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장석주 <등에 부침>

미송 2014. 5. 16. 07:29

 


등에 부침 / 장석주

 

1

누이여, 오늘은 왼종일 바람이 불고

사람이 그리운 나는 짐승처럼 사납게 울고 싶었다.

벌써 빈 마당엔 낙엽이 쌓이고

빗발들은 가랑잎 위를 건너 뛰어다니고

나는 머리칼이 젖은 채

밤늦게까지 편지를 썼다.

자정 지나 빗발은 흰 눈송이로 변하여

나방이처럼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유리창에 와 흰 이마를 부딪치곤 했다.

나는 편지를 마저 쓰지 못하고

책상 위에 엎드려 혼자 울었다.

 

2

눈물 글썽이는 누이여

쓸쓸한 저녁이면 등을 켜자.

저 고운 불의 모세관 일제히 터져

차고 매끄러운 유리의 내벽에

밝고 선명하게 번져가는 선혈의 빛.

바람 비껴 불 때마다

흔들리던 숲도 눈보라 속에 지워져가고.

조용히 등의 심지를 돋우면

밤의 깊은 어둠한곳을 하얗게 밝히며

홀로 근심 없이 타오르는 신뢰의 하얀 불꽃.

등이 하나의 우주를 밝히고 있을 때

어둠은 또 하나의 우주를 덮고 있다.

슬퍼말아라, 나의누이여

많은 소유는 근심을 더하고

늘 배부른 자는 남의 아픔을 모르는 법

어디 있는가, 가난한 나의 누이여

등은 헐벗고 굶주린 자의 자유

등 밑에서 신뢰는 따뜻하고 마음은 넉넉한 법,

돌아와 쓸쓸한 저녁이면 등을 켜자.

 

한 낮에도 등불을 들고 거리를 쏘다녔던 디오게네스햇빛을 가리고 선 알렉산더를 향해 당신 그림자 좀 치워주셈, 했던 디오게네스계절도 없이 흔들리는 등불 아래서의 서간체를 보자니디오게네스의 등불이 생각난다어디로부터 출발하여 돌아오고 있는 중인지 시방 어디서 휴식 중인지, 너와 나는 매일 편지를 쓴다. 부치지도 못할 편지로 산다. 돌아와 쓸쓸하면 다시 등을 켜자, 아른한 종잇장을 등에 부치고 쪽잠에라도 들자 하는 걸까, 시 속 화자는.... 아무튼 우리는 각자의 자명등 하나 들고 나설 일이다, 고도를 기다리며 고도를 향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