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진중권 <글쓰기의 영도(零度)>

미송 2014. 3. 17. 10:40

 

 

 

글쓰기의 영도(零度)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 중에 입을 통해서 모든 것을 쏟아내다가 허공으로 사라지는 사내의 그림이 있다. 배 멀미를 하는 사람들이 토하고 토하다가 더 토해낼 게 없어 괴로워하는 것처럼, 글쟁이도 요동하는 현실 앞에서 느끼는 현기증과 역겨움에 글을 토하고 토하다가 더 토해낼 게 없어 괴로울 때가 있다. 그때는 입으로 신체 안의 모든 기관을 다 토해내고 허공 속으로 사라지고 싶어진다.

 

본의 아니게 논객 노릇을 한 지도 거의 10년이 되어 간다. 우연한 계기에 시작한 일인데, 이제는 그게 아예 정체성이 되어 버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토해놓을 지면을 갖고 있다는 게 어찌 보면 특권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지면을 채우려면 세상의 거의 모든 일에 견해를 가져야 한다. 그것만큼 피곤한 일도 없다. 때로는 아무 견해 없이 그냥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며 살고 싶어진다.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언급하다 보면 나중에는 아직 언급하지 않은 주제를 찾기 힘들어진다. 똑같은 글을 소재만 바꿔 고쳐 쓰는 데에도 한계가 있어, 언젠가는 동일한 글쓰기가 반복되는 지루한 동일자의 무한증식 상태에 빠져들게 된다. 세상이 제 아무리 다양하다 하나,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솔로몬의 격언처럼 세상이라는 것만큼 동일한 일이 지겹게 반복되는 지루한 드라마도 없다.

 

하루라도 미디어에 노출되지 않으면 못 견디는 이도 있다고 하나, 사실 미디어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게 마냥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피부의 두께가 다르듯이, 사람마다 자신이 견딜 수 있는 노출의 적정량이 있다. 자외선에 과도하게 노출되면 피부가 상하고 마는 것처럼, 견딜 수 있는 한도 이상으로 미디어에 노출될 때 존재 역시 화상을 입어 상처에 물파스를 바른 듯한 고통을 온 몸으로 느껴야 한다.

 

논객은 글을 칼처럼 사용한다. 그러다 보면 온 몸으로 적대자들이 휘두르는 보복의 칼집을 받아야 한다. 비난도 적당히 받으면 기분이 나쁘지만, 과도하게 받으면 무감해지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엔 비난을 받는 것 자체가 쾌감으로 바뀌어 버린다. “내가 비난을 받는 것은 뭔가 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말했다는 증거다.” 증상이 이쯤 되면 하루라도 욕을 안 먹으면 혀에 가시가 돋는 변태가 된다.

 

논객의 발언은 기술적(descriptive)이 아니라 규범적(normative)이다. 윤리학에 공약의 부담이라는 게 있어, 규범적 발언을 하는 이는 그 말을 지킬 책임을 먼저 자신에게 지워야 한다.  “약속을 적게 할수록 더 많이 지킬 수 있다는 과학의 윤리는 동시에 논객의 윤리. 하지만 논객은 과학자보다 불행하여 글을 쓸 때마다 약속을 해야 한다. 말과 글을 쏟아낼 수록 글쟁이는 제 말로 제 몸을 옭아매게 되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숨이 막히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흔히 독자는 글을 보고 필자의 인격을 추정한다. 하지만 글을 쓰는 인간과 삶을 사는 인간은 다르다. 글 쓸 때의 인간은 이상적 주체가 되지만, 원고료를 챙기는 글쟁이는 지극히 현실적인 주체. (종종 글쓴이를 직접 보고 나서 독자들이 글에서 얻은 아우라가 무너지는 체험을 하는 건 이 때문이다.) 글쟁이는 자신의 비루한 현실과 글을 쓸 때에 연기하는 이상의 괴리에 역겨움을 느끼다가 결국 자신을 혐오하게 된다.

 

바로 이 때가 더 이상 글을 쓰는 게 불가능해지는 글쓰기의 영도(零度). 지금 그 제로 디그리에 와 있다. 그 동안 이곳저곳에 셀 수 없이 많은 말과 글을 뿌리며 살아 왔다. 할 수 있는 모든 말들을 다 토해놓고, 더 토할 게 없어 위산까지 토해 놓고, 그것도 모자라 몸 안의 기관을 증발시켜 스프레이처럼 입으로 뿜어내어 마침내 존재를 허공으로 날려버린 느낌이다. 이것이 내가 이 지면을 결국 넋두리로 장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다.

 

 

밤새 원고를 쓰려다가 그냥 소파에 쓰러져 잠이 들다. 새벽에 깨어 다시 글을 쓰려고 했으나 뭘 써야 할지 떠오르지를 않는다결국 <씨네21> 원고는 개인적 넉두리로, <여성신문> 원고는 옛날에 쓴 글을 대충 고쳐 써서 마무리하고, <씨네21><여성신문>에 기고를 중단하겠다고 써 보냈다. 이제 강연을 위해 인천에 가야 한다. 1호선을 타야하는데 신경이 견뎌낼지 모르겠다.

 

2006년 5월, 진중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