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시란 무엇인가 / 황지우
나는 시를, 당대에 대한, 당대를 위한, 당대의 유언으로 쓴다.
상기 진술은 너무 오만하다( )
위풍 당당하다( )
위험천만하다( )
천진난만하다( )
동자들은 ( )에 ○표를 쳐 주십시요.
그러나 나는 위험스러운가( )
얼마나 위험스러운가( )
과연 위험스러운가( )에 ?표 !표를 분간 못 하겠습니다.
부재의 혐의로 나는 늘 괴로와했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감시당하고 있는가( )
당신은 나를 감시하고 있는가( )
독자들이여 오늘 이땅의 신인은 어느 쪽인가( )
어느 쪽이어야 하는가( ) ○표 해 주시고 이 물음의 방식에도 양자택일해 주십시요.
한 시대가 가고 또 한시대가 왔지만
우리가 우리의 동시대와 맺어진 것은 악연입니다.
나는 풀려날 길이 없습니다 도저히, 그러나,
한 시대를 감시하겠다는 사람의 외로움의 질량과 가속도와 등거리도 양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죄의식에 젖어 있는 시대, 혹은 죄의식도 없는 저 뻔뻔스러운 칼라 텔레비젼과 저 돈범벅인 프로 야구와 저 피범벅인 프로 권투와 저 땀범벅인 아시아 여자 농구 선수권 대회와 그리고 그때마다의 화환과 카 퍼레이드 앞에,
노스탤지어 / 황지우
나는 고향에 돌아왔지만
아직도 고향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그 고향......무한한 지평선에
게으르게,
가로눕고 싶다;
印度, 인디아!
無能이 죄가 되지 않고
삶을 한번쯤 되물릴 수 있는 그곳
온갖 야한 체위로 성애를 조각한
사원; 초월을 기쁨으로 이끄는 계단 올라가면
영원한 바깥을 열어주는 문
이 있는 그곳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 황지우
초경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 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수위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廢人)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의혹을 향하여 / 황지우
스리지 뽑으러 창제 인쇄소엘 가면 시인 조태일 씨가 있다. 죠우 테일이요 좃태일이요?(통금 위반으로 나는 그와 종로 경찰서에서 우연히 만났었다)그는 국문의 역행 동화와 모음 축약 현상으로 자기 이름이 가끔 좃털이 된다고 너털웃음을 웃는다(확실히 우리말 사이시웃에는 끊고 싶은 푸른 칼날이 들어 있다). 한때 그는 양푼에 소주를 부어 밥말아 마셨다고 한다, (나는 질린다) 그는 씨름꾼같이 생겼다. 술에 취하면 자주 그는 신길동 집 옥상에 밤늦게 올라 별에게 삿대질을 하며(방점은 내가 찍는다) 고성 방가하였다. 그랬더니 (그가 나쁘다) 그의 이웃들이 반상회에서 그를 신고했다는데, 아무튼 그는 시를 쓰지 않는다. 그가 시를 쓰지 못한다는 것과 이 고성 방가가 어떤 관계를 갖는다고는 나는 생각지 않는다. 시인은 늙지 않으려면 빨리 죽어야 한다.
나는 창제 인쇄소 주조실에 있는, 머리털이 희끗한 말없는 김씨 할아버지가 좋다. 그분은 고분고분, 떨어져 나간 활자를 만든다. 불에 납이 녹는다. 타는 기름 냄새. (나는 그때 노예의 살갗에 불 붙는 문신을 보는 것 같았다) 오늘 김씨 할아버지는 물음표를 한 상자나 만들어 놓으셨다. 이게 몇 자쯤 되느냐고 물어도 그는 기계 소리 때문에 말을 듣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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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거울에 비추어 볼 것)
왜 그랬을까. 왜 그것이 낚시 같이 보였을까. 왜 나는 그것을 시라고 생각했을까. 거꾸로 숙이고 있다가 문득 우리의 확신과 의혹을 낚아채는, 우리의 아가미를 여지없이 낚아채는 그 이유를 나는 말 못 한다.
몹쓸 동경(憧憬) - 황지우
그대의 편지를 읽기 위해 다가간 창은 至福이 세상에
잠깐 새어들어오는 틈새 ; 영혼의 인화지 같은 것이 저 혼자
환하게 형광한다. 컴퓨터, 담뱃갑, 안경, 접어둔 畵集 등이
공중에 둥둥 떠다니고, 천장에서, 방금 날아간 새 깃털이 내려왔다.
이데올로기가 사라지니까 열광은 앳된 사랑 하나 ; 그 흔해빠진
짜증스런 어떤 운명이 미리서 기다리고 있던 아르노江다리
위를 하필이면 그때 그대가 절뚝거리면서 걸어올 게 뭔가?
이번 生에는 속하고 싶지 않다는 듯, 모든 도로의 길들의
맨 끝으로 뒷걸음질치면서 천천히 나에게 오고 있는
그대 보폭을 내 四柱八字의 시계가 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대는 주저하지 말라 ; 요즘 난, 지금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것, 생각을 바꿨다. 설렘이 없는 그 어떤 삶도
나는 수락할 수 없었으므로 매일 베란다 앞에 멀어져가는
다도해가 있다. 銀의 색소폰音을 남겨두고 나아가는 배여 ; 그대를
더 오래 사랑하기 위하여 그대를 보내었던 것. 맛탱가리 없는 세기
를 뚫고 나온 나에게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지루한 것이었다.
맞은편 여관 네온의 붉은 빛에 비추인 그대 속눈썹 그늘에 맺힌 것은
水銀의 회한이던가? 化膿과 재와 손금占이여, 재즈를 듣는 빈방이여.
<괴롭고 달콤한 에로스> ; 身熱은 이 나이에도 있다. 혼자 걸린
독감처럼, 목 부은 사랑이 다시 오려 할 때 나는 몸서리쳤지만,
이미 幸州山城을 덮으면서 넓어져가는 저 범람이 그러하듯
지금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 그대는.
이삿짐 트럭 뒤 거울에 스치고 있는 生을 두려워하지 말라.
축을 응시하면서 어지러워지는 수레바퀴에 뛰어들라, 망각하고
도취하라. 신화와 뽕짝 사이 사랑은 영원한 동어반복일지라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 어찌 삶을 견딜까. 성교 후
평범해져버렸다는 느낌이 들지 않게 사랑하는 것, 내 열광이 지른
불의 정원에서 그대 타지 않게 할 것, 그대를 그리워하기 위해
그대를 不在者欄에 놓을 것 ; 그리하여, 황혼의 물 속에서 삐꺽거리는
그라치에 石橋를 그대는 건너갔다. 대성당 앞에서, 돌의 멍멍한 和音
앞에서 나는 가족과 사교계와 대의와 죄를 후련하게 잊어버렸다.
水銀의 눈물을 잊고, 나는 그대 앞의 시계를 보면서 불침번을 선다.
그대 떠나고 없는 마을의 놀이터 그네에 앉아
한 남자가 이슬 내리는 새벽까지 흔들리고 있었다. 그렇다.
그것은 나의 소명받은 병이었다. 지구 위에 저 혼자 있는 것 같아요,
라고 쓴 그대 편지를 두 번째 읽는다.
황지우
◈ 본명 황재우
◈ 1952 전남 해남 출생.
◈ 1972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철학과(미학 전공) 입학. 문리대 문학회에 가입.
◈ 1973 문리대의 유신반대 시위에 연루되어 구속되어 강제입영.
◈ 1979 서울대 인문대 철학과(미학전공) 졸업 및 동 대학원에 입학.
◈ 1980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연혁>이 입선.
◈ 1980 계간 ≪문학과 지성≫에 시 <대답없는 날들을 위하여> 등을 발표하여 등단.
◈ 1980 광주 민주화 항쟁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
◈ 1981 광주 민주화 항쟁에 가담한 사유로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제적되어, 서강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 입학.
◈ 1983 시집'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로 『세계의문학』이 제정한 제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 1985 서강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 계간 『세계의문학』 편집위원
◈ 1991 현대문학사가 제정한 제36회 현대문학상 수상
◈ 1993 '뼈아픈 후회'로 문학사상사에서 제정한 제8회 소설시문학상 수상
◈ 1994 한신대학교 문창과 교수 재직
◈ 1995 조각전(학고재 화랑) 개최
◈ 1999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로 제1회 백석문학상 수상
◈ 대산문학상 수상
◈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이며, 미술평론가로도 활동 중이다
◈ <<시와경제>> 동인
◈ 주요 저서 목록
-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문학과지성사 1983
- 시집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민음사 1985
- 산문집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 한마당 1986
- 시집 <나는 너다> 풀빛 1987
- 시집 <게 눈속의 연꽃> 문학과지성사 1991
- 시선집 <구반포 상가를 걸어가는 낙타> 미래사 1991
- 시선집 <聖가족> 살림출판사 1991
- 시집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 학고재 1995
-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문학과지성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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