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는 나의 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더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시를 말하다
기형도는 청춘에 관한 하나의 증상이다. 그의 시는 청년기의 투명한 우울에 관한 가장 예민한 언어였으며, 젊은 문학도에게는 피할 수 없는 통과의례의 질병이었다. 첫 시집을 출간하기도 전에 심야극장에서 혼자 죽음을 맞이했다는 비극적 이미지는, 그를 윤동주 이후의 가장 선명한 문학청년의 표상으로 만들었다. 그는 유년의 흐린 기억과 도시인의 익명적 공허와 청춘의 조로를, 환상적인 이미지와 내밀한 고백체의 문장들과 결합하는 시들을 남겨놓았다. 그에 대한 지속적인 문학청년들의 열광은 기형도라는 신화의 놀라운 생명력을 말해준다.
시, '질투는 나의 힘'은 그의 유고시집[입 속의 검은 잎](1989)에 수록된 작품으로 그의 감수성의 내부를 들여다보게 한다. 예민한 청년들이 그러한 것처럼, 이 시의 화자는 자기 자신에 대한 내적 성찰을 기록의 형태로 남겨준다. 이때의 기록에는 자신의 지나온 삶에 대한 부끄러움이 새겨 있을 것이다. 그런데 청춘의 자의식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자신이 지금 그런 부끄러운 기록을 남긴다는 사실 자체를 다시 부끄러워한다. 윤동주의 '자화상'의 구조와 유사한 이 두 겹의 부끄러움은 부끄러움에 대한 부끄러움이며, 미래에 먼저 가서 현재의 부끄러운 기록을 미리 부끄러워하는 것을 의미한다.
청춘은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고", 그래서 "희망의 내용이 질투 뿐" 이었다면, 이 질투는 누구를 향한 질투인가? 그 질투는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맨" 결과일 것이나, 내면적으로는 "시간"에 관한 것이다.
그가 다른 시에서 '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고 노래할 때, 이미 청춘은 이 세계의 공허와 부조리를 너무 일찍 알아차리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의 내 부끄러운 기록조차 어리석은 것이라고 미리 후회할 수 있는 것이다. 후회를 무릅쓰고 누군가 자기 생에 대해 기록해야 할 것이 있다면, 기형도처럼 내안의 질투를 고백해야 한다. 혹은, 탄식하듯 말해야 한다. 시간에 대한 질투가 우리를 살게 했다고.
이광호(문학평론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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