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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미송 2021. 12. 26. 17:55

 

 

 

 

보통의 존재로 충분히 행복할 것

 

어린 시절, 차를 타면 언제나 해가 나를 따라온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언젠가 세일러문 정도의 마법소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물론 성인이 되어서도 이런 생각을 계속 한다면

중증의 과대망상 판정을 받기 딱 좋을 것이다.

그래도 나이를 먹으면,

악의 무리로부터 세상을 구하는 영웅은 아닐지라도

어딘가 특별한 어른이 되어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평범한 어른으로 자라났다.

화려한 삶도 아니며, 무한의 자유를 누리지도 않는다.

여전히 소고기는 마음껏 사 먹기 어렵고,

좁은 생활 반경 속에서 멋없는 일상은 반복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평범한 어른 중에 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지점,

어린 시절 내가 품었던 이상을 떠나보내는 지점

어른의 사춘기는 그 지점에서 오는 게 아닐까.

 

물론 그 순간이 슬프고 씁쓸하기는 하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환상과 기대감에서 벗어나

특별하지 않은 보통의 존재로서 자신의 삶을 꾸리는 것,

어른의 숙제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앞으로도 세일러문이 돼서 지구를 구할 일도,

소로본 대학의 교수가 될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나의 동창들이 내 소식을 듣고

배가 아파 복통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친척들이 가문의 영광이라며 나를 우러러 보는 일도 아니다.

대신 내겐 쓰고 싶은 글이 있고,

조금 더 잘 해보고 싶은 그림과 디자인 일이 있다.

가족과 시간을 더 보내고 싶고,

수영을 배워서 바다에서 마음껏 시간을 보내고 싶고,

다양한 관점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며 나의 세계를 확장하고 싶다.

 

내 삶에는 많은 제약이 있고, 보장된 것은 없지만

특별하지 않은 보통의 삶에도 허락된 많은 것들이 있다.

 

어른의 사춘기는 자신의 평범함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삶을 채울 수 있을 때 종결되는 것이며

 

우리는 그 순간

진짜 어른이 될 것이다.

 

p50

 

 

나를 평가할 자격을 주지 않을 것

 

예전에 친구가 소개팅을 했던 남자는

친구에게 좋아하는 운동이 있냐고 물으며 골프나 승마 같은 건 안 좋아하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건 사실 취미가 아닌 상대의 경제력을 가늠하기 위한 질문.

 

남자든 여자든, 이성의 경제력을 보는 게 나쁜 건 아니다.

나 역시도 분명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먹고사는 문제를 무시할 수 없는 것과 쉴 새 없이 계산기 두드리는 소리를 내며,

사람의 모든 걸 숫자로 환원시키는 건 좀 다른 문제다.

 

사는 집을 확인하고 연락이 없었다는 사람,

부모님 직업을 확인하는 것에 모든 대화를 쏟는 사람,

그런 상대들 앞에서 누군가는 답안지를 제출한 아이처럼

상대가 나에 대해 내릴 평가에 불안하다고 했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리 불안해 할 필요가 있을까?

 

내 경우를 말하자면 아무리 능력 있다 해도

숫자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사람은

삶의 기쁨이 너무 단출한 것 같아서 전혀 섹시하지 않다.

한마디로 내 취향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에겐 내가 자격미달이겠지만

그 사람도 내겐 자격미달인 거다.

내게 필요한 건 나와 닮은 단 한 사람일 뿐이지

그들이 아니며, 그들만 나를 평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 만약 누군가 나를 숫자로 평가한다면?

 

놀구 있네. 니들은 어차피 다 탈락이야, 이것들아.

 

p52

 

 

진짜 나 자신을 대면할 것

 

누군가를 싫어한다는 건 꽤 피곤한 일이기에,

학창 시절, 내 고민은 싫어하는 친구가 계속 생기는 것이었다.

 

한번은 고등학교 때 한 친구와 싸웠는데,

그 친구와 나는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신 성적에 들어가는 동아리 장을 하고 싶어 했던 친구는

선생님에게 가서 동아리 장을 하고 싶다고 말한 뒤,

내겐 선생님이 먼저 시켰다고 거짓말을 했다.

 

나는 그런 친구가 이기적이라고 느꼈다.

그런 몇몇 가지 일이 쌓인 후 나는 그 친구와 멀어졌고

그 뒤로 그 친구를 보면 노골적으로 싫은 내색을 했다.

 

나이를 먹고 그때의 나를 떠올리며

왜 굳이 싫은 티를 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면 그냥 멀어지면 그만인데 말이다.

하지만, 내가 철이 없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친구는 좀 싫어할 만한 면이 있었고,

누군가를 싫어하는 건 인간적인 범위 안에 들어가는 실수라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과거를 곱씹다가

나의 잘못은 언제나 인간적인 실수 안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왜 그 친구의 잘못은 인간적인 실수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사실 이기적인 마음이야 누구나 있고

당시의 내가 철이 없던 거라면

그 친구 역시 그저 철이 없던 건데 말이다.

 

그동안 나는 내가 좋아하는 면들만 나라고 생각했다.

이기적인 친구를 욕하며

나는 이기적인 면이 없는 완전한 사람처럼 굴었고,

내가 좋아하지 않는 나의 다른 면들이 드러날 땐

못 본 척, 모른 척 지나갔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면들은 내가 아닌 척 위장했던 거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얼마나 오만했는가.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칼 구스타브 융은 개인이 숨기고 싶어 하는

성격의 총합을 그림자라 이야기하며, 누구나 그림자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림자는 완전히 제거될 수 없으며

건강한 내면을 갖기 위해서는 그림자와 화해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했다.

 

우리는 한 사건에 대하여 한 가지 감정만 갖는 게 아니며

누구나 인정하기 싫은 찌질함과 이기적인 마음, 흑역사가 있다.

그런데 내면의 그림자가 보기 싫다고 인정하지 않으면

자기 개념은 뒤죽박죽이 되어

진짜 자신을 인식할 수 없게 되고 통제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보다 건강한 내면을 키우기 위해서는

자신의 부족한 모습까지 자각하고 수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니 자신의 싫은 면들도 인정하자.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만날 때

감춰둔 욕망의 허용치를 둘 수 있고

그 허용치만큼 자신에 대해서도

그리고 타인에 대해서도 관대해질 수 있다.

 

외면과 변명을 멈추고

내가 좋아하는 나와 내가 싫어하는 내가 통합된

진짜 자기 자신을 대면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오만한 인간이 아닌,

인간적인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누군가가 완벽하지 않아서 싫어하지 않는다.

완벽한 척하는 그 오만함에 질리는 거다.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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