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준의「무덤 사이에서」
박형준論 - 변의수
땅 속 깊은 어둠 속에서 뿌리들이
잠에서 깨어나듯이,
-「무덤 사이에서」중
산 자들에게 죽은 자의 영혼이 얼마나 영향을 미치겠느냐마는 그만큼 생은 아픈 것이다. 거대한 우주의 움직임 속에서 그 움직임을 실현하기 위하여 우리는 아파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해야 한다. 거대한 정신의 실현을 위해서 미소한 우리들 영혼이 겪어야 하는 고통을 우리의 움직임 어느 순간에선가 찰나적이지만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서로는 위로하고 사랑해야 하지만, 우주의 정신은 너무나 거대하여 우리의 사랑을 갈가리 찢어놓는다. 그것이 우주의 정신이다. 그래서 사랑은 다가왔을 때 가장 사랑해야 한다. 다가오는 인연의 기운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순간적이지만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은 그래서 불꽃처럼 타오를 수 있어야 한다. 다음 순간에 인연은 갈라지고 흐려질 것이므로, 검은 우주 공간의 어디론가 바람처럼 구름처럼 흘러 한 줄기 사라지는 흔적을 남기지 않을 것이므로.
지금 나는 그 징표를 찾기 위해
벌거벗은 들판을 걷고 있다.
그러나, 영혼은 사라지지 않는다. 영혼은 형상을 바꿀 뿐 소멸하지 않는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하므로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주에서 소멸하지 않는다. 우리의 영혼이 버리는 건 불필요한 욕망이다. 우리의 욕망은 우주에서 순간의 움직임을 위해 필요로 한다. 욕망은 움직임을 위한 에너지이다. 만나고 헤어지기 위해서 욕망은 필요한 것이다. 욕망이 사라지고 난 뒤의 영혼은 순수하다. 무색무취의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영혼과 영혼은 산 자와 죽은 자들 속에서 함께 호흡한다. 시인의 깨달음의 힘은 우주의 것이다. 앎의 힘은 자연의 것이다. 시인의 깨달음과 영혼은 자연의 그것이다.
영혼의 풍경들은 심연조차도 푸르게 살아서
우물의 지하수에 떠 있는 별빛 같았다.
박형준 시인은 불혹을 지나 밥과 무덤, 산 자와 죽은 자의 연결 끈을 이해할 시력(詩歷)에 이르렀다. 오래 전 나는 박형준 시인은 시를 과학적 보고서로 작성한다는 인상을 받은 적이 있다. 그에게서 은유는 감성을 짜 맞추는 측량자의 도구였으며 시인의 젊은 감성의 영혼은 처음 보는 구조와 미학의 건축물을 서정적 언어로써 축조하여 보여주고 있었다. 그의 등단작「家具의 힘」은 나의 내부에서 현재 진행형의 회상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의 영혼의 축조술은 우리로 하여금 그 어떤 특정한 방향의 지향성으로 호흡하게 한다. 그것은 박형준 시인의 남다른 시힘이다. 그의 시힘은 한 그루의 나무로서 가지를 뻗어 그가 자리한 숲을 어떤 특정한 색채로 물들인다. 그리하여 그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신선한 기운으로 작용하여 삶을 새롭게 환기시켜 준다. 시인의 혼은 한 그루의 나무처럼 그렇게 우리들 영혼과 함께 호흡하고 생장한다.
나는 거기서 내가 날려 보낸 생의 화살들을 줍곤 했었다.
내가 인간의 언어를 몰랐을 때
박형준 시인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언어로써 시를 짓지 않는다. 박형준은「무덤 사이에서」의 초입에서 “인간의 언어를 몰랐을 때”라며 과거형으로 언어 너머의 세계를 암시한다. 그런 시인은 시편의 중반을 넘어서서 다시 “내가 아직 인간의 언어를 몰랐을 때”라며 언어 이전의 세계를 환기시킨다. 우리는 언어를 사용하지만 언어는 ‘산 자’ 혹은 ‘인간’의 눈의 것이다. 자연은 인간의 눈으로 관측되는 그 너머의 세계이자 존재계이다. 시인의「무덤 사이에서」는 언어 너머의 세계에서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이 하나의 세계를 이루어 존재함을 보여준다.
논과 밭 사이에 있는 우리나라 무덤들은 매혹적이다.
죽음을 격리시키지 않고 삶을 껴안고 있기에,
둥글고 따스하게 노동에 지친 사람들의 영혼을 껴안고 있다.
(중략)
산 자와 죽은 자가 연결되어 있는
밥공기와 같은 삶의 정신,
푸르고 푸른 무덤이 저 들판에 나 있다.
언어는 시인이 달을 가리키기 위해 내뻗는 손가락이다. 물론 시인은 달을 가리키는 언어기호를 수학자 이상으로 이미지의 색채와 파장을 정밀하고도 엄격하게 계측한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으로 시인은 달을 가리키는 자이기에 앞서 달을 보는 자이다. 여기서는 시인이란 다른 예술가와 철학자 건축가, 사회학자나 다를 바 없다. 박형준 시인은 아마 시인이 아니었다면 건축가나 사회학자가 되었을지 모른다. 혹은 흙의 기운을 다스리는 농부나 묵언행의 스님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시인은 달을 가리키는 도구로서, 수식이나 사회규범을 제시하는 대신 ‘존재기호’를 사용한다. 존재기호는 자연언어이지만 시인의 영혼이 깃든 영적인 도구이다. 그런 시인의 언어는 ‘도구’가 아니라 시인의 분신이자 영혼이다. 하이데거는 시인이 ‘존재기호’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시어의 건축술을 보여주는 박형준 시인은 달을 가리키는 언어기호 사용자이기 이전에 달을 바라보는 직관자이다. 그 직관의 투명함과 빛이 산 자와 죽은 자들의 관계를 ‘산 자’의 육안으로 투시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들판의 꽃을 찾으러 나갔을 때는
첫서리가 내렸고, 아직 인간의 언어를 몰랐을 때였다.
추수 끝난 들녘의 목울음이
하늘에서 먼 기러기의 항해로 이어지고 있었고
서리에 얼어붙은 이삭들 그늘 밑에서
별 가득한 하늘 풍경보다 더 반짝이는 경이가
상처에 찔리며 부드러운 잠을 자고 있었다.
박형준은 사물의 관계에 대한 투시력을 지닌 시인이다. ‘사물’이 아닌 ‘사물의 관계’를 투시하는 눈은 영적인 세계를 보게 된다. 사물과 사물 사이, 사물 간에 흐르는 미시계의 은유를 볼 수 있는 시인에게 이미 사물과 사물은 하나이며 시인과 사물과 세계가 하나의 동조성의 기운과 리듬에 휩싸여 있음을 인지한다. 그곳에서 시인의 언어는 감각계의 사물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영성을 드러낸다.
시인은 사물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시인이 사물을 사랑하는 것은 사물 내부의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다. 시인은 풀 한 포기 밟음에도 죄스러워 한다. 시인은 풀잎의 영혼을 느끼기 때문이다. 사물의 세계를 정령처럼 투과하는 박형준 시인은 들녘의 무덤에서 한 송이 꽃을 바라본다. 죽은 자의 봉분은 농토 옆에서 쓰러져 잠든 어린 시인의 따뜻한 밥이 되기도, “노동에 지친 사람들”의 “영혼을 껴안”는 지붕이 되기도 한다.
내가 찾아 헤매다니는 꽃과 같이 무덤이 있는 들녘,
산 자와 죽은 자가 연결되어 있는
밥공기와 같은 삶의 정신,
푸르고 푸른 무덤이 저 들판에 나 있다.
라고 말하는 시인은 감각과 욕망의 고통을 넘어 푸른 정신의 세계로 나아간다. 추위와 허기, 생과 사를 벗어나 푸른 정신만으로 호흡하는 절대의 정신을 시인은 체화시켜 나간다. 욕망과 애증과 분노를 벗어나 초극의 정신으로 살아 빛나는 “밥공기와 같은 삶의 정신”이고자 한다. 시인은 물질계에서의 ‘소유’ 대신에 미시계인 영혼의 세계를 찾는다. 보디사트바(Bodhisattva)행이다! 선의 업으로 육신의 욕망을 금한다면 그만큼 정신은 투명하게 빛날 것이다. 온 몸으로 종소리를 내는 일이다.
찬 서리가 내릴수록 그 속에서 잎사귀들이 더 푸르듯이,
내가 아직 인간의 언어를 몰랐을 때 나를 감싸던 신성함이
밭 가운데 숨 쉬고 있다.
눈에 보이는 세계는 더 이상 시인의 세계가 아니다. 시인은 감각된 것들의 행간에서 숨 쉬는 기운들의 세계를 바라본다. 이미 그러한 곳에 이른 시인은 물리적 역학의 세계에는 관심 갖지 않는다. 물리적 역학의 세계를 지배하는 “제 스스로를 삼키는” 그 어떤 ‘심연’의 세계를 감지하여 시인은 “걸어 내려간다”. 시인은 그러므로 언어를 지운다.
감각이 지배하던 언어로는 비감각의 세계를 기술하지 못한다. 비감각의 세계는 평이한 우리의 감각이 닿지 않는 거대 우주계 또는 미세한 기운들의 세계이다. 영들의 세계는 물결처럼 일렁인다. 감각의 세계에선 비어 있던 공간들이 영혼들의 세계에선 투명하게 드러나 보인다. 영혼과 영혼들은 공기처럼 교류한다. 시인의 눈에 “산 자와 죽은 자”는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에 우리나라 봉분들은 밥그릇을 닮았다.
조상들은 죽어서 산사람들을 먹여 살릴 밥을 한상 차려놓은 것인가.
내가 찾아 헤매다니는 꽃과 같이 무덤이 있는 들녘,
시인이 언어를 지우는 것은 언어는 또한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언어는 “둥글고 따스하게 노동에 지친 사람들의 영혼”의 잠을 방해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시인의「무덤 사이에서」시편은 우리를 한 차원 다른 세계로 안내한다. 욕망과 격정에 들뜬 산 자들의 어깨에 시인은 따스한 손을 올린다.「무덤 사이에서」한 편을 읽는 동안 우리는 많은 곳을 여행하게 된다.
내가 들판의 꽃을 찾으러 나갔을 때는
첫서리가 내렸고, 아직 인간의 언어를 몰랐을 때였다.
(중략)
내가 인간의 언어를 몰랐을 때
영혼의 풍경들은 심연조차도 푸르게 살아서
우물의 지하수에 떠 있는 별빛 같았다.
(중략)
찬 서리가 내릴수록 그 속에서 잎사귀들이 더 푸르듯이,
내가 아직 인간의 언어를 몰랐을 때 나를 감싸던 신성함이
밭 가운데 숨 쉬고 있다.
언어를 버림은 ‘소유’를 떨치는 일이다. “내가 인간의 언어를 몰랐을 때/ 영혼의 풍경들은 심연조차도 푸르게 살아서/ 우물의 지하수에 떠 있는 별빛 같았다.” 시인은「무덤 사이에서」의 시편에서 세 번 언어를 부정한다. 그의 시편에서 평소와 달리 있지 않은 강한 반복은 강한 암시성을 갖기 마련이다. 숫자 3은 완전함을 의미한다.
3으로 인해 인간은 사물을 볼 수 있다. 기하학적 역학의 세계는 3에서부터 시작된다. 3은 신성한 숫자이다. 세 번의 부정은 완전한 부정을 의미하며, 세 번의 부정은 신성(Numinose)에 의한 부정을 의미한다. 세 번의 언어에 대한 부정은 불완전한 감각의 세계로부터 완전한 존재계인 영들의 세계로의 이행을 함축한다. 언어에 대한 시인의 완전한 부정은 “산 자와 죽은 자가 연결되어 있는” “내가 아직 인간의 언어를 몰랐을 때 나를 감싸던 신성함”에 기인한다.
박형준은 우리 시단에서 몇 안 되는 정신과 눈을 갖고 있는 시인이다. 박형준 시인에게 수사학은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이다. 그에게 리얼리즘의 정신은 무소유의 정신으로 표상된다. 고독과 무구한 정신은 “서리에 얼어붙은 이삭들 그늘 밑에서/ 가득한 하늘 풍경보다 더 반짝이는 경이”로움 그것이다. 그러한 시인의 영혼은 “심연조차도 푸르게 살아서/ 우물의 지하수에 떠 있는 별빛” 그것이다.
언어기호는 인간이 자연을 소유하는 수단이다. 소유를 위한 언어는 분절적이다. 소유를 위해선 분할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비의식의 자연은 분할되지 않는다. 영혼과 물질 또한 분리되지 않는다. 하지만 ‘의식계’에서는 모든 것이 나누어지고 분리된다. 측정가능하며 셈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소유된다.
물질은 소유를 위한 의식의 구성물이다. 하지만 사실은, 사물은 호흡하는 영들의 세계이다. 사물들은 호흡과 호흡으로 이어져 있다. 소유하려는 산 자들의 욕망이 사물의 호흡을 단절시킨다. 하지만 단절은 이어져 있는 것이다. 시인은 “그 징표를 찾기 위해/ 벌거벗은 들판을 걷고 있다.” 시인은 언어를 벗어던진 ‘자연’이 되어 걸어가고 있다. 산 자와 죽은 자가 하나로 함께하는 언어 너머 저쪽의 세계를 박형준 시인은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웹진 시인광장 2009년 겨울호
변의수 시인
1955년 부산에서 출생. 1996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으로『먼 나라 추억의 도시』 『달이 뜨면 나무는 오르가슴이다』제3시집(장시)『비의식의 상징: 자연·정령·기호』제3시집(단시)『비의식의 상징』이 있고, 시론으로『비의식의 상징: 상징과 기호학』등과 비평집엔 『비의식의 상징』이 있음. 현재 웹진 『시인광장』편집위원으로 활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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