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애의 <인간문제> 중에서
억새풀이 길길이 자란 그 밑으로 봄을 만난 저 원소 물이 도랑으로 새어 흐르고 또 흐른다. 그 주위로 죽 돌아선 늙은 버드나무는 겉보기에는 다 죽은 듯하건만, 그 속에서 새 움이 파랗게 돋아난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물매미 한 마리가 탐방 뛰어들어, 시원스럽게 원형을 그리며 돌아간다. 그러자 어디서인지 신발 소리가 가볍게 들려온다.
쨍쨍이 내리쪼이는 봄볕을 받아 샛노랗게 빛나는 저 지붕과 지붕! 얼마나 저 지붕들이 부드럽고 탐스러운 것이냐!
그는 눈을 꾹 감았다. 그러나 그 지붕들은 점점 더 또렷또렷이 나타나 보인다. 그리고 그 지붕 새로 굵단 남편의 손끝이 스르르 떠오른다. 그리고 임종 시까지 차마 눈을 감지 못하고 끼르륵 하고 숨이 넘어가던 그!
아까보다 눈은 점점 더 많이 쏟아진다. 함박꽃 같은 눈송이가 그의 입술 끝에 녹아지고 또 녹아졌다. 그때마다 그는 찬 냉수를 마시는 듯하여 가슴이 선뜻하곤 하였다.
길이란 길은 모두 눈에 묻혀버리고 길가의 낯익은 나무들도 눈송이에 흐리었다. 그리고 그 높은 불타산도 뿌옇게 보일 뿐이다.
민수는 길은 찾을 수가 없어 한참이나 밭고랑으로 혹은 논둑을 밟다가 동네를 짐작하고야 길을 찾곤 하였다. 그리고 눈에 젖었던 신발은 얼어서 대그런 소리를 내었다. 이렇게 눈 곳에 푹푹 빠지면 민수가 간신히 몇 집을 둘러 방축골까지 왔을 때는 벌써 그가 집에서 떠난 지 이틀째 되는 황혼이었다.
그의 아내는 머리를 내리쓸며 부스스 일어 나간다. 민수는 정신을 가다듬어 아랫못을 바라보았다. 시커먼 누더기 속에서 소리가 자주 들리며 누더기가 배운 하고 열리더니 까만 눈알이 수없이 반들거렸다. 그리고 킥킥 웃는 소리가 난다. 몇 아이가 되는지 모르나 어쨌든 한두 아이가 아님은 즉시 알았다.
이 저녁부터는 바람까지 일었는지 바람 소리가 휙 몰아갔다가 몰려온다. 그리고 문풍지가 드르릉드르릉 울리며 눈보라가 방 안으로 스르륵 몰려들었다.
상귀에 흐르는 죽을, 그중 어린 것이 입을 대고 쭉쭉 핥아 먹는다. 이 꼴을 보는 주인마누라는 나그네 보기가 부끄러운 듯이 어린애를 붙들어다 젖을 물리고 콧물을 씻는 체하면서 고름끈을 눈에 갖다 대곤 한다.
주인은 어리둥절하였다. 그리고 자기 손에 쥐인 것이 돈이라는 것을 깨닫자 칵 쓰러지며 엉 하고 울고 싶었다. 민수는 두 다리가 가늘게 떨리는 것을 깨달았다. 다음 순간에 덕호의 성난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그는 진저리를 쳤다. 그리고 주인의 붙잡는 것을 뿌리치고 그 집을 나왔다.
간밤 동안에 얼마나 바람이 불었는지 눈이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어 어떤 곳은 눈산을 이루어놨다. 민수는 신발 소리를 사박사박 내며 분주히 걸었다. 흰 눈 위에는 이따금씩 날짐승들의 발자국이 꽃잎같이 뚜렷이 났다.
3년이란 세월은 흘렀다.
며칠 동안 어머니가 가슴앓이병으로 앓아누워서, 선비는 큰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어머니 곁에 꼭 마주 앉아 있었다.
아직도 이 집에는 남포등을 쓰지 못하고 저렇게 접시에 들깨 기름을 부어 쓰는 것이다. 불꽃은 길게 끄름을 토하며 씩씩히 올라가다가는 문바람에 꺼풋꺼풋하였다.
선비는 어머니가 좀 잠이 든 듯하여 등불 곁으로 왔다. 불빛에 보이는 그의 타오르는 듯한 불은 한층 더 빛이 났다. 그는 무엇을 생각하느라 물끄러미 등불을 바라보다가 부스스 일어나서 윗방으로 올라간다.
여기까지 생각한 그는 한숨을 후 쉬며 이마에서 흐른 땀을 쥐어뿌렸다. 그리고 어린애같이 거두고 귀여워하는 조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순간에 그는 호미 자루를 던진 채 발길 나가는 그대로 어디든지 가고 싶었다.
캄캄한 하늘에는 별들이 동동 떴다. 그리고 어디서 불어오는 바람결에 모기쑥 내가 약간 코끝을 흔들어준다. 그는 어디라 없이 멍하니 바라보며 손으로 허리를 꽉 짚었다.
덕호네 집에서 간혹 무슨 말이 흘러나오나 누구의 음성인지 또는 무슨 말을 하는지 분간할 수가 없다. 그저 호호 하하 웃는 웃음소리만은 저 별을 쳐다보는 듯이 또렷하였다.
그는 이렇게 우두커니 서 있으니 아까 집어던지던 익모초 담배나마 생각키었다. 그래서 거지 안을 뒤져보니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그는 입맛을 쩍쩍 다시며 풀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밑이 산뜻하여 다는 속이 한결 시원한 듯하였다. 그때 이리로 오는 듯한 신발 소리가 나므로 그는 두 눈을 고양이 눈처럼 떴다.
가까워지는 신발 소리는 뚝 끊어지며, 울바자 밑에 붙어 서는 소리가 바삭바삭 난다. 그리고 급한 숨결 소리가 여자라는 확신을 그에게 던져주었다.
그는 일어나는 호기심과 아울러 선비가 아닌가 하는 의문에 역시 가슴이 뛰놀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는 저편 사람에게 자기가 있는 것을 눈치 채이지 못하게 하려고 조금씩 뒷걸음질을 하였다.
첫째는 무정처하고 걷다가 다시 덕호의 집 주위를 한 바퀴 돌아서 그의 집으로 왔다.
그러나 방으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아서 마당가에서 어정어정 돌아다니다가 나뭇가리 옆에 펄썩 주어앉았다. 훅 하고 끼치는 나무 썩어진 내를 맡으며, 아까 개똥이의 오줌을 받은 기억이 떠올라 무의식간에 그의 손은 이맛가를 만졌다. 따라서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울분이 울컥 치미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나뭇가리에 몸을 기대며 고놈의 계집애는 도무지 볼 수가 없으니 웬일이어, 어디 앓지나 않는지? 하고 생각할 때 그의 눈 위에서 빛나던 그중 큰 별 하나가 꼬리를 길게 달고 까뭇 사라진다. 그는 그 별이 사라진 곳을 멍하니 바라보며 선비의 눈등의 검은 사마귀를 생각하였다. 티없이 밝은 얼굴에 빛나는 그 검은 사마귀!
타이핑 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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