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귀유광<오래된 문간방>

미송 2013. 2. 5. 22:28

 

오래된 문간방

 

 

항척헌(項脊軒)은 예전 우리 집 남쪽에 있는 문간방이었다. 사방이 열 자밖에 되지 않는 좁은 방이라 간신히 한 사람이 앉을 수 있을 정도였다. 백년이나 된 낡은 가옥이라 먼지가 날리고 빗물이 새기가 일쑤였다. 그때마다 책상을 옮기려 둘러봤지만 둘 만한 데가 없었다. 게다가 북향이라 볕이 들지 않았고 정오가 지나면 일찌감치 어두워져 버리는 곳이었다.

 

나는 먼저 지붕을 조금 손보아 먼지가 나지 않고 비가 새지 않도록 했다. 앞에 네 개의 창을 내고, 마당 주위로 담을 둘러 남쪽으로 해를 마주하게 하였더니 햇빛이 반사하면서 방이 비로소 환해졌다. 그러고는 난초와 계수나무, 대나무 같은 갖가지 나무를 심었더니 예전에 있던 난간들까지 운치를 더 하였다.

 

책을 책꽂이에 가득 꽂아 놓고 방안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혼자 조용히 앉아 명상에 잠기기도 했다. 온갖 소리가 다 귀에 들려왔지만, 정작 마당 섬돌에는 정적만이 흘렀다. 작은 새들만이 가끔 날아와서 한가로이 모이를 쪼았고 사람이 다가가도 날아가지 않았다. 보름날 밤이면 담장 위로 밝은 달이 반쯤 걸리고, 달 표면 위로 계수나무 그림자가 점점이 흩어져 있다. 바람이 불어오면 계수나무 그림자도 함께 흔들거렸는데, 그 살랑거리는 모양이 무척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여기서 지내는 동안 기쁜 일도 많았지만, 슬픈 일도 많았다.

 

(중략)

 

아내는 가끔 이 방으로 건너와 나에게 옛날 고사를 묻거나 책상에 기대어 글씨를 배우곤 했다. 언젠가 아내는 친정을 다녀와서 여동생들이 “언니네 집에 낡은 문간방이 있다고 들었는데 어떤 곳이에요?” 하고 물었던 얘기들을 들려주기도 했다. 그 뒤 6년이 지나 내가 오랫동안 병으로 누워 할 일이 없을 때, 사람들에게 남쪽 문간방의 지붕을 다시 수리하게 하면서 구조가 전과는 조금 달라졌다. 이후 내가 밖에 있는 일이 잦아지면서 그곳에 자주 거하지 못했다.

마당에는 비파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내 아내가 죽던 해에 손수 심은 것이다. 이제는 벌써 무성하게 자라 우산처럼 우뚝 서 있다.

 

 

귀유광 - 당송파(唐宋波) 중 가장 걸출한 작가. 여덟 번의 낙방 끝에 59세에 어렵사리 진사에 급제하였지만 6년이라는 짧은 관직생활 끝에 세상을 떠났다. 

굴곡 많은 그의 인생만큼이나 그의 글도 구구절절한 사연과 정감으로 가득하다.

 

<중국문학의 즐거움>(고려대 중국학연구소 2009, 차이나 하우스) 215~216쪽 中.

 

 

항척헌은 말 그대로 '목'과 '등뼈'를 구부정하게 수그려야 간신히 몸을 들일 수 있는 조그마한 문간방이다. 백 년이나 되어 낡아빠진, 비가 새고 먼지 퀴퀴한 곳이지만, 작가는 이곳에서 시간을 함께했던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사랑했던 아내와의 추억을 하나하나 들추어낸다. ‘슬프다’는 말 한마디 쓰지 않고 담담하고 차분하게 옛 일을 돌이키는 것만으로도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간절하게 표현되어 있다.

 

특히 아내가 죽던 해에 심은 비파나무가 무성하게 훌쩍 자랐다는 마무리는 오랜 시간 동안 품어온 아내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부각시킨다. 여운이길다. 근엄 일색의 사대부가 아니라 나지막한 목소리로 사랑하고 함께했던 시간들을 그리워하는 아들이자 남편의 모습. 아내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담은 정갈한 소품小品이다. <오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