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파이터 / 이장욱
- 코끼리군의 엽서
저기 저, 안전해진 자들의 표정을 봐.
하지만 머나먼 구름들이 선전포고를 해온다면
나는 벙어리처럼 끝내 싸우지.
김득구의 14회전, 그의 마지막 스텝을 기억하는지.
사랑이 없으면 리얼리즘도 없어요
내 눈앞에 나 아닌 네가 없듯. 그런데,
사과를 놓친 가지 끝처럼 문득 텅 비어버리는
여긴 또 어디?
한 잔의 소주를 마시고 내리는 눈 속을 걸어
가장 어이없는 겨울에 당도하고 싶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
방금 눈앞에서 사라진 고양이가 도착한 곳.
하지만 커다란 가운을 걸치고
나는 사각의 링으로 전진하는 거야.
날 위해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
넌 내가 바라보던 바다를 상상한 적이 없잖아?
그러니까 어느 날 아침에는 날 잊어줘.
사람들을 떠올리면 에네르기만 떨어질 뿐.
떨어진 사과처럼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데
거기 서해 쪽으로 천천히, 새 한 마리 날아가데.
모호한 빛 속에서 느낌 없이 흔들릴 때
구름 따위는 모두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들.
하지만 돌아보지 말자, 돌아보면 돌처럼 굳어
다시는 카운터 펀치를 날릴 수 없지.
안녕. 날 위해 울지 말아요.
고양이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잖아? 그러니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구름의 것은 구름에게.
나는 지치지 않는
구름의 스파링 파트너.
낯선 시를 쓰는 이장욱 시인의 시입니다. 소설가로도 유명한 분이지요. 이 시 역시 한 마디로 ‘이것이다’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작품입니다. 비극적이면서 동시에 냉소적이고 대화이면서 동시에 독백인 시죠. 권투에 대해 잘 모르지만, 외곽을 돌면서 상대의 빈틈을 노리는 이가 아웃파이터이고, 상대에게 바짝 달라붙어 저돌적인 공격을 퍼붓는 이가 인파이터라고 합니다. 우리는 세상이라는 사각의 링 위에서 난투극을 벌이는 존재들, 누구나 단 한 방의 펀치도 맞지 않으면서 단 한 방의 카운터펀치로 상대를 쓰러뜨리는 아웃파이터가 되고 싶어 하지요.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지치지 않는 구름의 스파링 파트너'일 뿐입니다. 오월의 마지막 월요일, 세상과 맞서 싸우는 고단한 헝그리 복서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최형심>
구름의 스파링 파트너. 코끼리군. 김득구. 당연 나는 김득구에 촛점을 맞춰 시를 읽는다. 김득구가 실제의 인물인가, 소설 속 가명인가 하는 질문이 앞서서 김득구를 찾는다. 70년대 대한민국의 가장 아픈 가슴, 김득구에 대해 한참을 듣는다. 김득구를 아니 시가 이해된다. 소설 같은 현실이다 지금도. 그래서 시인은 소설까지 쓰고, 전설 속 상처의 액자를 끄집어내 왔을까. 아무튼, 인파이터란 말이 가벼이 쓰여선 안 된다. 최소한 김득구를 떠올릴 때만큼은. 모리배 근성으로 연명하는 현대인들과 목숨을 걸고 싸우다 죽은 김득구의 근성과 어찌 비교를 할 수 있을까. 심하게 허약하다 요즘 사람들. 굳이 김득구에 비하자면.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