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세상 / 유승도
어제보다 푸른 오늘이다
수백 아니 수천 마리의 벌레를 잡아 죽이고 늦은 아침을 먹는다
포도잎 뒷면에 다닥다닥 붙은 노랗고 검고 하얀 벌레들
털이 송송 난 벌레들을 장갑 낀 손으로 꾹꾹 누르거나 슥슥 문질러서 으깨 죽일 때, 벌레들은 갉아먹었던 포도잎을 몸 밖으로 내보내며 제 몸속의 푸르름을 증명한다 하얗거나 노랗거나 검었던 몸빛은 그저 허울이었노라고, 몸속은 푸른빛이라고, 그것이 내 빛이라고, 먹는 것의 빛이 곧 내 몸빛이라고
벌레들의 소리를 온몸으로 들으며 내 몸을 바라본다 나도 꾹 눌려 터진다면 푸른빛으로 감싸일까? 누군가 나를 쓱 문지른다면 말없이 으깨져 푸른빛이 될 수 있을까?
푸르른 것들을 입안으로 넣으며 창 밖의 푸른 세상을 바라본다
시집 『일방적 사랑』(詩와에세이, 2012) 중에서
photographer by_ssun
나의 새 / 유승도
유승도 내가 인간 세계에서 승도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듯이
새의 세계에서 새들이 너를 부르는 이름을 알고 싶다
새들이 너를 부르듯 나도 너만의 이름을 부르고 싶다
오래도록 마음의 문을 닫고 세상을 멀리하며 나는 살아왔다
아침이야 아침이야 네가 햇살보다 먼저 찾아와 창문 앞에서 나를 불러 아침을 안겨주었듯 저기 저 산, 네가 사는 숲에 들어가 나도 너의 둥지 옆에서 너의 이름을 불러, 막 잠에서 깬 너의 눈이 나를 보는 것을 보고 싶다
그때 너는 놀라며 나의 이름을 부르겠지..... 승도야
'운문과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태길<무거운 주제와 부드러운 표현> (0) | 2012.08.24 |
---|---|
趙鄕-ESQUISSE 외 (0) | 2012.08.22 |
안현미<시에게> (0) | 2012.08.17 |
장석주<모란이 필 때 보았던 당신> (0) | 2012.08.17 |
강은교<풀잎>외 5편 (0) | 2012.08.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