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춘점묘(早春點描)
이상(李箱)
그 날 황혼 천하에 공지(空地) 없음을 한탄하며 뉘 집 이층에서 저물어가는 도회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때 실로 덕수궁 연못 같은, 날만 따뜻해지면 제 출몰에 해소될 엉성한 공지와는 비교도 안되는 참 훌륭한 공지를 하나 발견하였다.
00보험회사 신축 용지라고 대서특서한 높다란 판장으로 둘러막은 목산 범 천 평 이상의 명실상부의 공지가 아닌가. 잡초가 우거졌다가 우거진 채 말라서 일면이 세피아 빛으로 덮인 실로 황량한 공지인 것이다. 입추의 여지가 가히 없는 이 대도시 한복판에 이런 인외경의 감을 풍기는 적지 않은 공지가 있다는 것은 기적 아닐 수 없다.
인마의 발자취가 끊인 지 - 아니 그건 또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르지만 - 오랜 이 공지에는 강아지가 서너 마리 모여 석양의 그림자를 끌고 희롱한다. 정말 공지 - 참말이지 이 세상에는 인제는 공지라고는 없다. 아스팔트를 깐 뻔질한 길도 공지가 아니다. 질펀한 논밭, 임야, 석산, 다 아무개의 소유답이요, 아무개 소유의 산깢이요, 아무개 소유의 광산인 것이다. 생각하면 들에 나는 풀 한 포기가 공지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이치대로 하자면 우리는 소유자의 허락이 없이 일 보의 반 보를 어찌 옮겨 놓으리오. 오늘 우리가 제법 교외로 산보도 할 수 있는 것은 아직도 세상 인심이 좋아서 모두들 묵허(默許)를 해 주니까 향유할 수 있는 사치다. 하나도 공지가 없는 이 세상에 어디로 갈까 하던 차에 이런 공지다운 공지를 발견하고 저기 가서 두 다리 쭉 뻗고 누워서 담배나 한 대 피웠으면 하고 나서 또 생각해 보니까 이것도 역시 00보험회사가 이윤을 기다리고 있는 건조물인 것을 깨달았다. 다만 이 건조물은 콘크리트로 여러 층을 쌓아 올린 것과 달라 잡초가 우거진 형태를 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봄이 왔다. 가난한 방안에 왜꼬아리 분(盆) 하나가 철을 찾아서 요리조리 싹이 튼다. 그 닷곱 한 되도 안 되는 흙 위에다가 늘 잉크병을 올려놓고 하다가 싹트는 것을 보고 잉크병을 치우고 겨우내 그대로 두었던 낙엽을 거두고 맑은 물을 한 주발 주었다. 그리고 천하에 공지라곤 요 분 안에 놓인 땅 한 군데 밖에는 없다고 좋아하였다. 그러나 두 다리를 뻗고 누워서 담배를 피우기에는 이 동글납작한 공지는 너무 좁다.
'운문과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석<마포> (0) | 2009.06.16 |
---|---|
길상호<도마에 오르다> (0) | 2009.06.16 |
백석<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0) | 2009.06.12 |
성기완<블랙홀 언젠가 터질 울음처럼> (0) | 2009.06.12 |
오은<별 볼일 있는 별 볼 일> (0) | 2009.06.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