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작가들

오은

미송 2014. 3. 1. 12:04

범상치 않은 언어감각으로 세상 관조
모티브는 긍정과 명랑… 다방면 재주꾼

2002년 대학 합격 소식을 들은 다음 날, 오은(30·사진) 시인은 전화 한 통을 받는다. "오은씨, 등단하셨습니다." 잠이 덜 깬 그가 물었다. "어, 등단이 뭔가요?" 그가 끼적여놓은 습작시를 그의 형이 가져다가 월간 '현대시' 신인상 공모에 투고한 게 덜컥 당선된 것이다. 시라고는 교과서에 나온 작품을 읽어본 게 전부였던 스무 살 청년은 그렇게 시인이 됐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젊은 시인들을 북돋우는 문단 분위기가 아니었던 데다 서울대 학생(사회학과)이 시를 계속 쓰겠느냐는 의심의 눈길도 있던 터라, 그는 문학에 거리를 두었고 대학 졸업 후 카이스트(KAIST)에 진학해 교환학생으로 캐나다 연수를 갔다 온다. 그러다 계간 '시와 사상'에서 그의 감각적 언어를 뒤늦게 알아보고 다섯 편을 청탁한 것을 계기로 그는 다시 시를 쓰게 됐다. 이런 곡절 끝에 첫 시집은 등단 7년 만인 2009년에 묶었다.

"사람들의 음모는 언제나 아르누보식이었지요/ 이 말은 우리가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는 겁니다/ 젊은 돼지들은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겁이 많고 눈이 커다란 데다 제법 순종적이었거든요/ 꾸불거리며 대가리 쳐들 기회만 슬슬 엿보는 거지요/ 저렇게 끼리끼리 모여 있는 걸 보면 몰라요?/ 젊은 돼지들은 침대 위를 뒹구는 마피아와 갱을 상상했습니다/ 소름이 돋았지요, 요즘엔 유기농 비료를 먹고 있는데 말입니다// 늙은 돼지들은 구석에 누워 심하게 낄낄거립니다"('호텔 타셀의 돼지들' 부분)

아르누보 건축 양식의 대표적 상징인 벨기에의 타셀 호텔. 그 호텔 지붕 아래에서 젊은 돼지와 늙은 돼지들이 함께 사육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한 공간에 늙은이와 젊은이가 함께 있는 경우엔 늙은이가 젊은이에게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하지만 이 시에서는 입장이 역전돼 있다. 연소자인 젊은 돼지가 연장자인 늙은 돼지에게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 문제를 진단해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음모는 언제나 아르누보식이었지요'라는 말은 하나의 명제가 된다. 이를 '사람들의 음모는 언제나 새로운 예술을 지향하지요'라고 해석할 때 사람들이 잡아먹을 돼지는 늙은 돼지가 아니라 젊은 돼지이다. 적어도 젊은 돼지들은 사람이 주는 유기농 사료를 먹으면서도 의식만큼은 살아 있어야 한다는 풋풋한 등장인물이 되고 있다. 이에 비해 늙은 돼지들은 더 이상 아르누보적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의 표적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구석에 누워 낄낄대며 시답지 않은 농담이나 일삼는다. 시를 읽다보면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 떠오른다. 변화를 외치면서 권력을 잡은 뒤 변화의 가능성을 막아버리는 늙은 돼지들은 "젊은 너희들이 먼저 희생될 테니 우리는 안전하다"고 낄낄거리고 있는 것이다. 돼지 농장과 인간 사회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환기하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돼지 농장의 젊은 돼지와 늙은 돼지의 입장을 차용해 세대론을 끄집어내는 게 오은의 범상치 않은 언어감각이다.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을 단행본 '너는 시방 위험한 로봇이다'로 펴낼 만큼 다방면의 재주꾼이다. 첫 시집이 나온 직후인 2009년 교통사고를 겪은 뒤 머리를 크게 다쳐 의식을 회복하는데 3개월이 걸린 오은. 그는 1년의 재활치료를 겪고도 "그러잖아도 긍정적인데 더욱 긍정적이 됐다"며 깔깔 웃는다. 그 명랑함이 최근 시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아침입니다. 오늘은 어떤 머리를 쓰면 좋을지 잠시 머리를 씁니다. 중요한 강의와 회의가 여러 건 있으니 저 머리를 써야겠군요. 잠자리용 머리를 벗어두고 그 머리를 착용합니다. 하루가 시작된 게 몸소 느껴지는군요. 평소보다 늙어 보인다구요? 저는 평소란 게 없습니다. 인상이 전체적으로 어두워 보인다구요? 이 머리를 쓰면 웃을 일이 거의 없습니다."('교양인을 이해하기 위하여' 부분)

국민일보 | 입력 2012.06.15 18:28 문학전문기자 정철훈

 

 

 

 

 

 

 

 

'시인과 작가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와바타 야스나리  (0) 2014.07.16
이연주 시인 外 6명  (0) 2014.07.07
이윤택   (0) 2014.02.15
김승희  (0) 2013.11.02
김선우   (0) 2013.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