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 계단 / 김충규
우체국 앞의 계단에
나는 수신인 부재로 반송되어 온
엽서처럼 구겨진 채 앉아 있었다
빨간 우체통이 그 곁에 서 있었고
또 그 곁에는 늙은
자전거가 한 대 웅크려 있었다
여름의 끝이었고 단물이 다 빠져나간 바람이
싱겁게 귓불을 스치며 지나갔다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기 위하여
나는 편지 혹은 엽서를 안 쓰고 지낸 지
몇 해가 지났다
생각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애써 기억의 밭에 파종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길 건너편의 가구점 앞에서
낡은 가구를 부수고 있는 가구점 직원들,
그리움도 세월이 흐르면 저 가구처럼 낡아져
일순간 부숴버릴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낡은 가구처럼 고요하게 앉아 있었다
정 그리워서 미쳐버릴 지경에 이르면
내 이마에 우표를 붙이고 배달을 보내리라
우체국의 셔터가 내려가고 직원들이
뿔뿔이 흩어져 갔다 여름의 끝이었고
나는 아직 무성한 그리움의 계절을
맞이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시집 『그녀가 내 멍을 핥을 때』(문학동네, 2003) 중에서
김충규 1965년 경남 진주에서 출생. 서울예대 문창과 졸업. 1998년 《문학동네》 하계 문예공모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낙타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천년의시작, 2002), 『그녀가 내 멍을 핥을 때』(문학동네, 2003),『물 위에 찍힌 발자국』(실천문학사, 2006), 『아무 망설임 없이』(문학의 전당, 2010)가 있음. 1999년 제1회 수주문학상 우수상과 2008년 제1회 미네르바작품상. '문학의 전당' 발행인 역임. 2012년 3월18일 심장마비 증세로 타계.
죽은 나무는 죽은 나무가 아니다 / 차창룡
내 손은 나도 몰래 죽은 나무를 만지고 있었다
죽은 나무는 여인의 몸처럼 부드러웠으나
내 손이 닿자마자 앗 소롯해지는 것이었다
그녀의 몸속에서는 예쁜 벌레들이 꼬물거리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은밀한 깨달음을 얻고 있었다
죽은 나무가 죽은 채로 서 있어야 하는 이유는
사랑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음을
이파리와 꽃과 열매와 헤어졌다 해도
죽은 나무는 온종일 서서 기다리다 죽은 나무는
기다림이 벌레로 태어나 나비가 될 때까지
내가 죽어도 당신을 잊을 수 없음을 알 때까지
죽은 나무는 죽은 나무가 아니었다
새가 나무를 잠시 떠났다 해도 다시 돌아오고 마는 한
나무의 살 속에서 기다림이 낳은 벌레를 꺼내 먹는 한
월간 『문학사상』 2009년 8월호 발표
차창룡 1966년 전남 곡성에서 출생. 조선대학교 법학과와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1989년 《문학과 사회》 봄호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 199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 평론 부문에도 당선. 시집으로『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등이 있음. 제1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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