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 이상국
보통은 금요일 오후에 로또를 산다
시가 안 되는 날은 몇 장 더 산다
나는 언젠가 내 밭에서 기른 근대로 국을 끓여 먹거나
머잖아 이웃에 대하여 관후(寬厚)를 보이게 될 것이다
로또는 인류와 동포를 위한 불패의 연대이고
또 그들이 나에게 주는 막대한 연민이다
나는 부자가 되면 시는 안 쓸 작정이다
어쩌다 그냥 지나가는 금요일은 불안하다
누군가에게 이 세계를 그냥 줘버리는 것 같아서다
그리고 은밀한 곳에서 그것을 맞춰 보고는
아 나는 당분간 시를 더 써야 하는구나 혹은
아 시도 참 끈질긴 데가 있구나 하며
다시 금요일을 기다린다
입대 전 날 / 이상국
나는 늘 2대8을 원했으나
아들은 한 번도 그것을 들어주지 않았다
물이나 기름을 바르고 척 빚어 넘기면
오솔길 같은 가르마 아래로
콧날이 줄을 서는 2대8 머리
그게 얼마나 구닥다리인 줄도 모르고 나는
아들이 범생이처럼 반듯해 보이길 바랐거나
내가 하고 싶었던 걸 그에게 원했던 건 아닌지
어떤 날은 목욕 가 정성껏 씻겨 주고
음료수 까지 사 먹이고는
은근슬쩍 머리를 갈라 놓으면
아들은 손짓 한 번에 헝클어 놓고는 했는데
그러면 나는 이 나쁜 눔아
그거 하는 데 돈 드냐고 눈을 흘기기도 했다
우리는 그 일들을 잊고 살았으나
입대 전 날 나는 그냥
삭발한 아들의 머리를 오래 쓰다듬어 주었다
유령 / 김요일
우리는 생선처럼 나란히 누워
비린내 풍기고 있었지
오후도 아니고 적멸도 아닌 시간
서로에게 안주가 되는 꿈을 꾸었지
햇살도 풍문도 없는 곳에서
폐병쟁이인 나는 핏빛 노래만 흥얼댔고
꼬리만 남겨진 당신은 파닥거리며 붉은 춤 추었지
무릎 꿇고 향을 피우면
별이 돋아났지 당신의 밤에선
약냄새 진동했지
꽃을 새기려 날선 손톱으로
깊은 곳을 후벼 팠지 상처 속에서 어김없이
소름 돋은 별 하나
후, 투투투—
날개만 두고 날아간 건
별이었는지
꽃이었는지
생선처럼 나란히 누워
서로 안주가 되는 꿈꿨지
흰 꽃이 피면 흰 술을 마시고
붉은 꽃 필 때 붉은 술 건네며
살자 했지 소멸하자 했지
《문장웹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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