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로 만든 시차
- 에드거 앨런 포의 반올림한 산문풍으로
유년은 혼자 방에 앉아 조용히 종이비행기를 접었던 방식으로 이해하고 혼자 접어 놓은 종이비행기를 접선
을 따라 다시 풀면서 종이로 돌아오게 하는 방식으로 하나씩 이해를 포기했다. 종이비행기를 처음 접어 보
았을 때를 기억해, 라고 말하는 방식보다 종이비행기가 이륙하기 전 색연필로 비행기 몸통에 처음 동그란
비행기 창문을 그려 넣어 주던 내 눈으로 생각해, 라고 말하는 방식이 좋다. 나는 선회하는 방식으로 늘 유
년을 이해하지만 유년은 늘 돌아오지 않는 비행사의 '지금쯤의 고공'을 떠올리게 한다.
유년에 대해 내가 손가락을 세면서 떠올린 첫 번째 것은, 수없이 접었던 그 종이비행기의 행방들, 내가 손
가락을 세면서 떠올린 두 번째 것은, 내가 이륙시키기 전 종이비행기에 실어 준 무수한 사람들의 이름과 짐
의 목록들, 내가 가지고 있는 손가락을 모두 펴고도 셀 수 없는 것은 종이비행기가 추락한 장소에 가서 나
는 한 번도 실제로 죽지 못했다는 사실, 종이비행기에 탑승한 것은 언제나 인류가 아니라 어떤 몽상의 내부
였으니까.
유년은 조금씩 몽상의 내부를 다른 곳으로 옮기면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기체를 형성한다. 어느 누구
의 유년이나 몇 대의 종이비행기를 제작했던 기억과 그중 몇 대인가는 실종했던 기억이 존재한다. 도대체
그 많던 아이들의 종이비행기는 어디로 날아간 것일까? 어디로 추락해서 어디로 잔재가 흘러간 것일까? 글
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들이 종이비행기의 실족에 대해 내린 결론은 글을 완전히 잊을 때까지 바뀌곤 한다.
우리들이 유년에 날린 종이비행기는 대개 동화의 영역으로 날아갔다기보다는 사실의 이면에서 부유했다고
말하는 편이 낫다. 대개 동화의 힘이라기보다는 어떤 시차의 부력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종이비행기
가 우리들의 손끝에서 태어난 이미지를 따라가면서, 천천히 종이의 접선을 따라 만들어지면서, 몸체가 형
성되면서, 생기기 시작하는 동력은, 동화의 영역이 아닌 시차의 내적 동력인 '부력'에서 오는 것이다. 물론
동화의 내력을 뒤지면 시차로 이루어진 기후들과 구름 아래와 구름 속의 풍경이 겹쳐 보이는 것도 사실이
지만 실상, 크고 자잘한 시차로 만들어 가는 '사실들의 기후'가 우리들의 삶과 아주 닮아 있다고 여길 때 즈
음엔 그 모든 것의 경계를 묻고 따지는 일도 무색해지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서 비행기는 명백하게 시차를
빚어내는 기계임에 틀림없지만, 그 시차를 만드는 기계를 이해하는 첫 번째 수칙은 그 기계로의 '탑승'이
다. 그것은 비행기의 내부인 '기내(機內)'에 들어가는 것이다. 종이비행기는 기내를 보이지 않고 날아가는
종이의 행로이기도 하는 것이다.
동그란 비행기 창문을 종이비행기에 그려 넣어 주고 그 기내를 들여다보는 아이의 눈을 떠올리고 있다면,
우리가 접었던 무수한 종이비행기가 만들어 내던 '시차'는 우리가 무언가 다른 언어로 말하고 싶었던 순간
의, 다른 언어가 필요했던, 어디론가 부유해 가는 순간의 '착시' 같은 것일지 모른다. 종이비행기는 종이라
는 기내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그 기내에 자신이 차마 말하지 못했던 언어들이 실려 있다는 것을 이제야
이해하는 유년이기도 한 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여' 그곳의 '기내'는 시차다.
김경주<시차의 눈을 달랜다> 中
오은 시인의 평론 안에 들어있는 K의 시를 찾아서 읽는다. 마침 3년 넘게 만지작대던 색종이 공예의 부스러기들을 두 박스나 정리하고 앉아, 이걸 집으로 가져가 그냥 여기 둬..하고 있던 중인데, 종이 字 들어 간 제목이라 호기심이 댕겼다. K의 시차(時差 또는, 視差)야 워낙 유명하니 몇 편쯤 알고(?) 있다. 일단, 오늘 종이로 만든 시차는 목청이 높지 않아서 좋고, 무엇보다 더 좋은 건 미치광스럽지 않은 분위기(나직나직)다. 이물감 드는 시차 詩를 즐기면서도 역시 편안한 게 좋으니 전근대적 여자인가, 나는. 어쨌든 시 또는
당신(U)을 다 이해할 순 없어요! ... 한들 어떠리. 시를 이해한다(?)… 양자(兩者) 모두에게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모르겠으나, 그렇다면 이해한다는 건 결코 큰 목소리나 황소 같은 발자국이 아니라 고요 속에 고요의 얼굴로 고요히 왔다,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지만 사라진 줄도 모르면서 사라짐을 이해하고, 아니 인식하지 않는 사이(그래 K가 말하는 視差를 조건으로) 이루어지는 것… 아닐까, 주절절… 끄덕덕. 김경주 시인의 시(詩… 그래 詩差, 詩歷, 視力 面으론 어줍잖은 나완 천지도 없이 엇갈리지만)와 나지막한 목소리가 오늘따라 썩 맘에 든다. <吳>
Inception, 2010
계속 돌아가는 팽이는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한 것은 팽이를 보지 않을 만큼 소중한 그 무엇.
'내가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성우<삼학년> (0) | 2012.07.22 |
---|---|
바오 닌, 「전쟁의 슬픔」 중에서 (0) | 2012.07.19 |
이정록, 「교무수첩에 쓴 연애편지」 중에서 (0) | 2012.07.13 |
유지소<y거나 Y> (0) | 2012.06.29 |
마종기<이별>외 1편 (0) | 2012.06.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