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김소연 <오, 바틀비>

미송 2013. 3. 31. 09:57

 

오, 바틀비*

 

모두가 천만다행으로 불행해질 때까지 잘 살아보자던 꽃들의 맹세가 흙마당에서 만개해요, 사월의 마지막 날은 한나절이 덤으로 주어진 괴상한 날이에요, 모두가 공평무사하게 불행해질 때까지 어떻게든 날아보자던 나비들이 날개를 접고 고요히 죽음을 기다리는 봄날이에요, 저것들을 보세요, 금잔화며 양귀비며 데이지까지 모두가, 아니오, 아니오, 고개를 가로저으며 하루를 견뎌요, 모두가 아름답게 불행해질 때까지 모두가 눈물겹게 불행해질 때까지, 온 세상 나비들은 꽃들의 필경사예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몰아쉬는 한숨으로 겨우 봄바람이 일어요, 낮달이 허연 구멍처럼 하늘에 걸려요, 구멍의 바깥이 오히려 다정해요, 반나절이 덤으로 배달된 괴상한 날이에요, 모두가 대동단결하여 불행해질 때까지 시들지 않겠다며 꽃잎들은 꽃자루를 꼭 붙든 채 조화처럼 냉정하구요, 모두가 완전무결하게 불행해질 때까지 지는 해는 어금니를 꽉꽉 깨물어요,

 

* 허먼 매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

 

 

 

천만다행으로 공평무사하게 아름답게 눈물겹게 대동단결하여 완전무결하게. 부사어 여섯 개로 운을 떼며 부른 노래. 불행해질 때까지 쓴 악보樂譜. 나머지 후렴구는 독자의 몫으로 현재진행 중, 삶은 아직 안 끝났으니까. 흴 소素에 이어 까말 오烏의 필사는 이어질 가능성도 있고 바틀비는 필경사였고 약간은 집요했고 나쁘게 말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지리멸렬했다. 죽을 때까지 썼으나 바틀비만 기억된다. 내용을 더 기억하는 후세들도 있겠으나 난 그들을 모른다. 바틀비 비틀즈 헷갈리면서 그냥 잘 산다. 삼월이 좋다 고 감성을 깨우려던 중인데 삼월이 시끄럽다. 삼월이는 좋은데 사람들이 슬프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름답게. 아침에는 이외수가 귀를 긁고 갔다. 아니 이외수 대신  뉘인지 대신 떠들어 주었다. 공평무사하게도 사람들은 상부상조한다. 개망신을 떨기도 하겠지만 멍멍인지 망아진지 무관하게 본다. 보인다는 것, 낮달이 허연 구멍처럼. 구멍의 바깥이 더 다정하게, 보인다는 것. 보이니 정말. 보인다니 신기해. 아무튼 내겐 보이지도 않는 것들을 하늘에 매단다는 것, 아직 살았다는 것들의 소일消日이란 한낱 그런 '것'. 지금이 또 봄이니. 계절과는 무관하게도 완전무결하게 얼어붙은 감성마을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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