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에 빠진 사람을 어떻게 할 것인가"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공자가 본 한국 : 공자와 재아(宰我)
공자와 재아(宰我) |
엊그제 서울 나간 길에 김 선생님 서재에 들렀다. 여러 달 만에 미리 연락도 없이 갔는데도 기다렸다는 듯이 반겨주시고 책부터 꺼내 주신다. <신정 증보판 조선 후기 농학사 연구>. "내 농업사 연구에 영문 요약 달아주는 일이 이제 끝났군." 말씀과 함께.
1986년도에 시작해서 23년 걸린 일이다. 새로 내는 책이 있거나 전에 내신 책을 고쳐서 낼 때마다 영문 요약을 만들어드렸다. 이 작업이 내게는 대단히 실속있는 공부였다.
처음에는 요약에 담을 내용을 정리해 주시고 그것을 내가 알아서 영문으로 바꿔 올 것을 기대하셨다. 그러나 나는 제대로 된 요약을 만들려면 내 입장에서 연구의 의미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고집, 책 한 권 요약 만들 때마다 몇 차례씩 찾아가 마치 연구 심사라도 하듯 궁금한 것을 다 캐물었다. 단독 특강을 대놓고 받은 셈이다.
위에 인용한 공자와 재아의 사제 관계 이야기를 읽으며 그분과 나 사이의 별난 사제 관계가 떠올랐다. 역사학계에서 사제 관계라 하면 연구 분야가 이어지는 사이를 통상 말한다. 중국사 전공인 내가 한국사 전공인 김 선생님을 스승으로 받든다는 것부터 그런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선생님께서도 나를 제자로 잘 인정하지 않으신다. 반쪽 제자 정도로 봐줄까말까다. 작년 봄 <밖에서 본 한국사>를 내고 돌베개 한철희 사장과 함께 인사드리러 갔을 때는 제자가 아니라고 밝혀 말씀하기까지 하셨다. 구상 단계부터 못마땅해 하시던 것을, 책으로 나온 것을 보고는 막 화를 내셨다. 나를 꾸짖는 것으로 모잘라 한 사장에게까지 유탄이 튀었다. "한군이 뜻있는 출판 사업을 하는 것으로 믿고 있었는데, 어떻게 이런 걸 책이라고 냈는가!"
스승 입장이 아니라 장배(長輩) 입장에서, 말하자면 아저씨가 조카 대하듯이 나를 대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렇게 생각하실 면이 있다. 40년 전 서울대 사학과에서 통상적 의미의 사제 관계를 처음 맺었지만, 그분께 특별한 배움을 얻게 된 것은 1985년 6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한 달 동안 모시고 지낼 때부터였다.
니덤 교수의 동아시아과학기술사연구소에 체류하고 있을 때 파리에 체류 중이던 선생님이 중국농업사 자료 조사를 위해 건너오셨다. 생활도 보살펴 드리고 연구소 안내와 통역을 맡아 전면적 접촉을 가지고 지냈다. 내가 유럽 인문학의 "인간적" 학풍에 빠져들고 있을 때였는데, 그와 얼핏 대조되는 선생님의 치열한 연구 자세가 또한 절실하게 다가왔다. 그 이후 내 공부하는 자세는 이 두 가지 축 위에서 새로 형성되었다.
선생님이 나를 제자로 여겼다면 그 때 내 생활하고 작업하는 모습을 보면서 용납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공자가 재아를 보고 한심해 한 것보다 더하셨을 것이다. 그래도 흥미롭게 느껴지는 구석이 없지 않기에 곁을 주면서 학문의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드셨을 것이다.
1990년 내가 교수직을 그만둘 때는 선생님과의 관계마저 잃을 뻔했다. 반년 전부터 대학 떠날 생각을 시작하고 선생님께 말씀드렸는데, 어느 정도 반대야 예상한 일이었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강도였다. 몇 달 지나도록 내 뜻이 움직이지 않자 이런 말씀까지 하셨다. "자네, 학교 그만두면 나랑 볼 생각 하지 말게." 학교를 그만두는 것은 현실적으로 학문을 그만둔다는 것이고, 학문을 그만둔 사람이라면 얼굴 볼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었다.
교수직을 그만두고도 3년간 학위 논문에 공들이는 것을 보며, 신문사 일을 하면서도 공부하는 자세를 웬만큼 지키는 것을 보며 마음이 누그러지셨지만, 내가 연구 활동에서 벗어난 것을 못내 아쉬워하셨다. 그러다가 내가 연구와 평론의 경계에 애매하게 걸친 <밖에서 본 한국사>를 내자 노여워하셨던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고 싶으면 연구자의 입장을 굳게 지키면서 누구도 섣불리 반박하지 못하도록 당당하게 내놓았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질책이었다.
몇 달 후 <뉴라이트 비판> 작업을 시작하면서 선생님을 찾아뵐 때 나는 무척 쫄아 있었다. <밖에서 본 한국사> 갖고도 그렇게 노여워하셨는데, 현실 정치와 관련이 있는 이런 작업 한다면 반응이 어떠실지 겁이 났다. 그렇지만 일에 관한 생각이라면 뭐든 남김없이 알려드리던 20여년간의 버릇을 갑자기 고칠 수도 없었다.
그런데 한 차례 설명을 듣고 몇 가지 질문을 하신 다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자네 같은 사람이 할 일이군."
작업이 끝나고 책을 가져갔을 때 돋보기를 쓰고 표지를 훑어보다가 "이번에도 돌베개에서 냈군." 하시고는 고개를 들고 빙그레 웃으며 말씀하셨다. "한철희 군 한 번 놀러오라고 하게. 전번에 야단쳐서 보낸 게 미안했는데, 이번엔 칭찬해줘야지."
엊그제 가서도 <공자 평전> 작업에 관해서는 자신있게 설명드렸지만, <조선 망국사> 작업 말씀 꺼내면서는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약간의 설명을 듣자마자 내가 구상하고 있는 중요한 포인트 하나를 앞장서서 짚어 주시는 것이었다. 지도를 흠뻑 받은 뒤 인사드리고 나오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렇게 배우는 사람이 제자가 아니면 뭐야? 왜 나를 제자로 인정 안 하시는 거야?"
학문의 내용과 방법을 배운 스승이라면 여러 분을 댈 수 있다. 그러나 학문의 동기를 살피는 데는 25년째 맑은 거울 노릇을 해주시는 분이 김 선생님이시다. 연구 성과와 강의 외에는 사회와의 접촉을 거의 차단하고 살아오신 선생님께 이 글도 못마땅하실 것을 훤히 안다. 하지만 배운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하는 것은 선생님 일이 아니라 내 일이다.
명경지수 같은 선생님의 삶과 천방지축 같은 내 삶을 나란히 놓고 보면 나 스스로도 선생님 제자라고 나서기가 어색하기는 하다. 그러나 사회에 대한 걱정에서 학문의 뜻을 일으키는 학인의 자세를 그분께 배웠으니 어쩌겠는가. 공자가 "큰 스승"의 모습을 세우는 데는 오죽잖은 제자들도 나름의 공헌이 있었다. 나도 선생님의 가르침에 부끄럽지 않은 작업을 꾸준히 찾아나가도록 노력할 따름이다.
/김기협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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