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김태길<무거운 주제와 부드러운 표현>

미송 2012. 8. 24. 17:37

무거운 주제와 부드러운 표현

 

 

수필의 소재를 일상적 사생활이나 정감어린 화조월석(花鳥月夕)에서만 구한다면, 수필의 영역과 그 의의를 스스로 좁히는 결과를 초래하게 마련이다. 이에 우리는 자유와 평등을 위시한 사회적 문제, 또는 진리와 선악을 포함한 철학적 문제에서도 수필의 소재를 찾는 길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고민과 부딪힌다. 사회적 문제 또는 철학적 문제와 같은 무거운 소재를 다루게 되면 그 글이 자연히 논설문에 가까운 것이 될 수밖에 없을 터인데, 그렇게 되면 수필가들이 간절하게 추구해온 '문학성'은 찾아보기 어렵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수필가들에게 '문학'은 마음의 고향이며, 문학성에 대한 애착을 버리는 글을 쓴다는 것은 돈에 대한 애착을 떠나서 장사를 한다는 것 못지않게 고민스러운 일이 아닐까 한다.

 

여기서 우리가 제기하게 되는 것이 이른바 '경수필(輕隨筆)' 또는 '중수필'로 분류되는 글에 문학성을 담을 수는 없을까 하는 물음이다. 만약 무거운 소재나 주제를 가지고도 문학적인 글을 쓸 수 있다면, 우리는 문학을 포기하지 않고도 수필의 영역과 의의를 넓히는 성과를 거두게 될 것이다.

 

'문학성'이라는 말의 뜻을 명료하게 밝히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미적 감동(美的 感動)을 주는 글이 문학이라고 보는 상식적 정의를 따른다 하더라도, '미적 감동''미적이 아닌 감동'을 구별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다만 구체적인 예를 가지고 생각할 때는 어느 정도의 구별이 가능하다. 표현의 수법이 극치에 달한 시를 읽었을 때의 감동은 '미적 감동'이요, 성서를 읽고 소박한 신자가 느끼는 감동이나 '공산당 선언'을 읽고 과격한 젊은이가 느끼는 감동은 '미적이 아닌 감동'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별이 언제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구별을 말로 설명하지는 못하더라도 우리가 직관적으로 그것을 구별하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글이 주는 감동에 '아름답다'는 느낌이 수반될 때, 그 감동을 '미적 감동'이라 부른다. '아름답다'는 느낌은 글의 표현에서 올 수도 있고, 글의 내용에 반영된 작가의 깊은 마음에서 오기도 하며, 글의 내용과 표현의 빈틈없는 맞물림에서 올 수도 있다.

딱딱하고 억센 표현보다는 부드럽고 우아한 표현이 '아름답다'는 느낌을 주기가 쉽다. 이른바 '연수필(軟隨筆)'에서 문학을 느끼는 경우가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작가의 마음 가운데서는 날카로운 이지(理智)보다는 따뜻한 정감(情感)'아름답다'는 느낌을 유발하기에 적합하다. 설리적 수필보다 서정적 수필 쪽이 문학적이라는 평가를 받기 쉬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내용과 표현을 빈틈없이 맞물리게 하느냐 못하느냐를 좌우하는 것은 작가의 문장력에 달려 있다. 수필에서 문장력을 중요시하는 이유가 이로써 명백하다.

 

사회적 문제 또는 철학적 문제를 다룬 학자나 언론인들은 대개 딱딱하고 메마른 문장으로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문학성을 요구하지 않는 학술적 논문의 경우에는 우유체 문장보다는 강건체 문장이 선호되고 높은 평가를 받아 왔다. 그러나 사회적 문제 또는 철학적 문제를 다룰 경우에도 자신의 견해를 부드럽고 윤택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꼭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특히 철학자들 가운데는 형이상학 또는 윤리학의 문제와 같은 무거운 주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유연하고 윤택한 문장으로 표현함으로써, 불후의 고전을 남긴 사람들이 있다. 플라톤의 <변명>이나 <향연> 같은 대화편 또는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그러한 경우이며, 이러한 저술들은 문학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몽테뉴의 <수상록>이나 파스칼의 <명상록>도 삶에 관한 무거운 문제들을 부드럽고 윤택한 문장으로 처리한 산문을 수록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몽테뉴의 <수상록>이나 파스칼의 <명상록>이 주는 '미적 감동'은 그 문장의 탁월함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문장도 문장이지만, 글 속에 나타난 몽테뉴 또는 파스칼의 사람됨과 마음의 깊이에서 더 많은 감동을 느끼는 독자가 많은 것이다. 작가의 사사로운 이야기나 사사로운 느낌을 정감어린 문장으로 표현한 이른바 '연수필'에서도 우리는 작가의 사람됨에 매혹되지만, 인간의 자연에 관한 철학적 문제를 다룬 글 가운데서도 우리는 작가의 사람됨 또는 그 마음의 깊이에 대하여 매혹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미덕'이니 '미담'이니 또는 '미풍양속'이니 하는 말이 암시하듯이, 우리는 인품의 도덕적 매력에 대해서도 아름다움을 느끼는 경우가 흔히 있다.

 

몽테뉴나 파스칼의 수상을 '서정수필'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그것은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연수필'의 분류도 아니다. 양분법에 따르면 연수필이 아닌 것은 경수필로 분류해야 하겠으나, 실은 '경수필'이라는 말도 잘 들어맞지 않는다. 전형적 경수필로 알려진 베이컨의 글에 대해서 가장 어울리는 이름은 '중수필(重隨筆)'이 아닐까 한다. 그들이 다룬 글의 소재와 그 글의 내용이 무겁기 때문이다.

 

한국의 수필가들이 이제까지 해 왔듯이 일상적 사생활 또는 화조월석에서만 소재를 구하고 서정적 수필만이 수필다운 수필이라는 견해를 고집한다면, 한국의 수필은 곧 한계에 부딪힐 것이다. 그리고 수필을 쓰는 일은 수필가들 사이에서만 알아주는 우물 안 작업이 될 것이며, 수필가들도 자기들이 하는 일에 조만간 싫증을 느끼게 될 것이다. 수필이 문학의 세계에서 확고한 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한가한 사람들의 자기만족을 넘어서는 경지로 나아가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수필의 지평(地坪) 그 자체를 크게 넓혀야 한다.

 

수필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는, 정치와 경제 또는 교육 등 사회적인 문제도 다루고, 삶과 죽음 또는 신과 인간 등 철학적인 문제도 다루어야 할 것이다. 어떤 글이 문학적이냐 아니냐 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글이 어떤 의미 있는 말을 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다.

 

그러나 가능하면 문학성도 갖춘 글이 바람직함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학성도 살피기 위해서는 시사적인 문제보다는 삶의 과정에서 되풀이하여 나타나는 영원한 문제와 관련된 소재를 다루는 편이 유리할 것이다. 그러나 장편수필이 아닐 바에는 너무 거창한 문제를 다루기는 힘들 것이므로, 영원한 문제에 연결된 구체적이고 작은 문제들을 다루는 편이 좋을 것이다.

비록 구체적이고 작은 문제라 하더라도, 그것을 영원히 문제의 부분으로 다루면 '중수필'로서의 무게를 가지게 될 것이며, 부드럽고 여운을 남기는 필치로 일관하면 '문학성'도 따르게 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문장력과 표현의 기교만으로는 문학성이 높은 작품을 만들기 어려울 것이다. 작가의 '마음의 깊이'에서 오는 미적 감동이 겹쳐서 상승작용의 효과를 거둘 때, 비로소 수작(秀作)을 얻게 된다. 작가의 정신세계가 넓고 깊어야 좋은 수필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중수필'의 경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적 상식이다. 많은 체험과 깊은 사색은 좋은 수필을 위한 소중한 바탕이다.

 

경험이 많은 늙은 세대나 사색을 일삼는 철학자만이 좋은 수필을 쓸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젊은이들에게도 심각한 체험은 있을 수 있으며, 철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넓고 깊은 마음의 세계를 가진 사람이 있다. 세상의 진리를 모두 파악한 양 유식을 과시하는 철학자나 세속을 초월한 성현인 양 좋은 말만 늘어놓는 늙은이보다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겪는 고민과 싸우는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진솔하게 들여다보는 무명의 젊은이가 쓴 글이 더 깊은 감동을 줄 수 있다.

 

 

 

김태길(1920~2009)

철학자. 수필가. 호는 우송(友松). 충북 중원 출생.

서울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원 졸업. 철학 박사. 서울대 교수. 한국철학회장. 현대수필문학대상 수상.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을 평이한 문장으로 엮어 쉬우면서도 감동 깊게 읽힌다는 평을 받는다. 수필집에는 『웃는 갈대』, 『빛이 그리운 생각들』, 『초대』등이 있다.

 

 

 

'운문과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경주<국경꽃집>  (0) 2012.09.05
오에 겐자부로 '불가사의를 이해하다'   (0) 2012.08.31
趙鄕-ESQUISSE 외  (0) 2012.08.22
유승도<푸른 세상>외 1편   (0) 2012.08.18
안현미<시에게>  (0) 2012.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