서려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절망과 어둠도 시의 영토에 들어선 이상 죽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죽음을 예찬하는 시조차 삶을 그리워하는 역설의 의미망 안에 있다. 절망의 비통한 흐느낌은 살아 있음의 증거다. 퍼내도 퍼내도 남는 어둠의 신음소리 또한 삶의 증거. "산 것들은 서로 울음으로 화답하나니" ('얼른 그림자 위에' ; 시간은 주머니에 은빛 별 하나 넣고 다녔다, 문학사상사 2002), 뼈마디 마디를 파고드는 비애는 "캄캄한 무덤"에서 오히려 "끝내 / 사랑하올 것들" ('풍경제- 없는 무덤' ; 풀잎, 민음사 1974)로 되살아난다. 이 미미한 사랑의 실오리를 붙들고 절망은 희망의 언덕으로 기어오른다. "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 / 절망의 방에서 나간 희망의 어깻살은 / 한없이 통통하다는 것을" ('너를 사랑한다'), 강은교 시인은 일찌감치 허무의 심연에서 깨닫는다. 시인의 절망은 "어두울수록 더욱 빛나는 하얀 옥구슬" ('아직 태어나지 못한 아이의 편지1') 같은 희망을 잉태한다.

 

이런 깨달음 뒤에 강은교의 시는 존재의 소리 찾기, 병든 귀 고치기, 천지사방으로 몸귀 열기에 나선다. <풀잎>에서도 "들리지 않는 귀는 언제나 / 들리는 귀가 되고 싶다" ('風景祭 -西쪽 하늘', 풀잎)고 노래한 적 있지만, 네 번째 시집에 이르는 시집 제목을 <소리집>(창작과 비평사, 1982)이라 할 만큼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한다. 물론 이 소리는 인위의 소리가 아니라 자연의 소리, 우주의 소리, 일상에 찌든 귀로는 들리지 않는 성스러운 소리다. 온몸의 감각이란 감각은 모두 열어 몸귀로 듣는 소리다. 2002년에 펴낸 <시간은 주머니에 은빛 별 하나 넣고 다녔다>의 '시인의 말'에는 이런 소리들로 가득 차 있다.

 

" 비 다 마른 웅덩이의 소리, 비의 소리, (...) 사진들의 소리, 흐르는 강의 소리, 오래 달려온 엽서의 소리, 길의 소리, 나방의 소리, 도장들의 소리" 처럼, 실제로 소리를 낼 수 있는 사물과 소리를 낼 수 없는 것, 생물과 무생물, 구상과 추상의 구별도 없이 소리는 도처에서 솟아나온다. 이런 것이 "대상, 상황 속에 들어 있는 모든 진짜 소리며" 며, "시간속에 들어 있는 모든 진짜 소리"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 은빛 소리알들을 꺼내기 위하여" 시를 쓴다. 일상의 귀로는 들을 수 없지만, 시의 귀에는 왁자그르르 몰려 있는 소리를 세상 사람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이번 시집에 실린 소리의 목록에도 이런 "진짜 소리", 존재의 시원에서 울려오는 "은빛 소리알"로 가득차 있다.

 

온 하늘에 쨍그랑거리는 소리들

별과 별들 오늘 밤

서로의 살을 튕기는 소리

 

-'그 마당의 나무에서 들리다' 부분

 

누가 오고 있네

그 소리 이 동네에서도 들리고, 저 동네에서도 들려

이 돌 갈피에서도 들리고, 저 뼈 갈피에서도 들려

 

-'진달래꽃 뺨' 부분

 

핏물들에선 사르르륵 사르르륵 소리가 울리네

 

-'봄비 또는 옹이의 여행 노래' 부분

 

능연이 귀 기울이며 춤을 추네

새벽이 가는 소리와

주홍 산나리 오는 소리

안개 살살 마을을 핥는 소리를 들으며 춤을 추네

 

-'능연의 춤' 부분

 

그 소리 해를 뜨게 하는 소리

그 소리 풀잎 일어서게 하는 소리

그 소리 모래 일어서게 하는 소리

그 소리 모든 꿈 나아가게 하는 소리

 

-'강물 앞에 선 능연' 부분

 

"산처럼 높고 강물처럼 긴 그 소리" ('강물 앞에 선 능연')는 세상의 온갖 상처와 절망을 치유해주는, "풀잎과 내가 손을 잡" ('풀잎과 내가')게 해주는, 시간을 거슬러 차이꼽스끼를 만나고 우륵을 되살려내는('우륵') 신비의 소리다. 자연과 인간이 소통하게 하고, 몸과 마음의 통고를 어루만지며, 시공간을 자유로 넘나드는 소리의 힘. 이 힘으로써 시인은 새로운 한 세계를 일으킨다. 물론 이 세계는 인식과 감각을 버무려 세운 허구지만, 말로 지은 허구의 집이라고 헛되이 스러지진 않는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을 거듭 외다보니 극락의 평정을 얻게 되듯이, "모든 꿈 나아가게 하는 소리"를 듣고 듣고 또 듣는 사이에 우리는 어느새 새로운 세계에 이르게 된다.

 

강은교 시의 소리는 현실에선 거의 듣기 어려운 것들이다. 별들이 서로 "살을 튕기는 소리"나 "새벽이 가는 소리"를 들어본 적 있는가? "안개 살살 마을을 핥는 소리"는 상상하기도 어렵다. 시인은 이 없는 세계를 있는 세계처럼 노래한다. 없는 허구를 있는 사실로 확정함으로써 그것의 실현을 꿈꾸는 방식. 이것은 의사주술(擬似呪術)의 전형적인 방법론이자 시가 원래부터 지니고 있는 주술성이다. 의사주술은 현실의 부정성을 전제로 한다. 현실이 어둠이 아니라 밝음으로 가득 차 있다면 비손이며 푸닥거리, 굿이란 게 필요할 리 없다. 그런 까닭에 절망, 억압, 죽음, 무덤, 폐허, 허무, 고독, 같은 언어들이 시의 앞부분을 채우거나 배후에 깔린다. 이 부정성을 희망, 자유, 생명, 신생, 기쁨, 어울림 같은 긍정성으로 돌려놓는 형태가 의사주술의 구조다. '부정성--긍정성' '시련--극복' '죽음--재생'이라는 소박한 형식. 단순하기 때문에 오히려 강력한 힘을 담을 수 있다. "폐허"를 배경에 둘 때 "햇빛 소리" 더 쟁쟁해지고 "보라 제비꽃" 은 더욱 순수한 빛을 띠게 마련이다.

 

주술은 실현 불가능한 일을 신성의 힘을 빌려 실현하려는 행위다. 이때 초월적인 힘은 주문(呪文), 곧 특정한 형식의 말에서 나온다. 허구를 사실로 믿도록 하려면 일상어와 다른 특별한 언어인 주문이 필수 요건. 주문이라고 해서 말 자체가 다른 것은 아니다. 말의 운용이 다를 뿐이다. 주문의 기본 형태는 빌기와 되풀이하기. 신에게 비는 말은 '있어야 할 세계'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원망형(願望型)문장으로서 의사주술의 기능을 수행한다. 주술적 반복은 지극한 정성을 형식으로 변형한 것.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한마음으로 소리낼 때 반복은 저절로 생기게 마련이다. 간절한 염원이 한번 일어났다 금세 사라지는 법은 없지 않은가. 그러니 빌기와 되풀이하기는 한꺼번에 이루어진다. "이 빛 받으시오 / 이 빛 받으시오" 거듭거듭 비는 동안 "얽힌 길"이 풀리면서 부당한 부정한 현실이 사라지고 새 삶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주술이 곧바로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주술의 방법론을 변용한다. 시가 지닌 역설의 힘 때문에 원망형 어미는 자취를 숨길 때가 많다. 게다가 주술은 언어의 단순 반복을 활용하지만, 시는 다양한 변주에 더 주목한다. 이미저리와 의미망을 풍성하게 하고 현대인의 감각과 인식을 표현할 수 있는 틀이 아니면 현대시의 형식으로 부적합할 터. 그래서 강은교 시인은 여러가지 형태를 실험한다. 앞서 인용한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비슷한 이미지를 지닌 시구들을 모아 겹쳐놓는 것이 가장 질박한 방법이다. <강물 앞에 선 능연>에서 "해를 뜨게 하는 소리"와 "풀잎 일어서게 하는 소리"는 거의 같은 의미를 띠고 동일한 통사구조에 실려 희망의 이미지를 강화하고 있다. 긴 작품일수록, 해원굿 형식에 가까울수록 이런 형태가 많이 나타난다. '아직 태어나지 못한 아이의 편지2'의 경우엔,

 

우리 엄마는 왕비가 못 됐지

우리 엄마는 종

물을 가져오라면 물을 가져오고

배를 내밀라면 배를 내밀던 종

꿈은 사라져

신데렐라의 금빛 마차처럼

꿈은 사라져

어둠 잎들의 꿈은 사라져

 

라는, 첫 연의 앞부분이 바로 다음 연에서 유사하게 반복되고, 마지막 연에서는 이 첫 연 전체가 그대로 반복된다. 이쯤 되면 이 작품은 노랫가락이라고 하는 게 나을성싶다. 기실 강은교 시인이 찾은 것은 특정한 소리에 관한 시가 아니다. 시인은 시가 곧 노래이기를 꿈꾼다. 시에서 진짜 소리(판소리나 잡기를 부를 경우 '소리 한자락 뽑는다'고 하는데, 이때 '소리'가 강은교 시인의 "진짜 소리"에 가깝다)는 시를 이루는 말의 숨결, 말길의 흐름 때문이다. 

 

그래서 '심연 속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 연작에는 소리 / 노래라는 말이나 관련 이미지가 없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작품 자체가 곧 노래며 소리인 까닭이다. 이런 점에서 강은교 시인의 작업은 그림에서 노래로 나아가는 큰 틀 안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허무집>이 "날이 저문다 / 먼곳에서 빈 뜰이 넘어진다" ('自轉 1')같은 이미지 중심의 진술에 집중하는 데 비해, <소리집>부터는 리듬 중심의 노래로 기울고 있다. 이후에도 <등불 하나가 걸어오네>(문학동네 1999)의 '너무 짧은 사랑 이미지' 연작처럼 이미지를 표방하는 작품들이 없는 건 아니나, 리듬이 이미지의 흐름을 보조하는 양식보다 이미지가 리듬을 따라가며 희망의 의미망을 형성하는 양식이 늘어나고 있다. 이에 따라 여러가지 변화가 일어난다. '소리' 연작은 문어체를 버리고 말길 전체를 구어체로 바꾼다. 청자가 작품 안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개입하여 독백조차도 대화체 형식, '말걸기' 방식을 빌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어서 가요, 어머니

이 햇빛 따라가요, 어머니

벌판의 풀들도 전부 일어서는데.

바라보면 동으로 동으로

힘주어 흔들리는데.

꽃이란 꽃에 다 물들고

바위란 바위에 다 물들고도

흥건히 남아 우리 얼굴 비추는

아 햇빛 따라가요.

 

-'소리1' <소리집>부분

 

같이, "어머니"라는 청자가 문면에 나타나기도 하고, '소리 3' 처럼 극의 형태를 띠기도 한다. 이런 양식은 그 자체로 소통의 문을 열어두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단절과 절망의 양식은 화자 / 퍼소나가 1인칭 고백체로 진술하거나 3인칭의 객관 묘사를 단독으로 수행하는 경우가 보통인데, 특정한 청자 / 대상이 있을 경우에는 청유형 또는 원망형 어미를 사용하면서 말걸기나 마주 이야기하기 방식을 취하게 되어 자연스럽게 소통의 길이 열린다. 앞서 언급한 주술적 양식 또한 '신에게 말걸기' 라는 특성을 내재하고 있으니 단절보다는 소통 쪽으로 문이 열려 있는 셈이다. <중략>

 

뒤돌아보며, 뒤돌아보며 가는 저 새

없는 날개, 지는 해의 눈빛에 계속 흔드는 저 새

아직도 지지 않는 희망, 피처럼 닦으며

흘깃흘깃 옆눈질로 날아가는 저 새

 

동굴처럼 외로웠구나, 너는

저기 버려진 낡은 지갑처럼 외로웠구나, 너는

언제나 닫힌 채로 있는 창문처럼 외로웠구나, 너는

 

열어주소 열어주소

이 말문 열어주소

동해용왕님 워어이

남해용왕님 워어이 워어이

서해용왕님 워어니 워어이 워어이

북해용왕님 워어이 워어이 워어이 워어이

 

(---)

 

쓰다듬으소서 이 핏문

출렁이소서 이 핏문

오, 김선일, 외로운 모든 이의 이름.

 

-'뒤돌아보며, 뒤돌아보며 가는 저 새에게' 부분

 

 

김양헌 평론가는 1957년 경북 영천 출신으로 영남대 국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95년 『세계의문학』에 「푸줏간의 물고기」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1998년 『문학과사회』 10주년 기획으로 쓴 평론 「불상유통/동기감응」으로 이듬해 제4회 고석규 비평문학상을 받았다.  

 

강은교 詩集 <초록 거미의 사랑> p139 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