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한다 고로 사랑한다
오정자
그러니 고질적인 의심이란 과히 불치병이다.
네모난 아파트 거실에서 세상을 본다. 작은 틀 안에서 사람들을 재단한다. 그러면서 점점 왜소해지는 이념들로 서글퍼진다. 돌팔매질을 하다보면 오히려 내 얼굴이 따갑고 아프다. 우리는 왜 이렇게 벽을 쌓고 살아가는 것일까. 빈곤한 마음으로 무엇을 향해 이다지도 헉헉대며 오르는 중일까.
가까워질수록 멀게만 느껴지는 사람들 숲에서 왜 나만 유독 단절을 겪는가. 당신도 혹시 그러한가.
오늘 아침 문득 믿음에 대한 생각을 했다. 인류의 조상들 역시 의심이 꽤 많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특히 여자가 더 그랬을까. 하와는 아담이 사냥에서 돌아와 잠들었을 때 옆구리에 슬며시 손을 넣어 갈빗대 수를 세어보았다지, 혹시 이 남자가 남은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어 숨겨놓진 않았나 하는 의심 때문에. 그래, 어쩌면 의심은 신의 영역까지 침범하는 어리석음의 절정이다. 무엇엔들 눈깔이 뒤집히면 이성적인 생각이 제대로 들겠냐만....
남자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철딱서니 없는 이 여편네가 기생오라비 같은 남자에게 넘어가지나 않을까, 자기처럼 사냥은 못하지만 뱀같은 혀로 여자를 잘 꼬드기는 남자에게 폴짝 넘어가지는 않을까 의심하고 질투한다. 우리의 조상들이 어느 날 유난히 뜨거운 정사라도 마쳤던 것일까. 잠시 여자를 지키지 못한 사이 (아마도 잠을 잤거나 그랬겠지만) 숲 속을 촐랑촐랑 거닐던 여자는 뱀에게 결국 넘어가고야 만다. 의심의 반사작용은 현실로 우뚝 서기도 하는 법. 그러나 그게 어디 여자만의 탓인가. 여자를 지키지 못한 남자의 무책임과 방임에도 문제가 있지.
모든 부분이 그렇듯 믿음도 한계가 뻔 한 것 같다. 그래서 결혼서약을 할 때 성경책 위에 손을 얹는지. 하여간 인간은 그저 죽도록 사랑해야 할, 어쩌다 사랑 때문에 죽어도 좋아 하는 맘으로 포옹해야 할 존재일 뿐, 믿음은 오직 신의 영역에 속한 것이다. 내가 슬프지 않도록 깊이 신뢰하는 법을 훈련해야 하겠다. 누구를 만나 사랑을 해도 마찬가지일 테니, 나를 먼저 사랑하고 너를 믿어주는 노력을 경주하노라면 실수도 줄어들겠지.
어느 시인의 말처럼 ; "당신에 관한 좋은 것들만 상상합니다. 그래야만 다시 만날 때 새롭고 싱그럽게 대할 수 있으니까요." 라는 고백만이
당신과 나 사이에 남게 되기를……
2007년 3월, 오정자
봄과 여름을 착각한다. 오래전 아주 오래전, 스스로를 들볶아 댄 글색을 만나노라면 저 생각이 어느 계절에 찍혔던 생각인가, 헷갈린다. 자주 헷갈리지만, 몇 군데 길을 거쳐 처음을 찾아내곤 한다. 그 처음이란 게 과연 얼만큼 명확할까 의심하면서. 어느새 기독교적 우화를 배경으로 한 직선적 사고방식들이 많이 희미해졌다. 지금은 그냥 웃을 뿐이지만 7년 전에는 번뇌의 빛이 완연하다. 그러고 보니 나만큼 의심 많은 사람도 드물다 싶다. 아마 그때 누군가, 어느 시인인가가 내게 좋은 말을 귓속에 넣어 주었던 것 같다. 그 한 마디를 주기 위해 글 속에 농담 같은 비유를 사용했던 것 같다. 글 속에서 지금도 건지고 싶은 한 문장이 있다면 마지막 문장이겠지....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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