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이성복<그날>

미송 2016. 12. 27. 22:35

 

 

그날 / 이성복

 

그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 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 치는 노인과 변통(便桶)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을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시인의 그날을 풍경처럼 바라보다 문득 나도 그날을 쓰고 싶어지는 건 무슨 연유일까. 뭔가 울컥해지는 순간, 그날이 그날이 아니다. 그날이다. 그날 난 정말 죽고만 싶었어, 언니를 갖고 싶을 정도로 외로웠어, 그러나 그날은 무심히 스쳐 갔네. 고해성사라도 해야 할 듯 잠근 마음을 올올히 풀어헤쳐야할 듯, 일상같은 화근들을 조근대는 시인. 그렇고 그런 사람들. 그렇고 그런 날들. 시간의 파편들 그리고 다시 또 무심히 보내야 할 그날들이 그날그날 흘러가고 있다. 그 많던 날 중 너의 신음을 제대로 들었던 날은 몇 날일까. 그날 우리에겐 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