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의 시 / 최종천
이시영 시집 『은빛 호각』 제대로 읽기
이시영 시집 『은빛 호각』은 보이지 않는 고귀한 미덕을 지니고 있다. 그 미덕이란 철학에서는 현상학이 지속적으로 탐구해온 것이기도 하고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에서도 나타나는 것으로 이른바 실재(實在)에 대한 관심이다. 이시영 시인은 「비유의 시」라는 단 한 편의 시를 빼고 모든 시편에서 비유나 메타포 혹은 은유가 아닌 실제로 있었던 일들을 시로 채용함과 동시에 은유와 메타포로 쓴 단 한 편의 시에 「비유의 시」라는 제목을 붙여 이 시집의 제작 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도 모르게 허구인 예술에 대하여 회의를 가지고 있다고 감히 짚어볼 수가 있을 것이다.
실재에 대한 관심은 진리를 추구하는 데서 비롯한다. 관념을 조작하는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들, 아름다움, 사랑, 행복, 평화, 희망, 천국 등 하나같이 실재가 아닌 비실재(非實在)의 것들이며 따라서 그 가치들은 실재해야만 비로소 진리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모든 종교적 이데올로기와 지금까지 인간이 펼쳐놓은 철학이나 사상 이 모든 것이 포함된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책으로 읽은 것이며 집집마다 상당한 공간을 차지하고 귀하게 관리되고 있다.
그러나 그 중에 어떤 사상이나 철학을 우리 인간이 실천하여 실재하게 한 적이 있었던가? 인간의 말과 글로만 했을 뿐 그 많은 사상과 철학을 우리는 실제 생활에서 밥솥이나 밥숟갈 같은 도구처럼 써먹은 적이 있었던가, 하는 반성이 곧 실재에 대한 지향성이다. 실재를 지향하는 의도가 담긴 시집을 읽는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시집 『은빛 호각』이 지닌 미덕을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부득이하게 예술철학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실재와 실체, 비실재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예술이 실재하는 것인가에 대한 고뇌에 찬 고찰을 하고 있다. 그는 농부의 작업신발을 그린 고흐의 그림을 예로 들면서 “모든 예술작품들은 이러한 사물적 측면을 갖는다. 사물적 측면 없이는 작품은 존재할 수 없다”라고 한다. 작품이란 인간의 관념을, 자연사물을 취하여 형상화한 것이기 때문에 관념이 작품으로 형상화하면 일단 작품은 하나의 실체로서 즉 하나의 사물로서 등장하는 것이다. 작품이 다만 하나의 사물로 한정된다면 그게 바로 실체이자 실재가 되는 것이다. 작품이, 작품이 아니고 다만 하나의 사물이라면 우리 인간의 생활도구나 용품으로 사용할 수가 있으며 인간의 생활과 함께 함으로써 실재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 그림이 하나 있다. 이것은 어떤 인간의 관념의 몸이다. 이렇게 몸체가 있는 것은 그것이 자연사물이든 제작한 것이든 모두 실체다.
하이데거는 앞에서 작품이 사물로서 취급받는 현실을 말한다.
“그림은 사냥꾼의 총이나 모자처럼 벽에 걸려 있고 또한 예를 들어 한 켤레 농부의 구두를 그린 고흐의 그림은 이 전시회장에서 저 전시회장으로 옮겨지고 있다.”
“예술작품 가운데 존재하는 사물적 측면은 부동의 사실이기에, 우리는 차라리 거꾸로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림이 물감 가운데 존재하고 (중략) 음악 작품이 음향 가운데 존재하고. 이에 대해서는 모두가 명백한 사실이라고 수긍할 것이다.”
여기서 하이데거가 말하고 있는 예술작품의 사물적 측면이라는 것은 물론, 작품이 예술로 취급받는 경우에 반대되는, 다만 하나의 사물로서 취급받는 경우를 말한다. 예술작품은 이미 하나의 실체가 되어 있고 따라서 일정한 공간과 시간을 차지하고 있으며 보존 관리되어야 한다. 그리고 작품의 사물적 측면이 아닌 예술적 측면이 곧 작품의 비실재적인 것이 된다. 작품이 감상자 없이 그냥 걸려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실체로서의 사물이다. 그러나 누군가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면 그제서야 비로소 예술적 측면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때 그 작품은 그러나 비실재가 된다.
하나의 작품이 왜 감상하는 동안에는 실재가 아닌 비실재가 되는가. 그 이유는 이렇다. 감상자와 작품 사이에 오가는 것은 일종의 환상이거나 환영이다. 모든 예술작품은 감상자에게 환상이나 환영을 제공한다. 이것이 우리가 감동이라고 하는 것의 내용이다. 동시에 예술을 예술이게 하는 원리이다. 한 켤레의 구두를 만들 때 소용되는 재료들은 그 자체로 구두에 적용된다. 생산된 구두에서 여전히 가죽은 가죽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하나의 구두를 그린 그림에 사용된 재료들은 이미 그 자체의 독립성을 잃어버린다. 이 이유는 그림이 감상자에게 환상이나 환영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생산과 창조의 다름이 이것이다.
“왜냐하면 환영이란 하나의 중요한 원리, 결정적인 원리요, 이 원리에 따라 예술적 추상화는 우리가 과학적 추상화에 도달함에 사용하는 것 같은 어떤 보편화의 과정도 없이 성취되기 때문이다.” (쑤전 K. 랭거 『예술이란 무엇인가』)
과학이 다루는 대상들은 실재하는 것이다. 때문에 과정의 맥락을 알 수가 있다. 예술이 다루는 대상은 인간의 관념이다. 고로 과정은 있을지라도 두뇌 속에서 순간적으로 처리되어 작품에 반영되는 것이지, 과정 자체가 현실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 외의 이유는 평범한 것이다. 인간은 항상 인간의 필요 즉 부를 생산하는 노동을 하듯이 예술을 감상하고 있거나 창작하고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다른 이유는 더 근원적인 것으로 이렇게 전문적으로 제작되는 작품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인간의 생활 속에서는 예술이 저절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시영 시인의 시집에 등장하는 실재들이 바로 그런 것이다.
작품의 사물적 측면이 아닌 예술적 측면이 비실재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는 하이데거의 다음과 같은 말에 나타난다. “예술작품은 제작된 사물이기도 하다. 그것은 또한 단순한 사물과는 달리, 다른 어떤 것을 말하고 작품이 말하는 어떤 다른 것이란 우리가 그 작품을 감상할 때에만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예술작품의 직접적이며 충분한 현실성에 접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이것이 가능한 때에야 예술작품 가운데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예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우선 작품의 사물적 측면에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예술작품의 직접적이며 충분한 현실성이 바로 실재성이다. 예술이 무엇인가를 바로 알려면 작품이 지니고 있는 사물성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이라는 관념은 작품이라는 사물이 되지 않고는 표현될 수가 없다.
“현상하는 것들뿐 아니라 물 자체와 같이 현상하지 않는 것들 모두가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이 철학용어로는 사물이라 불린다.” 여기서 현상하는 것들이란 바로 앞의 문장에서 예로 들고 있는 길가의 돌이나 흙덩이 항아리 등을 말하는데 이것이 내가 실체라고 규정하는 것들이며, 현상하지 않는 것들이란 내가 비실재로 규정하고 있는 것으로, 하이데거의 앞의 문장에서 “우리가 심지어는, 구체적으로 셀 수 있는 것들처럼 스스로의 모습을 나타내주지 않는 것”이라고 서술하는 것들이다. 이것들이 바로 예술이나 희망 사랑 평화 행복 따위 인간의 관념이 설정한 표상들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우리도 알다시피 추상명사로 되어 있으며 고로 그 개념의 외연은 없고 인간의 관념이 채우고 있는 내포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이나 심판과 같은 마음속에 있는 궁극적인 것들까지 사물이라고 부를 수는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사물은 여타의 사물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문장에서 마음속에 있는 것이란 물론 실재의 것이며 여타의 사물이란 실체를 가진 것을 포함한 비실재하는 것들이다. 실재하는 것들이란 실체가 없으나 인간 사이에 실지로 항상 적용됨으로써 인간의 존재를 규정하는 요소들을 말한다. 우선 도덕적 체계가 있고 정치체계도 그렇다. 교통법규로 규명되고 있는 교통체계도 이에 속할 것이다. 이런 것은 몸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실재이다. 이를 하이데거는 앞에서 인용한 문장에 이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경우의 사물이란 전체적으로 보아서 무(無)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물과 예술 작품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예술작품 역시도 그것이 존재하는 한 사물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하이데거의 사유는 섬세하게 진행되어 적절한 예를 들어 분별하고 있는데 “물론 우리는 힘에 부치는 숙제를 하고 있는 어린 소녀를 어린 것(사물)이라 부르기는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어린 소녀는 아직 인격을 완전히 갖추었다고 보기 어렵고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 때문에 사물로 본다는 것이다. 이를 하이데거는 소녀가 인간적 존재방식을 결하고 있고, 소녀 가운데서 강요되는 사물적 측면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서 소녀는 그가 예술의 등가로 등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사물과 예술작품의 비교 분석에 이어 그는 도구와 예술작품의 비교 분석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필요에 의해 도구를 만들고 그 제작과정은 예술작품 제작과 같다. 내 생각으로는 이 과정이 참 예술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표상은 비실재이며 비실체이기 때문이다. 이 표상들을 실재화 내지는 실체화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수행하는데, 이것이 과정을 이루고 이 과정 가운데서 목적이 실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렇게 과정적인 존재이다. 인간의 정신은 인간 육체의 밖에 존재하며 따라서 인간은 그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한다. 자연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대상을 가지지 않고 그 자신이 대상이기 때문에 자연인 것이다. 대상과 인간의 관계에서 인간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행한 모든 과정의 결과는 인간에게 되돌아온다. 그 이유는 생물학적인 것으로 인간이 진화상의 먹이사슬에서 맨 나중에 나타나는, 즉 먹이사슬의 맨 위를 차지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그 모든 것을 감내해야 한다. 그래서 아름다움이란 우리 가까스로 견딜 수 있는 무서운 것이다.
“도구는 사물성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에 반쯤은 사물의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그것은 제작의 측면에서 보자면 반쪽짜리 예술작품이기도 하다.” 도구는 인간의 가치들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수단과 방법에 다름 아니다. 그러한 도구는 반쯤의 예술이기도 한다. 그러나 예술작품은 그렇게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이 수고를 치러가며 관리 보존하고 그것에 많은 시공간을 빼앗기고 있다. 때문에 예술작품은 완전한 예술이라고 보기 어렵고 반쯤의 도구도 되지 못한다. 이것은 예술의 비실재성이다.
이렇게 하여 인간은 가까스로 예술작품의 자족성을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말을 계속 들어보자. “그러나 사물 이상의 것이라 하여 예술작품이 갖는 자족성을 결하고 있기에 예술작품과 동등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자족성이란 예술작품처럼 인간의 생활과 별개로 독립되어 있음을 두고 하는 말이다. 도구는 반쯤의 예술이기는 하지만 항상 생활에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자족성이 없다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말하고 있는 예술작품의 자족성, 그것이 예술을 비실재적이게 하는 것이다.
아름다움의 찬미
릴케에 따르면 예술이란 “내 울부짖은들 누가 천사의 열에서 들어주랴. (중략) 왜냐하면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가까스로 견딜 수 있는 무서움의 시작에 불과하므로, 우리가 아름다움을 그토록 찬미함은 파멸하리만큼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인간은 아름다움을, 더 정확히 말하면 아름다움이라는 관념을 실현하기 위해 엄청난 수고를 지불한다. 이 수고를 지불하는 것이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에겐 매일 같이 보고 또 볼 비탈길 어느 한 그루 나무만이 남아 있으리라. 또한 어제 거닐었던 거리와....” 이 행에서 릴케가 등장시키고 있는 것들은 내가 실재이며 실체라고 말하는 것이요 하이데거가 사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예술은 바로 말해 자연 사물을 비실재로 전이시키는 일종의 매개체인 것이다.
“그렇다. 봄은 바로 그대를 필요로 했다. 수많은 별이 그대가 지각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많은 파도가 과거로부터 그대에게 솟구쳐 올라왔다.”
예술과 인간의 관계에서 인간이 예술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아름다움이라는 관념을 온전히 실재하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실재하게 하려는 수단과 방법의 실천 과정에서 인간이 예술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앞에서 말했지만 인간의 정신은 인간 자신의 외부에 존재한다. 그러나 동물은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지 않은, 정신이 육체의 내부에 존재하기 때문에 상징능력을 지니지 않고 있다. 그들에겐 문화와 예술이 없다. 그들은 문화와 예술을 추구하느라 수고하지 않는다. 때문에 릴케는 인간의 전도된 존재를 말하기 위해 동물의 존재를 통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부릴 수 있는 자 누구란 말인가. 천사도 인간도 아니다. 영리한 짐승은 벌써 알고 있나니 이미 알고 있는 세상 의지하고 우리 더이상 편안할 수 없음을. 아마도 우리에겐 매일같이 보고 또 볼 한 그루의...” 동물들이 무엇을 알겠는가. 릴케가 동물들이 벌써 알고 있다고 말하는 정신의 배경에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생각이 있을 것이다.
인간이 창조했다고 하는 것은 이 비실재이며 이것은 자연에 그 기반을 둔 것이다. 인간의 관념을 실재화하려면 실체이며 실재인 자연이 없이는 안된다. 그것은 결코 실재할 수가 없다.
이시영 시집 『은빛 호각』은 이를 분명히 자각한 소산이다. 그는 예술이 인간의 생활을 떠나 따로 존재하지 않음을 작품을 통해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음악이든 시이든 미술이든 모두 생활 속에서는 실재하고 있다. 시예술이란 우리들의 생성되는 의식 가운데서 얻어지는 미적 관점 바로 그것이다. 뒤샹이 변기를 ‘샘’이라는 제목으로 한 것은 그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이때 이 변기는 뒤샹의 자의적인 상징이 된다. 이렇게 현대예술은 일상과 예술의 간격을 좁혀가고 있고 이는 결국 예술과 생활이 같다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 예술이 실재한다는 데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상징·추상능력 때문에 가능하다. 『은빛 호각』의 시편들은 이 추상능력을 활용하여 삶 속에서 시적인 순간들을 포착해내고 있다. 시들은 메타포로 이루어져 있지 않으며 때문에 어느 한 대목을 떼어내 행간을 분석할 수가 없다. 소재 자체가 시인 것이다
사과를 먹듯 시를 읽다
아파트 앞 네거리에서 고양이 한마리가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어찌나 빠르던지 순식간에 다리가 네개에서 여섯개로 변했다. 속력을 내어 달리던 덤프트럭 기사가 끼이익 아스팔트가 패이도록 브레이크를 밟고는 거친 고개를 빼어 “저런 개새끼가 있나? 확 밟아버릴라!” 어쩌고 하는데 정작 길을 다 건넌 고양이는 청년 기사를 향해 웃음을 한번 씨익 웃고는 유쾌한 수염을 날리며 봄바람 속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고양이」전문
문명과 자연의 관계가 이만큼 긴장있게 설정되어 있는 시를 나는 읽지 못했다. 메타포를 조작하여 문명과 자연 사이에 이러한 긴장을 조성하려면 이 시에 비하여 상당히 많은 언어를 소비해야 할 것이다. 거기에다 군데군데 빈틈이 드러날 것이고, 반대로 얼른 들어오는 매력 포인트가 있게 될 것이다. 이 시에는 매력 포인트도 없다. 완전한 유기체여서 어디를 붙잡고 늘어지는 분석을 허용하지 않는다. 문명에 대한 비평과 조롱. 그 문명으로 수고하는 인간에 대한 풍자와 해학 연민이 동시에 처리되고 있다. 이 시를 읽고 난 뒤의 쾌감은 일종의 심각성을 동반한다. 많은 사람들의 실제 경험을, 뒤샹이 변기를 샘으로 전시하듯 전시해놓고 있다.
한 알의 사과를 먹으면서 우리는 그 영양가나 성분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는다. 맛이 있으니까 그냥 먹는다. 메타포로 씌어진 시를 읽을 때 우리는 어느정도 그 영양가와 성분을 생각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런 시는 그런 생각이 없이 사과를 먹듯이 읽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은빛 호각』에 실린 시들 가운데 「짧은 이별의 순간」이나 「1980 여름 종로경찰서」 등 군사정권 시절을 다룬 시들을 이전의 같은 제재를 취한 시와 비교해보면, 이전의 시편들은 우수 어린 톤의 서술이 있지만 『은빛 호각』의 시편들에서 그런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런데 생활이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말할 것 없이 인간의 관념이다. 그렇다면 생활 자체가 관념의 메타포일 것이다. 그 역도 성립한다. 즉 인간의 관념도 실재하는 생활의 메타포인 것이다. 왜 이러한 고찰이 필요한가? 그 이유는 이시영의 시를 두고 관점이 아닌 단순한 미적 지각이 포착한 대상이라는 오판을 차단하기 위해서이다. 미적 대상이란 꽃이나 나비 등 본래 그대로인 것을 인간이 아름답게 느끼는 그것이다.
“미적 대상과 예술은 분리된다. 이들 두 가지는 동일한 내용을 지닌 노에마이긴 하지만, 그 노에시스는 각기 다르다는 점에서 서로 상이하다.”(미켈 뒤프렌 『미적 체험의 현상학』, 이대출판부) 인간의 생활은 인간의 관념/의식의 기능이 작용하여 이루어진다. 생활은 자연 사물과 같은 실체와 관계를 형성하는 실재이다. 그래서 의식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 수다한 대상 중에서 예술인 것을 가려내는 데는 초의식 내지는 직관, 의식의 작용으로부터 얻어지는 관점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선택된 대상은 자의적 상징이 된다. 시는 메타포 이전의 것이라고 하는 근거는 여기에 있다.
마음은 마음을 쓰는 것이다
우리가 자주 말하게 되는 “마음”을 정의하면 어떤 표현이 될까?
그것은 “마음은 마음을 쓰는 것이다”이다. (문화과학 ; 레슬리 화이트: 아카넷) 마음을 쓰기 전에는 마음은 없는 것이다. 마음을 쓸 때야 우리는 타인과 사물의 관계를 가지며 이 관계가 곧 존재이다. 예술은 하부구조 없이는 현실화되지 않는다. 하부구조 없는 상부구조는 없다. 상부구조가 없는 하부구조는 얼마든지 있다. 마음을 나타내는 데는 '이게 내 마음이야' 하고 건네주는 하부구조로서의 한송이 꽃이 필요하다. 하부구조란 작품에 사용된 재료들이며, 상부구조란 그 재료를 특수한 방법으로 결합시킨 동기로서의 관념이다. 때문에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사물적 측면 즉, 하부구조에 대한 분석을 시작으로 상부구조의 분석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고로, 작품의 하부구조가 없다면 이런 철학적 고찰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현대의 어떤 작품보다 아름다운 원시나 고대의 동굴벽화는 그 당시에 예술이 아니라 생활의 일부로서 그려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고 있는 그림에 대한 “예술”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러나 현대에서는 예술작품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렇듯 어떤 작품이 예술이 되는 것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예술의 본질이 인간의 관념에 의해 미리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규정은 고정되지 않고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예술작품의 하부구조를 통하여 예술의 본질 규명을 하고 있는 것이 하이데거 예술작품론의 근원이다.
이 글은 두 연대를 이루고 있는데, 하나는 예술과 진리의 연대이며 다른 하나는 진리와 아름다움의 연대이다. 하이데거에 있어 예술이란 형식과 균형의 시각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작품 속에 정립된 진리내용에 근거한다. 그런데 진리란 하이데거도 말하고 있는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실과 인식의 일치를 의미한다. 그것은 현상과 본질의 일치이기도 하다. 앞으로도 이것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진리란 존재지로서의 존재자의 비은폐성이다. 진리는 존재의 진리이다. 미는 진리와 분리되어 그 곁에서, 진리와는 다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 같은 책 후기)
그는 실재이자 실체인 도구를 논할 때는 진리와 결부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작품을 논할 때 진리와 결부시키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인간이 작품을 감상하면서 생각하기 때문이고, 자연은 감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과 함께 그것이 어떻게 해서 진리라고 인식하는 과정이 없이도 곧바로 실천한다. 그러나 작품의 감상은 실천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이론 즉 허구로 연결되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놓치고 있는 것이 이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대목을 더 인용해보면 “진리란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의 비은폐성이다. 진리는 존재의 진리이다. 미는 진리와 분리되어 그 곁에서, 진리와는 다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진리는 작품 가운데 자기를 정립할 때, 스스로 빛난다. 이처럼 작품이 작품으로 있을 때 작품 가운데 일어나는 진리의 빛남이 곧 아름다움이다. 그 점에서 미는 진리의 자기 고유화에 속한다." (민주주의 사회연구소 편 『비판적 예술 이론의 역사』에서 재인용) 여기서 작품 가운데서 일어서는 진리의 빛남이란 작품을 감상하면서 감상자가 진리에 대해 깨닫는 것 곧 인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식된 진리이지 실천에 옮겨져서 실재하는 진리는 아니다.
하이데거의 비은폐성
예술과 진리, 진리와 아름다움이라는 두 연대를 통하여 작품 속에 진리의 본질인 비은폐성이 있으며 작품의 근원이 진리를 표현하여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는 결론으로 흐르고 있다. 그런데 비은폐성이라는 용어는 하이데거 철학에서 핵심이 되고 있다. 그는 비은폐성을 지식과의 관계에서만 사용한다.
“구두라는 도구의 실팍한 무게 가운데는 거친 바람이 부는 넓게 펼쳐진 평탄한 밭고랑을 천천히 걷는 강인함이 쌓여 있고, 구두 가죽 위에는 대지의 습기와 풍요함이 깃들어 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 모든 것을 인식하게 되는 것은, 아마 이 그림 속의 구두를 응시하게 됨으로써일 것이다."
이 말의 요지는 실제로 구두를 신고 작업하는 촌 아낙은 앞 행에서 하이데거가 묘사한 바의 진리를 인식하지 못하지만 구두를 그린 그림을 보면서는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한 차이는 촌 아낙은 실제의 구두를 신고 진리를 실천했다는 것과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은 진리를 인식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하이데거 저술에 분포되어 있는 진리의 비은폐성이란 이와 같이 지식과 관계되는, 즉 지식의 비은폐성이지 진리 그 자체의 본질로서의 비은폐성은 아니다.
그가 말하는 비은폐성이란 차라리 지식의 힘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진리 그 자체 본질로서의 비은폐성이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진리 자체의 단순함이다. 진리는 복잡하지 않다. 진리가 복잡하다면 진리는 지식에 의해 독점될 것이고 지식을 가진 자만이 진리를 실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그러한 이유로 진리가 될 수 없다. 모든 경우에 단순함이 복잡함을 이기게 되어 있다.
이상에서 나는 이시영 시집 『은빛 호각』을 읽으면서 시집을 읽기보다는 시인이 시집의 모든 시편들은 실제로 있었던 일 자체를 시로 채용한 것, 그리고 동시에 메타포로 된 시를 단 한 편 넣어 제목을 ‘비유의 시’로 한 시인의 의도를 알아보기 위해 하나의 근거를 제공하였다. 물론 하이데거의 『예술작품의 근원』은 그 자신이 예술의 비실재성을 논하기 위해 저술한 것은 전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재와 실체, 비실재라는 분별을 명료하게 가지고서 이 두 책을 읽는다면 예술의 비실재성이라는 관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창비 웹매거진/2005/7]
* 하이데거 『예술작품의 근원』(오병남 민형원 역)
* 릴케 『두이노의 비가』(한기찬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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