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김중일 <국경꽃집의 일일>

미송 2015. 12. 7. 10:12

국경꽃집의 일일  

 

1

잠깐 엎드려서 낮잠을 자고 있었어 꿈결인가......느 익숙한 손길이 내 둥글게 구부러진 등과 어깨를 흐느끼며 거칠게 잡아흔드는 거야 도대체 뭐지 눈을 떴을 때 나는 국경꽃집 카운터에 앉아 있었어

 

2

지독한 향기의 꽃들이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었어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지 창밖으론

창문을 깨고 폭발할 듯 빽빽한 안개꽃이 피어 있었고 모르긴 몰라도 그때 국경꽃집 굴뚝 위로 튤립처럼 예쁜 해가 그 빨간 봉오리를 막 터뜨리려 하고 있었을 거야 그건 그렇고 나를 깨운 검은 그림자가 다 시들어가는 꽃다발을 내 코앞에 들이밀고 있었어 그 지독한 냄새 때문에라도 일단 나는 꽃다발을 받아들어야 했지 그러자 그 사내는 빠르고 거침없이 선반 위에 놓여 있던 카빈 소총하나를 꺼내 철거덕 장전하곤 새벽안개 속으로 녹아들어버렸어 당신이 가져온 이 형펀없는 꽃다발이 완전히 시들 때까지 그 물건을 한 발이라도 사용하려면 서둘러야 할 거야 미처 충고하기도 전에 말이야 밤새도록 고개를 축 숙이고 서서 골목을 밝히던 해바라기들이 일제히 동터오는 하늘로 천천히 얼굴을 쳐들고 있었지

 

3

국경꽃집은 꽃을 파는 곳이 아니었던 거야 거대한 꽃들의 전당포 담보로 맡긴 꽃이 시들기 전에 빌려간 무

기를 사용하고 반납해야 하는 곳이었지 나는 꽃집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각양각색의 무수히 많은 꽃들을 두려운 눈으로 둘러봤어 내가 어쩌다가 그곳을 지키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지독히도 추운 곳이었어 나는 벌벌 떨면서 끝내 찾아가지 않고 얼어버리거나 스러질 듯 말라버린 꽃다발 하나를 벽난로 속에 던져넣었어 불길 속에서 빨갛게 다시 피어나는 그 화력이 잠시잠깐 나의 몸을 녹여 주었지 신기한 건 인수인계 한 번 받은 적 없는 내가 너무나 익숙하게 그 불길을 이용해 일본도를 담금질했다는 거야 어느새 텅 비어버린 선반을 채워넣어야 했거든 그렇게 완성된 물건을 진열하다가 선반 한구석에서 꽃잎처럼 작은 쪽지 하나를 주웠어 그 쪽지에는 아주 익숙한 그러나 누구의 것인지 기억나지 않는 필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어 우리 다음에 국경꽃집에서 만나 국화차나 한잔해요 나는 그 쪽지를 바스러질 듯 마른 꽃다발과 함께 벽난로 속으로 던져넣었지 그런데 이상하지 그냥 눈물이 났어 서쪽 능선으로 동백처럼 붉은 석양이 막 떨어지고 있었어

 

4

화들짝 눈을 떴을 때 내 앞에는 새벽에 사내가 가져온 꽃다발이 놓어 있었어 세상에 내 옆으로 옆으로 꽃다발들이 줄지어놓여 있는 거야 어두운 묘비를 간판 대신 내다 건 이곳은 꽃들의 전당포가 가득 들어선 곳 황급히 셔터를 내리고 지금이라도 나는 날 단 한번만이라도 따뜻하게 안아보려 했어 하지만 이미 나의 팔은 나를 안아주지 않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