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꽃병 / 박남희
그 병에 꽃이 있어야 된다는 것은 관념이다 꽃병과 꽃은 별개이다 다만 그들이 우연히 만날 뿐이다 그 꽃병을 나는 여자라고 바꾸어 말해본다 꽃병이 갑자기 누드로 보인다 사실 꽃병은 늘 누드를 꿈꾸지만 실제로는 누드가 아니다 누드의 조건은 육체에 이목구비가 있어야 한다 꽃병은 단지 이목구비 아래의 허방일 뿐이다 꽃병과 꽃이 만나야 이목구비를 갖게된다
꽃 밑에 뿌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도 관념이다 꽃병이 있으면 된다 꽃병은 뿌리이다 때로는 분리도 가능한 조립식 뿌리이다 요즘 세상엔 조립식이 편리하다 신혼부부도 요즘은 결혼을 하고도 혼인신고를 하지 않는다 조립식 신혼을 꿈꾼다 조립식은 이동이 편리하다 분해가 가능한 만큼 그 속을 속속들이 알 수 있다 꽃병의 속내는 그냥 캄캄한 것 같지만 사실 좀 음흉하다 때로는 죽은 꽃들도 오래 방치해둔다 종종 꽃과의 이혼을 꿈꾼다
나는 그 꽃병의 정체가 궁금하다 꽃병이 나비를 위한 것인지 세상의 눈(目)을 위한 것인지 궁금하다 꽃병에 꽃이 없을 때도 꽃병인지가 너무나 궁금하다 그래서 나는 꽃병에게 물어 보았다 너는 꽃이 없을 때도 꽃병이냐고, 근데 꽃병은 아무런 대답이 없다 그냥 뾰루퉁하다 그러다 갑자기 꽃병은 히히힝거리며 날개 달린 말이 되어 천마도 속으로 사라진다 세상의 움직이는 것들이 모두 꽃병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저기 꽃들이 웅성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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