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백무산 <풀의 투쟁>

미송 2013. 8. 1. 07:27

 

 

 

풀의 투쟁 / 백무산

 

 

단단한 것은 틈이 생긴다지만
모든 튼튼한 것은 갈라진다지만
실금이 견고한 벽을 무너뜨린다지만
하나가 무너지는 자리에
다른 하나도 따라 무너지니

틈을 만드는 동안
갈라진 틈에
깃털처럼 부드러운 풀씨가 찾아와

틈은 반짝 희망이었다가 갈라지고
사막을 만들기 시작할 때
틈을 내는 투쟁의 손에도 쇄기가 못처럼 박히고

틈에는 풀이 자란다
풀은 흙에만 뿌리내리는 것이 아니라
풀이 흙을 만들어간다

틈이 자라 사막을 만들어갈 때
풀은 최선을 다해 흙을 만들어 덮는다



백무산 1984년 《민중시》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 《인간의 시간》 《그 모든 가장자리》 등이 있다.

 

 

풀 하면 제일 먼저 김수영의 풀이 떠오른다. 풀은 질기고 너무도 강하다. 나약해 보이지만 보여지는 게 그럴 뿐이다. 풀을 뽑아 본 사람은 알 것이다. 풀의 번식력 풀의 억센 질감 풀의 중력을. 주말에 병든 코스모스를 잘라 버리며 나도 알았다. 쇄기가 못처럼 박히는 것 같은 오른쪽 팔의 통증이 풀과의 투쟁 결과라는 것을. 에게게 고것 같고 뭘,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그때 풀의 진면목을 발견했다. ' 틈이 자라 사막을 만들어갈 때 풀은 최선을 다해 흙을 만들어 덮는다 ' 모래와 모래 사이에 사막이 산다 고 어제 읽은 누군가의 시에선 말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그 시와 이 시 사이에 풀이 자라고 있다. 역발상들의 결합, 그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무튼 시에 공감한다. 풀은 역시 꽃만큼 아름답고 위대하니까.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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