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 도솔암 가는 길 / 김영남
만약 어느 여자에게 이처럼
아름다운 숲속 길이 있다면
난 그녀와 살림을, 다시 차리겠네.
개울이 오묘한 그녀에게
소리가 나는 자갈길을 깔아주고
군데군데 돌무덤을 예쁘게 쌓겠네.
아침이면 노란 새소리로 풀꽃들을 깨우고
낮에는 이깔나무 잎으로 하늘을 경작하다가
천마봉 노을로 저녁밥을 짓겠네.
가을이 되면 물론 나는
삽살개 한 마리를 데리고 산책하며
쓸쓸한 상상을 나뭇가지 끝까지 뜨겁게 펼치겠지만
모두 떠나버린 겨울에는 그녀를 더 쓸쓸하게 하겠지?
그러나 난 그녀를 끝까지 지키는 장사송(長沙松)으로 눈을 얹고
진흥굴 앞에서 한겨울을 품위 있게 나겠네.
설혹 그녀에게 가파른 절벽이 나타난다 할지라도
나는 그 위에 저렇게 귀여운 암자를
옥동자처럼 낳고 살 것이네.
김화영엮음『꽃이 지고 있으니 조용히 좀 해 주세요』(시와시학사, 2008년)
김영남은 1957년 장흥에서 출생하였으며 1997년 《세계일보》신춘문예로 등단하였다. 문학과창작 작품상, 중앙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시집으로 『정동진역』,『푸른 밤의 여로』등이 있다.
선운산 도솔암 가는 길을 나는 가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를 읽으며 그 길이 어떤 길일지 상상해 봅니다. 그 길은 호젓하고 조용하고 고즈넉한 숲속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니 참하고 맑고 말이 없는 길이겠지요. 개울도 있고, 군데군데 돌무덤도 있고, 풀꽃도 피어 있고, 새소리도 들리고, 이깔나무들이 자라는 자연스러우면서도 잘 가꾸어진 아름다운 길일 겁니다.
그렇게 고요한 길이지만 노을이 붉게 타오르는 산으로 이어지는 길, 한겨울에도 소나무가 푸르게 자라는 산길, 가파른 절벽에 암자도 하나 있는 산길일 겁니다. 화자는 이런 숲길 같은 아름다움을 가진 여자가 있다면 그 여자와 살림을 차리고 싶다고 합니다.
그 여자는 도솔암 가는 길처럼 조용하고 말이 없고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지닌 여자, 가꾸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지닌 여자이겠지요. 고적하고 외롭게 살았어도 천마봉 노을 같은 뜨거움이 있는 여자일 겁니다. 그 여자와 살다가 가파른 절벽이 있는 걸 알게 되어도 절벽 위에 지은 암자처럼 앙증맞으면서도 깊은 데가 있는 아이를 낳고 살아가고 싶은 여자, 그런 여자를 만나고 싶어 합니다. 그런 여자를 만난다면 누군들 한겨울에도 장사송이 되어 끝까지 지켜주고 싶어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가 하면 아주 육감적인 상상을 하며 읽어도 좋은, 시적 묘미를 갖고 있는 재미있는 시이기도 합니다. <도종환>
공광규 시인의 '적당한 거리' 라는 시에서도 선운사 도솔암을 본 듯 하다. 거기가 거기인 이야기. 그리고 풍경이다. 그러나 시인에 따라 주제는 상반된 느낌이다. 한 쪽은 적당한 간격을 또 다른 쪽은 간격일랑 불허하겠다는 결사의 주제를. 암튼, 둘 다 말장난이 아니었음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 하나 몸 간수하기도 힘들지만 말이다. 두 사람 이상 예찬하는 걸로 봐서 선운사라는 절은 괜찮은 절간인가, 짐작된다. 절간 가는 길 치고 조용한 숲길 없는 절간이 어디 있나. 사람이 들끓다 보니 시끄러운 절간이 되었을 뿐. 오나가나 사람이 문제. 절이든 교회든 치마씨들이 더 문제(?). 얘기가 삼천포로 빠진다. 아무튼지간, 남자 시인들은 조렇게 지절댄 것 반만큼이라도 좀 조용히 준비하는 자 되었으면 좋겠다. 요런조런 여자 바라지만 말고 말이다. 물론 난, 열외를 자청했으니 떠드는 것뿐이고.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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