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김승일 <9시간 동안 읽어야 하는 시>

미송 2016. 1. 1. 10:01

 

9시간 동안 읽어야 하는 시 / 김승일

 교양 잡지를 읽고 있었다 거기서 어떤 시를 보았다 83쪽에 있었다 제목이 9시간 동안 읽어야 하는 시였다 시가 무척 길었기 때문에 나중에 읽기 위해 페이지를 넘겼다 그러자 9시간 동안 읽어야 하는 시를 읽지 않고 읽으면 이해할 수 없는 시라는 제목의 시가 있었다 그다음 장에는 9시간 동안 읽어야 하는 시를 읽지 않고 읽으면 이해할 수 없는 시를 읽지 않았다면 이해할 수 없는 시가 있었다 그는 그가 이러한 말장난을 왜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가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러나 나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9시간 동안 읽어야 하는 시를 타이핑해 보았다 그 시를 타이핑하는 데 5분 정도 걸렸다


월간 유심20147월호 발표

 

 

인터넷 가계부에 밀린 수지 내역도 기입해 올려야 하고, 난방비 간당간당 회계보고서도 작성해야 하고, 신년부터 굶을 수 없으니 아침밥도 해야 하고, 이월된 아이들 사진도 검토해야 하고, 하는, 이런 실정을 시라고 모를 리 없겠으나, 시는 정작 모른다. 이런 현실을 개 무시하고 또 시를 읽으려는 민들레 순정을. 이렇게 말하면 또 뭐하나, 물불을 안 가리고 닮게 쓰거나 냉큼 가져오거나 미련하게 베껴쓰거나 거기서 거기인 시들이, 독자는 둘째 치고, 시인들마저 식상한다 고 떠나려 드는 걸. 시를 대하는 보편적 독자의 입장이라고는 말 못하겠으나, 하나의 입장쯤은 이렇다 하는 말이다. 식상해서 떠나려 하는 걸girl, 소녀들은 떠나고 할머니들만 남아라, 하는 거칠은 목소리. 나야말로 왜 이런 이해할 수 없는 타이핑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바쁜 시간대에. 이것도 미친 짓. 그래도 9시간 동안 읽어야 이해가 될까 말까 하는 시를 읽느니 차라리 이런 타이핑이나 하는 게 낫지, 갈수록 태산인 태산만 바라보는 것 보다야 훨 낫지, 하는 심사일 것이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