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곳에 오면 모든 것이 달라 보이게 된다.
위만주국 수도 창춘의 샹그릴라 호텔 앞 스타벅스 커피에 앉아 이 글을 쓴다. 위만주국이라는 이름은 중국에서 붙여 놓은 것 같다. 영문으로 Puppet Manchuguo라고 표기되어 있는 것을 호텔에 비치된 지도에서 보았다.
어제 중국 남방항공 편으로 이곳에 도착해서 아침 여덟 시 반에 위만주국 황궁박물원이라는 곳에서 두어 시간 보내다 걸어서 이곳까지 왔다. 내가 묵고 있는 곳은 여기서 더 걸어가야 하고 오늘 저녁 가까워서나 내일 오전에 위만주국 정부 건물들이 남아 있는 곳에 가서 더 보고 생각할 것이다.
이리저리 부산하게 보내다 준비 없이 떠나왔기 때문에 오늘 새벽에 일어나 국가전자도서관과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에 들어가 신경에 관해 읽을거리들을 찾아보았으나 정작 보고 싶었던 것은 채 보지 못한 채 위만주국 사적지를 돌아본 셈이다.
그런데 옛날 위만주국 황궁이라는 데를 돌아보다 보니 그 접두사처럼 붙어 있는 ‘위’ 자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위’는 ‘僞’, 즉 ‘거짓 위’다. 일제는 만주국이라고 했으나 사실 독립국가가 아니라 일제의 괴뢰 국가이니 위만주국이라고 해야 맞겠다는 것이다. 딴은 그럴듯한 말이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청나라가 망하고 나서 만주족도 안정된 삶의 터전을 잃어버렸다. 만주국이 사라지고 난 후 만주 땅은 중국의 것으로 낙착되고 만주인들, 조선인들은 중국을 구성하는 소수민족들로 여기저기 흩어져 살아가게 됐다. 만주인들은 있다. 국문학을 하다 보면 만주인들을 본다. 그러나 만주인들의 나라는 없다.
옛날에는 큰 나라를 세웠다 망하더라도 변방으로 쫓겨나 몇백 년 버티면 또 새로운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현대 자본주의는 그런 가능성을 없애 버렸다. 자본을 따라 이리저리 물결치듯 흘러갔다 흘러오는 사이에 다들 흩어져 큰 대륙이라는 용액에 엎어진 물이 되고 만다. 한 번 국가적, 민족적 정체성의 기반을 상실한 민족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한국에 돌아가면 부이 황제에 관한 책을 한 번 봐야겠다. 위만주국에 대한 그의 생각은 무엇이었는가?
그러나 만주국을 만들면서 일제가 내세운 오족협화니, 대동아공영이니 하는 깃발이 가짜가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자기 부정에 빠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가짜였다. 오족 가운데 사족은 지금 중국에서 소수민족들이 한족 헤게모니 아래 들어가 있는 것처럼 평등함을 누리지 못했다. 대동아공영이라는 것은 일제의 동양 식민지배를 가리는 얄팍한 천에 불과했다.
일제가 내세우는 사상이나 위만주국을 명명한 주체가 내세우는 사상이 가짜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생각해 봐야 한다. 대저 그럴듯한 이념을 거창하게 떠벌이는 세력치고 가짜 아닌 것이 드물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만주인들은 이제 하나의 민족으로 성립 못 한다고들 한다. 자기 언어도 기억하는 사람이 극히 적고, 어느 곳에 자치주를 만들어 놓지도 못했다. 만주국도 가짜지만 위만주국도 그만큼이나 가짜처럼 보이는 것은 이제 내가 세상을 너무 많이 경험해서일까.
삶의 모든 현상은 달리 보면 다른 생각을 얻게 된다. 그래서 삶에 대한 판단은 그때그때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 말은 삶에 관한 어떤 진실도 단번에 쉽게 얻어질 수 없음을, 또 결코 완전하게 어질 수도 없음을 의미한다.
시는 이러한 문제를 상대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삶의 양식들 가운데 하나다. 따라서 시 역시 모든 것을 단번에 상대하려는 태도 속에서는 진짜가 나오기 어렵다고 본다. 어떤 표현도, 어떤 메시지도 완전하지 않다. 각도를 달리해서 보면, 시간이 흘러 새로운 각도에서 보는 것이 가능해지면 다른 시가 나오게 된다.
조개를 생각하는 서로 다른 방법
문태준 시인이 조개를 가지고 쓴 시가 아주 훌륭해서 당분간 조개를 소재로 삼아 시를 쓰는 사람은 퍽이나 곤란을 겪으려니 했다. 그는 어물전 개조개가 혀를 내민 것을 보고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라고 썼다. 조개 혀를 보고 부처의 맨발을 보는 문태준 시인의 상상력은 아주 흥미롭다. 그러나 한편으로 모든 것이 금방 깨달음에 귀착하는 데서 오는 심리적 부담감도 피할 수 없는 면이 있다. 그런데 이번에 《유심》 7월호를 보니, 김추인 시인이 조개를 다시 시에 옮기는 ‘모험심’을 보였다.
이 시를 가만히 읽어 보니 각도의 ‘승리’라고나 할까? 어떤 사람에게 조개의 혀는 부처님 발 같은 것이기도 하겠는데, 이 시인에게 조개의 혀는 다시 혀는 혀일 뿐이라는 평범한 진리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으로 되돌아가 버렸다.
갯모래 머금은
혓바닥 하나 몸을 삼으니
석화된 입이 무기다
발바닥 생을 숨긴 집이다
만입이 다 열려 있어도 적막한
묵언수행
어느 전생의 세 치 혀가 저지른 죄업인지
딱딱한 입술 두 쪽에
혓바닥 하나 숨겨 생애를 건너가는 중이다
물속에서 내다뵈는 것은
먼 깜박임
저건 시리우스 저건 좀생이 별
저기에도 생을 기댈 짭쪼름한 물이 있을까
바람 칠수록 명멸하는 찬란을 본다
머나먼 저기
뉘 손짓이 저리 반짝이는지
조개는 날개를 펴듯 움찔 움찔
패갑을 열었다 닫곤 한다
— 김추인 〈조개의 꿈〉(《유심》 7월호)
김추인 시인의 시에서도 조개는 묵언수행을 한다. 불교적이다. 그러나 시는 여기서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좀 더 보편적인, 별을 향한 향수로 연결된다. 먼 곳을 향한 그리움이 바닷속 조개의 삶에도 작용하고 있어 조개는 이따금씩 그 딱딱한 패갑을 열었다 닫았다 한다. 이때 조개의 입술은 이번에는 눈꺼풀이 되는 것 같다. 같은 조개를 두고 어떻게 달리 볼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다.
잡아먹는 자와 잡아먹히는 자 읽기
함민복이야 정평이 있는 시인이다. 짧고 간결한 시에 이 사람만큼 날카로운 재치를 발취하는 시인도 찾아보기 힘들다. 한 번은 시라고, 당신 생각을 켜놓고 잠들었다고 하는 한 문장을 써 놓았는데, 그것도 곱씹어 보면 명문은 명문이다. 더도 덜도 할 수 있는 게 없어 그렇게 써놓고 말았다는데 어떻게 시비를 거나. 이번에 잡지들을 보는데, 이런 시가 한 편 있다.
통으로
망둥이를
구워 먹는데
뱃속에 든
수염도 삭지 않은
참새우
한 마리
망둥이가
잡아먹으며
느꼈을
포만감에
쭈빛
— 함민복 〈참새우〉(《작가들》 여름호)
망둥이를 잡아먹는 화자는 망둥이 뱃속에서 참새우 한 마리를 발견하고 그가 그 새우를 잡아먹을 때 느꼈을 포만감을 상상한다. “쭈빛”은 자기 온몸이 짜릿해졌다는 뜻이리라.
〈밀림의 왕국〉을 보면 포식자도 포식당하는 자만큼이나 이해하게 된다. 그도 살아가기 위해 잡아먹는 것이다. 유전자를 그렇게 타고나 하는 수없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아프리카 늪지대에 사는 사자 무리는 먹이를 찾고 잡아먹지 않으면 그 젖은 땅에서 말라 죽어갈 수밖에 없다. 인간은 어디까지가 본능이고 어디서부터가 위악인가. 하도 악랄한 인간이 많아서 그것도 유전이려니, 본능이려니 이해해 주고 넘어가기 힘든 것이 세상인 것도 같다.
함민복 시인은 자연의 이치에 따라 살아가는 생물 세계의 아름다움을 이 짧은 시에 아주 재치 있게, 한순간에 담아냈다. 재치라고 말하면 뭔가 천격이 든 것 같지만,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위트가 있다고 한다. 함민복은 먹고 먹히는 생물 세계의 섭리를 아주 위트 있게 드러내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뜨거운 불길에 각을
나는 젊은 시인들에 매우 인색한 편이어서 좀처럼 논의에 올리지 않는 사람이다. 젊다는 것은 훈장이 아니다. 뭐, 한 일이 있어야 훈장을 받는 게 아닐까. 젊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직 제대로 이룬 것이 없다는 것, 그래서 앞으로는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그것 때문에 기대를 품게 되는 것이지 아무 말이나, 아무 글이나 쓰면서 용용 죽겠지, 이건 모르겠지, 하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그 표정이 바로 훈장이 되는 것은 아니란 말씀이다.
김행숙 시인은 벌써 꽤 관록이 붙어버렸는지 모르지만 나는 이 시인이 날렵하게 운을 달려가는 것을 매우 즐겁게 감상하곤 한다. 부디 가라앉지 말지어다, 쉬고자 하면 느려지고, 느려지면 가라앉는 법이니. 하지만 세상을 자기 안에 끌어안아 자기 목숨처럼 괴로워하는 젊은 시인을 보지 못했다. 저기 보도블록을 배를 밀며 가는 사람이 자기 자신이라도 되는 듯 괴로워하는 젊은 시인을 보지 못했다. 다들 자신의 행운법이 얼마나 훌륭한지 보라고들 뽐내는 데 여념 없다. 내 개성, 내 상상력이 얼마나 기발한지 보시오들. 흥, 안 보련다. 못 보아 주겠다. 뭐, 대단하다고. 당신의 시문장이 얼마나 졸렬한지 보시오, 좀, 제발.
주하림 시인은 나이는 서른 살이 안 되었고, 가슴에 나비 문신이 있고, 원고료를 받아야 시를 쓰겠다고 하는, 맨날 시나 쓰지 정해진 일은 별로 없는 시인이다. 내가 잠시 살펴본 바에 따르면 그렇다는 말이다. 시는 아주 길고 읽는 이를 깜짝 놀라게 하는 기발한 상상력이 있는가 하면, 그 사이 사이에 뭔가 세상을 생각하는 빛이 엿보이는 시인이다. 정말 그러한지는 알 수 없다. 포즈가 어느 만큼이나 실체적인지 잘 알 수 없으므로. 하지만 김행숙 시인처럼 이 시인에게도 상상력을 받쳐주는 파토스가 있음은 분명하다.
나는 이 시인의〈우리는 마지막 꿈에 오면 전혀 다른 연인이 된다>를 읽으며 생각한다. 당신의 그 ‘“불구덩이”’에 방향을 더 확실히 주라. 더 각도를 주라. 당신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독자를 위해 각도를 더 날카롭게 하라.
그 삼사일을 떠올리면 빗소리로 만들어져 빗소리에 잠기는 집이 생각나고 서로의 기별을 묻지 않는 우리가 그 안에 있다 마치 장난감집을 갖게 된 어린 주인의 힘에 떠밀려 곳에 앉아 있는 것처럼, 예전 긴 바다의 주인에게 내가 화판을 옆구리에 끼고 정신에 관해 지껄이던 시절 정신에 관한 것 그런 것은 도무지 쓸모가 없어서
당신의 마음은 나를 허물지 않으려는 해변을 눈치 챌 것이다 아니 눈치 챈 해변이 신기루를 거두어 우리를 작은 테이블에 앉힐 것이다 한숨과도 같은 포옹 나는 이번 생 아닌 곳에서 어떤 미술학교에서 당신을 보았으며 아주 날카로운 인상의 선생으로부터 당신의 연락처를 받기 위해 갖은 고생을 했다는 것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은 축축한 목젖으로 처음에는 깃털이 그 다음에는 새가 빠져나간 새의 주검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그리고 이 모든 것이 화판이나 정신과 마찬가지로 쓸모가 없었다 내겐 당신뿐이었으므로) 나는 어떤 한량들에게 걸려 밤길에 이가 두 개나 부러진 것까지 이야기하고도 왜 우리를 관두어야 하는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비가 오는 방 홀로 두고 온 나의 귀걸이 한 짝과 당신이 들어 올리던 허리와 편지와 리본으로 묶어 둔 빵 당신이 수염을 자르면 밖은 너무 춥고 답답해 당신은 나의 불구덩이 속에서 아무것도 꿈꾸지 않았을까 가령 사랑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해도 당신 집 근처에 큰 저수지가 있어 나는 슬픔에 잠겨 검은 날개를 질질 끌고 돌아다녔지 다음으로 무엇도 읽지 않고 무엇도 고독일 리 없는, 우리는 마지막 꿈에 오게 되면 전혀 다른 연인이 되어 있다
— 주하림 〈우리는 마지막 꿈에 오면 전혀 다른 연인이 된다〉(《유심》 7월호)
유머가 있어 세상은 살 만하다
나는 유머의 효능을 틀림없이 믿는 사람이다. 비록 나 자신은 유머 감각이 턱없이 부족하다 해도 유머러스해지려고 노력하고는 있으며, 시에도 산문에도 어느 경지에 오르려면 유머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유머는 확실히 인생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명약이다. 유머는 날카롭게 찌르지 않고 부드럽게 감싸 안는다. 채만식은 평생 날카롭게 찔렀지만 그 창에 자신이 찔려 버렸다. 하인리히 하이네도, 영화 속의 시라노도 자기 글에 자신이 중상을 입었다. 하지만 이문구는 아무도 찌르지 않았다. 아니 찔렀지만, 허허, 내가 찌른 셈 치고 어디 한 번 아픈 척이라도 해 봐, 하고 느리게 웃곤 했다. 아픈 척이라도 하다 보면 사실은 아픔이 무엇인지 알 수도 있게 된다.
풍자와 유머는 보는 각이 다르다. 풍자는 죽게 하고 유머는 살게 한다. 박순원만큼 유머에 뛰어난 시인이 이 문단에 지금 없다. 더 선배로는 오탁번 시인이 있고, 그 아래로는 없었다. 되다 만 유머는 썰렁하고 춥다. 박순원의 시들은 그런 시들은 아니다.
이번에는 그는 무좀균을 나무란다. 또 너희는 이번에는 정말 죽었노라, 엄포를 놓는다. 무좀처럼 한심한 병도 없다. 나았는가 보면 다 낫지 않고 재발한다. 꼭 권위주의 같다. 꼭 ‘꼰대들’ 같다. 악랄한 관행이며 관습 같고, 원칙이라 떠벌려지는 수많은, 쓸데없는 간섭과 참견 같다. 그런 이들을 상대하려면 라비진크림Ⓡ 같은 치료제가 반드시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화자는 이들을 진짜 박멸하겠다고 손톱으로 이를 잡듯 증오를 품고 달려들지 않는다. 무좀균들아, 너희는 금방 죽을 거고, 나는 건재할 거야. 알아, 그런 약이 있어. 그것은 바로 내 유머지, 암. 어떤 메마른 메커니즘이 자신의 삶의 활기를 위협해 와도 끄떡없이 견딜 수 있는 무기 아닌 무기를, 박순원 시인은 천부로 가진 듯하다.
무좀―피부진균감염증 치료제 라비진크림Ⓡ 염산테르비나린
라비진은 azole계 약물과는 달리 진균세포막에서 스쿠알렌 에폭시다제의 작용을 저해합니다 즉, 진균의 스테론 생합성 과정 중 스쿠알렌 에폭시다아제의 작용을 차단하여 에르고스테롤의 결핍과 스쿠알렌의 세포 내 축적을 초래하므로 진균 세포를 죽이게 됩니다
진균들아 이 지긋지긋한 진균세포들아 이제 너희들이 왜 죽는 줄 알았냐? 이 약은 azole계 약물이 아니란다 너희들이 스테론 생합성을 해서 살아간다는 것이 이미 다 밝혀졌다 그 과정에서 스쿠알렌 에폭시다아제가 작용한다는 것도 다 알고 있다 이제 너희들은 에르고스테롤이 결핍되고 스쿠알렌이 세포 내에 축적되어 서서히 죽어갈 것이다 내가 하루에 두 번씩 염산테르미나핀 10㎎과 벤진알코올 10㎎이 포함된 백색의 크림제 1g을 꼬박꼬박 바르면 너희들은 2~4주 안에 다 죽게 되어 있다 내 발바닥을 가렵게 하던 이 못된 진균들아 벌써 에르고스테롤이 결핍되어 허덕일 가엾은 진균들아 단세포로 백 날을 생각해도 멀쩡하게 의기양양 번식하다 왜 갑자기 배가 고프고 몸이 무거워지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것이다 나?
나는 어떠냐고? 라미진은 국소도포 후 5% 미만이 인체에 흡수됩니다 그러므로 전신으로서의 약물 이행은 극미합니다 까딱없지
— 박순원 〈어디쯤 가고 있을까〉(《시와 정신》 여름호)
반복적인 일상을 거부하기
일상을 일상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이에게 삶은 반복이다. 변화 없고 생기 없고, 따라서 벗어나야 할 방향도 없다. 〈막차의 시간>의 화자는 그런 일상을 살아가기를 거절하는 인물인 듯하다. 먼저 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버스가 출발의 형식으로써
우리를 지나쳐 버렸다
멀어졌지만
저것은 출발을 한 것이다
멀어지는 방식은 모두 비슷하다
뒷모양을 오래 쳐다보게 한다
버스는 한 번 설 때마다 모두의 어깨를 흔든다
집에 갈 수만 있다면 이 흔들림들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아침이면 방에서 나를 꺼냈다가
밤이면 다시 그 방으로 넣어주는 커다란 손길
은혜로운 것에 대하여 생각한다
고구마를 키운 이후로
시간도 얼마나 무럭무럭 자라는지를 알게 되듯
슬픔 뒤에 더 길다란 슬픔이 오는 게 느껴지듯
무언가가 무성하게 자라지만
예감은 불가능해진다
휙휙 지나쳐 가는 것들이
내 입김에 흐려질 때
차가운 유리창을 다시 손바닥으로 쓰윽 닦을 때
불행히도 한 치 앞이 다시 보인다
몸이 따뜻해지는 일을 차분하게 해 본다
단추를 채우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둔다
— 김소연 〈막차의 시간〉(《작가들》 여름호)
이 시를 읽어 보면, 처음부터 이 화자는 버스를 놓치는 사건을 자기 혼자만의 경험으로 치부하지 않았다. 1연에서 화자는 “버스가 출발의 형식으로써/ 우리를 지나쳐 버렸다”라고 함으로써, 처음부터 ‘우리’에게 말을 걸어 버렸다.
이렇게 화자가 대담하면 독자인 우리는 하는 수없이 화자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나는 이 연을 우리 세대의 문제처럼 받아들였다. 나는 늦게 이곳에 당도했고 저것은 떠나버렸다. 그러나 하는 수 없다. 이 상황을 언제까지든 부정하면서만 살 수는 없지 않나.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평범한 사건을 우리들 삶의 존재 방식에 관한 성찰을 펼칠 수 있는 소재로 전개시켜 나가는 일은 쉽지만은 않다. 그럼으로써 지각은 운명이 되고, 늦게라도 다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은 의지를 수반해야 하는 활동이 되며, 집은 저마다 당도해야 할 삶의 목적이 된다.
그 돌아가는 길의 흔들림은 삶의 과정에서 우리에게 밀려오는 간단없는 시련 같은 것이 될 수도 있다. “차가운 유리창을 다시 손바닥으로 쓰윽 닦을 때/ 불행히도 한 치 앞이 다시 보인다”라고 한 부분이 특히 울림이 좋다. 우리는 아예 포기해 버릴 수도 있는데, “불행히도” 한 치 앞은 보이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나아갈 수밖에 없다.
한편, 이번 월평에 공교롭게도 두 개 잡지에서 두 편의 시를 뽑아 올리게 된 것은 먼 곳에 오느라 배낭에 몇 권의 잡지만을 들고 왔기 때문은 아님을 사족으로 밝혀 둔다. 출국 전에 열 권 넘는 잡지들을 살펴보았으나 어쩐지 이렇게밖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고 또 글도 구성이 되지 않은 것은 필자의 보는 눈이 외진 각도밖에 지니지 못하고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기대를 품고 일독한 잡지가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할 때 아쉬움은 크다. 《시인동네》는 지난번 젊은 시인 방담에 이어 젊은 평론가들 방담이 좋았다. 《시작》은 시의 과잉을 논의한 데서 묘미가 있었다. 이숭원 선생께서 그 과잉을 논하면서, 하필 이상과 임화를 꼽은 것은 논란이 될 만하다고 생각한다.
방민호
문학평론가·시인. 서울대 국문과, 동 대학원 졸업. 1994년 《창작과 비평》(평론), 2001년 《현대시》(시)로 등단. 저서로 《비평의 도그마를 넘어》 《납함 아래의 침묵》 《문명의 감각》 등과 시집 《나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가 있다. 유심작품상, 김환태평론상 등 수상. 현재 서울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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