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황지우<청량리-서울대>외 3편

미송 2009. 7. 8. 07:09

청량리―서울대 /황지우
  

기껏 토큰 한 개를 내미는 나의 무안함을
너는 모르고
졸고 있는 너의 야근과 잔업을
나는 모르고
간밤엔 빤스 속에 손 한번 넣게 해준 값으로
만 원을 가로채간 년도 있지만
지금 내가 내민 손 끝에 光速의 아침 햇살, 빳빳하게
밀리고 있구나
참 멀리서 왔구나, 햇살이여, 노곤하고 노곤한 지상에,
그 햇살 받으며 빨간 모자, 파란 제복,
한남운수 소속, 너의 이름, 김명희
너의 가슴에 단
"친절·봉사"의 스마일 마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 나를
모성의 누이여 용서하라
나는 왜 이러는지 세상을 자꾸만
내려다보려고만 한다 그럴 적마다
나는 왜 그러는지 세상이 자꾸만
짠하고, 증오심 다음은 측은한 마음뿐이고, 아무리 보아도
그것은 수평이 아니다 승강구 2단에 서서
졸고 있는 너를 평면도로 보면
아버지 실직 후 병들어 누움,
어머니 파출부 나감,
남동생 중3, 신문팔이
生計는 고단하고 고단하다
뻔하다
빈곤은 충격도 없다
그것은 네가 게으르기 때문이다?
너의 아버지의 무능 때문이다?
너의 어머니의 출신 성분이 좋지 않아서이다?
네가 재능도 없고 지능도 없어서이지 악착 같고 통박
만 잘 돌려봐?
그렇다고 네가 몸매가 좋나 얼굴이 섹시하나?
TIME 誌에 실린 전형적인 한국인처럼, 몽고인처럼
코는 납짝 광대뼈 우뚝 어깨는 딱 벌어져 궁둥이는 펑퍼져
키는 작달
아, 너는 욕먹은 한국 사람으로 서서
졸고 있다
일하고 있다
그런 너의 평면도 앞에서
끝내는 나의 무안함도, 무색함도, 너에 대한 정치·경
제·사회·문화적 모독이며
나의 유사-형제애도, 너에 대한 정치·경제·사회·
문화적 속죄는 못 된다.
그걸 나는 너무 잘 안다
그걸 나는 금방 잊는다

 

 

徐伐,셔발,셔발,서울,SEOUL /황지우

張萬燮氏(34세, 普聖物産株式會社 종로 지점 근무)는 1983년 2월 24일 18:52 #26, 7,8,9......, 화신 앞 17번 좌석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간다. 귀에 꽂은 산요 레시바는 엠비시에프엠 "빌보드 탑텐"이 잠시 쉬고, "중간에 전해드리는 말씀," 시엠을 그의 귀에 퍼붓기 시작한다.

쪼옥 빠라서 씨버 주세요. 해태 보봉 오렌지 쥬스 삼배권!
더욱 커졌씁니다. 롯데 아이스콘 배권임다!
뜨거운 가슴 타는 갈증 마시자 코카콜라!
오 머신는 남자 캐주얼 슈즈 만나 줄까 빼빼로네 에스에스 패션!


보성물산주식회사 종로 지점 근무, 34세의 장만섭 씨는 산요 레시바를 벗는다. 최근 그는 머리가 벗겨진다. 배가 나오고, 그리고 최근 그는 피혁 의류 수출부 차장이 되었다. 간밤에도 그는 외국 바이어들을 만났고, "그년"들을 대주고 그도 "그년들 중의 한년"의 그것을 주물럭거리고 집으로 와서 또 아내의 그것을 더욱 힘차게, 더욱 전투적이고 더욱 야만적으로, 주물러 주었다. 이것은 그의 수법이다. 이 수법을 보성물산주식회사 차장 장만섭 씨의 아내 김민자 씨(31세, 주부, 강남구 반포동 주공아파트 11325동 5502호)가 낌새챌 리 없지만, 혹은 챘으면서도 모른 체해 주는 김민자 씨의 한 수 위인 수법에 그의 그것이, 그가 즐겨 쓰는 말로, "갸꾸로, 물린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가 그의 아내의 배 위에서, "그년"과 놀아난 "표"를 지우려 하면 할수록, 보성물산주식회사 차장 장만섭 씨는 영동의 룸쌀롱 "겨울바다"(제목이 참 고상하지. 시적이야. 그니?)의 미스 쵠가 챈가 하는 "그년"을 더욱 더 실감으로 만지고 잇는 것이다.
아저씨 아저씨 잇짜나요 내일 나제 아저씨 사무실 아프로 나갈께 나 마신는 거 사 줄래
커 죠티(보성물산주식회사 장만섭 차장은 '일간스포츠'의 고우영만화에 대한 지독한 팬이다)
잇짜나요, 그리구,
어쩌구 저쩌구 해서 오늘 장만섭 씨는 미스 쵠가 챈가 하는 여자를 낮에 만났고, 대낮에 여관으로 갔다. 그리고 1983년 2월 24일 19:08 #36, 7, 8, 8......, 그 장만섭 씨는 화신앞 17번 좌석버스 정류장에 늘어선 열의 맨 끝에 서 있다. 1983년 2월 24일 19:10 #51, 2, 3, 4...... 장만섭씨는 열의 중간쯤에 서 있다. 1983년 2월 24일 19:15 #27, 8,9...... 선진조국의 서울 시민들을 태운 17번 좌석버스는 안국동 방향으로 떠나고 장만섭 씨는 그 열의 맨 앞에 서 있다. 그의 손에는 아들, 장일석(6세)과 딸, 장혜란(4세)에게 줄 이.티 장난감이 들려져 있다. 보성물산주식회사 장만섭 차장은 무료했다. 그는 거리에까지 들려 나오는 전자 오락실의 우주 전쟁놀이 굉음을 무심히 듣고 있다.

숑숑숑숑숑숑숑숑숑숑숑숑숑숑숑숑숑
띠리릭 띠리릭 띠리리리리리리릭
피웅피웅 피웅피웅 피웅피웅피웅피웅
꽝!ㄲ ㅗ ㅏ ㅇ!
PLEASE DEPOSIT COIN
AND TRY THIS GAME!
또르르르륵
그리고 또다른 동전들과 바뀌어지는
숑숑과 피우피웅과 꽝!


그리고 숑숑과 피우피웅과 꽝!을 바꾸어 주는, 자물쇠 채워진 동전통이 주입구(이건 꼭 그것 같애, 끊임없이 넣고 싶다는 의미에서 말야)에서,
그러나 정말로 갤러그 우주선들이 튀어 나와, 보성물산주식회사 장만섭 차장이 서 있는 버스 정류장을 기총 소사하고, 그 옆의 신문대를 폭파하고, 불쌍한 아줌마 꽥 쓰러지고, 그 뒤의 고구마 튀김 청년은 끓는 기름 속에 머리를 처박고 피흘리고, 종로 2가 지하철 입구의 戰警 버스도 폭삭, 안국동 화방 유리창은 와장창, 방사능이 지하 다방 "88올림픽"의 계단으로 흘러내려가고, 화신 일대가 정전되고, 화염에 휩싸인 채 사람들은 아비규환, 혼비백산, 조계사 쪽으로, 종로예식장쪽으로,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쪽으로, 우미관 뒷골목 쪽으로, 보신각 쪽으로
그러나 그 위로 다시 갤러그 3개 편대가 내려와 5천 메가톤급 고성능 핵미사일을 집중 투하, 집중 투하!

짜 자 잔
GAME OVER
한다면,

 

 

 

재앙스런 사랑/ 황지우

 

용암물이 머리 위로 내려올 때
으스러져라 서로를 껴안은 한 남녀;
그 속에 죽음도 공것으로 녹아버리고
필사적인 사랑은 폼페이의 돌에
목의 힘줄까지 불끈 돋은
벗은 生을 정지시켜 놓았구나

이 추운 날
터미널에 나가 기다리고 싶었던 그대,
아직 우리에게 體溫이 있다면
그대와 저 얼음 속에 들어가
서로 으스져라 껴안을 때
그대 더러운 부분까지 내 것이 되는
재앙스런 사랑의
이 더운 옷자락 한가닥
걸쳐두고 싶구나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한 말은
아무리 하기 힘든 작은 소리라 할지라도
화산암 속에서든 얼음 속에서든
하얀 김처럼 남아 있으리라

 

 

 거울에 비친 괘종시계 - 황지우

 

  나, 이번 生은 베렸어
  다음 세상에선 이렇게 살지 않겠어
  이 다음 세상에선 우리 만나지 말자
  ......

  아내가 나가버린 거실;
  거울 앞에서 이렇게 중얼거리는 사나이가 있다 치자
  그는 깨우친 사람이다
  삶이란 게 본디, 손만 댔다 하면 中古品이지만
  그 닳아빠진 품목들을 베끼고 있는 거울 저쪽에서
  낡은 괘종시계가 오후 2시를 쳤을 때
  그는 깨달은 사람이었다

  흔적도 없이 지나갈 것

  아내가 말했었다 "당신은 이 세상에 안 어울리는 사람이야
  당신, 이 지독한 뜻을 알기나 해?"
  괘종시계가 두 번을 쳤을 때
  울리는 실내: 그는 이 삶이 담긴 연약한 膜을 또 느꼈다
  2미터만 걸어가면 가스 밸브가 있고
  3미터만 걸어가도 15층 베란다가 있다

  지나가기 전에 흔적을 지울 것

  괘종시계가 들어가서 아직도 떨고 있는 거울
  에 담긴 30여 평의 삶: 지나치게 고요한 거울
  아내에게 말했었다: "그래, 내 삶이 내 맘대로 안 돼!"

  서가엔 마르크시즘과 관련된 책들이 절반도 넘게
  아직도 그대로 있다
  석유 스토브 위 주전자는 김을 푹푹 내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