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풀잎
아주 뒷날 부는 바람을 나는 알고 있어요.
아주 뒷날 눈비가 어느 집 창틀을 넘나드는지도.
늦도록 잠이 안 와 살(肉) 밖으로 나가 앉는 날이면
어쩌면 그렇게도 어김없이 울며 떠나는 당신들이 보여요.
누런 베수건 거머쥐고
닦아도 닦아도 지지 않는 피(血)를 닦으며
아, 하루나 이틀 해 저문 하늘을 우러르다 가네요.
알 수 있어요. 우린 땅 속에 다시 눕지 않아도.
2
빨래 너는 여자
햇빛이 ‘바리움’처럼 쏟아지는 한낮, 한 여자가 빨래를 널고 있다,
그 여자는 위험스레 지붕 끝을 걷고 있다,
런닝셔츠를 탁탁 털어 허공에 쓰윽 문대기도 한다.
여기서 보니 허공과 그 여자는 무척 가까워 보인다,
그 여자의 일생이 달려와 거기 담요 옆에 펄럭인다,
그 여자가 웃는다, 그 여자의 웃음이 허공을 건너
햇빛을 건너 빨래 통에 담겨 있는 우리의 살에 스며든다,
어물거리는 바람, 어물거리는 구름들.
그 여자는 이제 아기 원피스를 넌다.
무용수처럼 발끝을 곧추세워 서서 허공에 탁탁 털어 빨랫줄에 건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그 여자의 무용은 끝났다.
그 여자는 뛰어간다. 구름을 들고.
시집 <어느 별에서의 하루> 중에서
3
어떤 비닐 봉지에게
어느 가을날 오후, 비닐 봉지 하나가 길에 떨어져 있다가 나에게로 굴러왔다.
그 녀석은 헐떡헐떡거리면서 나에게 자기의 몸매를 보여주었다.
그 녀석이 한 바퀴 빙 돌았다, 마치 아름다운 패션 모델처럼 그러자
그 녀석의 몸에선 바람이 일었다. 얄궂은 바람, 나를 한대 세게 쳤다.
나는 나가 떨어졌다. 한참 널브러져 있다가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 녀석,
비닐 봉지는 바람에 춤추며 가는 중이었다.
나는 마구 달려갔다, 바람 속으로 비닐 봉지는 나를 돌아보면서도 자꾸 달아났다.
나는 그 녀석을 따라갔다, 넘어지면서, 피 흘리면서 쓰레기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으로,
실개천이 쭈빗쭈빗 흐르고, 흐늘흐늘 산소가 없어지고 있는 곳으로,
우리의 꿈이 너덜너덜 옷소매를 흔들고 있는 곳으로,
비닐 봉지는 나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나는 위대해! 나는 영원해! 나는 몸을 떨었다,
귓속으로 그 녀석의 목소리가 쳐들어왔다.
나는 영원히 썩지 않는다네, 썩지 않는 인간의 자식이라네.
비닐 봉지는 바람 속에 노오란 꽃처럼 피어났다.
시집 <어느 별에서의 하루> 중에서
4
우리가 물이 되어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5
기적
그건 참 기적이야
산에게 기슭이 있다는 건
기슭에 오솔길이 있다는 건
전쟁통에도 나의 집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건
중병에도 나의 피는 결코 마르지 않았으며
햇빛은 나의 창을 끝내 떠나지 않았다는 건
내가 사랑하니
당신의 입술이 봄날처럼 열린다는 건
오늘 아침에도 나는 일어났다, 기적처럼
시집『네가 떠난 후에 너를 얻었다』(서정시학, 2011)
6
사랑법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은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있는 누워있는 구름,
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운문과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현미<시에게> (0) | 2012.08.17 |
---|---|
장석주<모란이 필 때 보았던 당신> (0) | 2012.08.17 |
조연현<손수건의 사상> (0) | 2012.08.03 |
이상국 <금요일>외 (0) | 2012.08.01 |
심보선<연인들> (0) | 2012.07.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