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란 문학실

[시] 그림자

미송 2013. 9. 29. 09:45

       

         사진 by_ 채란

       

       

      그림자 / 오정자

       

      나는 그것을 그림자라고 부르는데, 간혹 그림자는 내 발 앞에 서기도 했다. 치맛단을 두른

      빨간 바이어스 밖으로 길게 뻗은 검은 나뭇가지. 흔들리는 그 위로 새라도 날아오르면 함성

      하는 사람들. 그러나 오전 아홉시 삼십이 분이면 늘 그 자리에서 기다림을 배우는 사람들,

      틈서리에 사는 그림자. 그림자는 나라는 아집의 신기루를 베고 누워 있다. 깊은 밤 별들의

      출처를 묻던 여심처럼 말이다. 우리의 이런 관계는 꽤 오래되었다. 쐐기문자를 읽던 때부터,

      피 묻힌 얼굴로 집으로 돌아간다 는 구절이 아무래도 어렵다 느꼈을 때부터. 해독되지 않던

      어제의 문장을 다시 고민하는 이 순간까지도, 그림자는 내 신발을 벗어나 달아나려 했다.

      돌아가셨는가 나의 그림자여 할 때 마다, 부른 듯 발 앞에 서는 한 그루 나무여, 붉은

      가로등과 혼재된 창백한 빛의 흐느낌이여, 나는 매일처럼 순결한 당신에게 불안한 문장을 쓰고

      망설이지만 지우지 않고 잠든다. 무너지는 아성에 새 계율을 박으려는 무모함으로 또

      한 페이지의 계절을 넘길 때마다, 나는 내 발끝에서 돋아난 그림자에게 아무튼 미안하였다.

       

      * 김중일 시인의 <천사> 페러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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