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나처럼 살지 말아라 / 박노해
아버지,
술 한 잔 걸치신 날이면
넌 나처럼 살지 말아라
어머니,
파스 냄새 물씬한 귀갓길에
넌 나처럼 살지 말아라
이 악물고 공부해라
좋은 사무실 취직해라
악착같이 돈 벌어라
악하지도 못한 당신께서
악도 남지 않은 휘청이는 몸으로
넌 나처럼 살지 마라 울먹이는 밤
내 가슴에 슬픔의 칼이 돋아날 때
나도 이렇게는 살고 싶지 않아요
스무 살이 되어서도
내가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꿈을 찾는 게 꿈이어서 억울하고
어머니, 당신의 소망은 이미 죽었어요
아버지, 이젠 대학 나와도 내 손으로
당신이 꿈꾸는 밥을 벌 수도 없어요
넌 나처럼 살지 마라, 그래요,
난 절대로 당신처럼 살지는 않을 거예요
자식이 부모조차 존경할 수 없는 세상을
제 새끼에게 나처럼 살지 마라고 말하는 세상을
난 결코 살아남지 않을 거예요
아버지, 당신은 나의 하늘이었어요
당신이 하루아침에 벼랑 끝에서 떠밀려
어린 내 가슴 바닥에 떨어지던 날
어머니, 내가 딛고 선 발밑도 무너져 버렸어요
그날, 내 가슴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공포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상처가 새겨지고 말았어요
세상은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고
그 어디에도 기댈 곳도 없고
돈 없으면 죽는구나
그날 이후 삶이 두려워졌어요
넌 나처럼 살지 마라
알아요, 난 죽어도 당신처럼 살지는 않을 거예요
제 자식 앞에 스스로 자신을 죽이고
정직하게 땀 흘려온 삶을 내팽개쳐야 하는
이런 세상을 살지 않을 거예요
나는 차라리 죽어 버리거나 죽여 버리겠어요
돈에 미친 세상을, 돈이면 다인 세상을
아버지, 어머니,
돈이 없어도 당신은 여전히 나의 하늘입니다
당신이 잘못 산 게 아니잖아요
못 배웠어도, 힘이 없어도,
당신은 영원히 나의 하늘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다시 한 번 예전처럼 말해주세요
나는 없이 살아도 그렇게 살지 않았다고
나는 대학 안 나와도 그런 짓 하지 않았다고
어떤 경우에도 아닌 건 아니다
가슴 펴고 살아가라고
다시 한 번 예전처럼 말해주세요
누가 뭐라 해도 너답게 살아가라고
너를 망치는 것들과 당당하게 싸워가라고
너는 엄마처럼 아빠처럼 부끄럽지 않게 살으라고
다시 한 번 하늘처럼 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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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처럼 살지 말라”는 말, 자라면서 참 흔하게 들었던 말 아닌가요? 고단한 일과를 마치고 술에 취해 들어오신 아버지에게서 혹은 제사나 시집행사에서 종일 일하다 지친 어머니에게서 “너는 나처럼 살지 말라”며 들어가 공부하라는 말 들어보신 적 없으신가요? 젊은 세대는 그런 부모의 희생에 힘입어 단군 이래 유래 없는 고학력 세대가 되었습니다. 세계최고 수준의 대학진학률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죠. 하지만 늘어난 대학과 대학진학률만큼 양질의 일자리가 함께 늘어나지 못해서 청년실업률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자기소개서를 쓰다가 이 시를 보고 울었다는 댓글이 많은 추천을 받은 것을 씁쓸하게 바라보았습니다. <최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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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마지막 연 부터 위로 두 연은 빼도 좋겠다. 설명이 누절해져 시적 미각을 둔감하게 한다. 물론 쓸 말 할 말 다 하면 시인은 속 시원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시인의 개혁적이자 개혁적이지 못한 시의 장단점을 본다. 이야기가 사라져 사는 요즘에 반하려고 아이들 수업 중에 자기가 지어낸 이야기든 기억나는 이야기든 아무 이야기든 해 봐라 했다. 아이들은 주로 무섭다가 끝에 가서 웃기려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앞서 삼천년 묵은 멸치대왕 이야기를 들려줬는데 세 팀 중 유일하게 여중생 한 명과 초딩 2학년 남자 아이만 기대한 만큼 웃었을 뿐, 나머지 아이들은 해학이 깃든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속으론 공포를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설상가상 한 사춘기 여자아이는 '엄마를 죽여 버렸어요'로 이야길 마쳤다. 중앙 지원센터 홈에 일지를 타이핑하며 고민이 좀 되었다.
다시 들어가 익명이지만 그 아이에 대한 기록을 삭제할까 고민을 한다. 숙제로 남기기로 한다. 존속살인의 심리. 그러나 성급히 단정 짓지 말자고 도닥인다. 그 아이는 그것이 문제인데요, 하며 아이들 주변의 상담사들은 내게 문제 중심의 아이를 자꾸 내어놓는다. 당신은 교사로서 어떻게 아이를 보실 것입니까, 아이의 문제를 어떻게 도와줄 것입니까, 시시때때로 과제를 던져주는 것이겠지. 글쎄, 아이들만의 문제이겠습니까, 가 나의 기본 생각이다. 아이들을 문제 있음을 전제로 보고 싶지 않습니다, 가 나의 기본 대답이다. 공부 좀 못하고 책 좀 더듬거리고 읽으면 어떤가, 공부 많이 하면 뭐에 쓸 건데, 사기 치는 일 뿐이 더 하겠냐, 하는 아주 원초아(id)적이고 무식한 사고방식. 이것은 새벽의 시인만큼 개혁적이자 개혁적이지 못한 나의 사고의 일면이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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