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들
―박정대 (1965∼)
너를 껴안고 잠든 밤이 있었지, 창밖에는 밤새도록 눈이 내려 그 하얀 돛배를 타고 밤의
아주 먼 곳으로 나아가면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에 닿곤 했지, 산뚱 반도가 보이는 그곳에서 너와 나는 한 잎의 불멸, 두 잎의 불면, 세 잎의
사랑과 네 잎의 입맞춤으로 살았지,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의 스산한 벌판에선 밤새 겨울밤이 말달리는 소리, 위구르, 위구르 들려오는데 아무도
침범하지 못한 내 작은 나라의 봉창을 열면 그때까지도 처마 끝 고드름에 매달려 있는 몇 방울의 음악들, 아직 아침은 멀고 대낮과 저녁은 더욱더
먼데 누군가 파뿌리 같은 눈발을 사락사락 썰며 조용히 쌀을 씻어 안치는 새벽,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너를 껴안고 잠든 밤이 있었지’. 있었지, 있었지, 있었지. ‘산뚱 반도가 보이는 그곳에서 너와 나는 한 잎의
불멸, 두 잎의 불면, 세 잎의 사랑과 네 잎의 입맞춤으로 살았지’. 살았지, 살았지, 살았지. 가슴이 저민다! 이 생생한, 감상(感傷)의 여린
아름다움으로 독자의 가슴을 방울방울 적시며 끌어당기는 힘!
격렬비열도(格列飛列島), 충남 태안반도 관장곶에서 서쪽 55km 해상의
최서단 고도(孤島). 무인도인 남격렬비도와 서격렬비도, 그리고 겨우 300제곱미터 유인도인 북격렬비도가 날아갈 듯 떠 있다지. 아, 사랑하는
사람과 단둘이 그곳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랑은, 격렬할수록 더 배타적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싶어 한다. 화자는 실제로 사랑하는 사람과 격렬비열도에 간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 격렬한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 음악이 맺힌다. ‘처마 끝
고드름에 매달려 있는’ 것 같은 슬프고 뜨거운 음악이. 청춘과 사랑에 대한 낭만적 시정이 넘쳐흐르는 격렬비열도(激烈悲熱島)! 이런 세계, 이런
감정 상태가 그립고 부럽다. 청춘이니까 그런 감정이 가능한 걸까? 아니다, 이건 나이 문제가 아니다. 이런 사랑을 할 수 있는 체질, 한 감정에
푹 빠져드는 체질이 따로 있다. 박정대는 풍부한 감정을 타고난 예민한 시인이다. 박정대 시의 감상과 낭만은 현실의 각박함을 적셔주고, 독자의
감성을 끌어올린다. <황인숙>
누구인가의 벨소리에 의해 잠이 깬 휴일 아침. .....그러나 지금은 벌써 한낮을 향해 가고 있는데, 또 누구인가의 손끝에 의해 넘겨졌을 나의 옛 책갈피를 뒤적이며 오타를 수정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나는 격력비열도의 기역이란 철자를 리을로 바꾸고 있었다. 격렬하면 컥 막히기도 하나 하면서 말이지. 그랬단 말이지, 섬의 격렬했던 추억과 밤의 음악들을 간직했단 말이지, 또 그리고는 박정대의 리듬이 완벽하게 끝나는 음악을 끝까지 듣고 앉아 있다. 문 밖에선 배고프다니깐 하면서 한 남자가 커피를 두 잔째 마시고 있다. 쵸코칩 쿠기와 함께. 황인숙씨는 문장배달을 마쳤는가 했더니 요즘은 동아일보로 가서 돈 받고 감상문을 올려주고 있는가, 어쨌든 반갑다. 누군가의 손끝에 의해 넘겨졌을지도 혹 모를 정일근의 격렬비열도를 듣다가 박정대의 격렬비열도도 다시 듣는다. 더불어 슬픈 기색이란 없을 듯 보이는 황의 흔적도 읽는다. 밥을 먹어야 겠다. 이제 나도 저 남자처럼 배가 고프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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