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이승희 <여름에게 하고 싶은 말>

미송 2015. 11. 8. 09:30

 

 

여름에게 하고 싶은 말 / 이승희

 

허리춤에서 꽃 무더기라도 필 생각인지 새삼 잊었던 기억이 몸이라도 푸는지 녹색의 살들이 늘어질 대로 늘어져서 팽팽해지는 오후 녹색의 말굽들이 총알처럼 날아다니며 횡설수설 나를 잡아당긴다 슬플 겨를도 없이 구석을 살아온 내게 어떤 변명이라도 더 해보라는 듯 여름은 내게 베고 누울 저승을 찾으라 한다 구름 사이로 모르는 사람들이 환하게 웃는다 누구의 유족인가 싶은데 문상 차림치고는 너무 설레는 표정이다 큰 나무 뒤에서 혼자 늙어가는 개복숭아는 제 식구들을 욱욱 게워내고 있다 다 늙은 채 땀을 뻘뻘 흘리면서 무엇을 먹는 건지 게워내는 건지 나는 못 본체 지나간다 그렇게 몇 개의 골목을 지나면서 생각한다 어디쯤에서 그늘을 오려내고 그 자리에 숨어 이 계절을 지나가야 하는지 오려낸 자리마다 더 깊은 변명이 부글부글 끓어도 함께 썩어가자고 엎드려 울기나 하자고 이 세상 모든 꽃이 유족처럼 나를 향해 필 때까지 나는 캄캄한 사연을 말하지 않으려는 중이다

격월간 시사사20157~8월호 발표

 

 

이승희 시인

 

1965년 경북 상주에서 출생. 1997시와 사람집에 오니 집이 없고당선,

1999경향신문신춘문예 시부문에 풀과 함께가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창비, 2006)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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