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문정희<시계와 시계 사이> 외 2편

미송 2009. 3. 5. 16:10

     

    시계와 시계 사이

     

    이 아침 고장 난 시계 속에 눈을 뜬다
    고장 난 시계가 이를 닦고
    고장 난 시계가 밥을 먹고
    고장 난 시계가 나이를 먹는다
    그래도 어딘가 맞는 시계가 있으리라
    나는 그런 시계를 하나 갖고 싶다
    나는 CNN을 본다. CNN은 당황하여
    고장 난 시계가 있는 곳에 특파원을 파견하고
    꼬리를 잘 흔들고 손을 싹싹 비비고 눈치를 살핀다
    고장 난 시계에다 총구를 갖다 댄다
    고장 난 시계를 고치러 다니는 사람들을
    대화라든가 외교라는 말로 보도한다
    결국 모두가 제 힘으로 살다 가는 것
    세상의 모든 시계를 똑같게 고칠 수는 없나 보다
    너와 나 사이에는 어차피 시차가 있다
    고장 난 시계로 길을 걷다가
    교차로에 서서 시계탑을 본다
    나의 시계가 맞는지 교차로의 시계가 맞는지
    알 수 없다
    모든 시계는 나이가 없다
    제각기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다

     

     

    손의 고백

     

    가만히 손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우리의 손이 언제나 욕망을 쥐는 데만
    사용되고 있다는 말도 거짓임을 압니다
    솨아솨아 작은 오솔길을 따라가 보면
    무엇을 쥐었을 때보다
    그저 흘려보낸 것이 더 많았음을 압니다
    처음 다가든 사랑조차도
    그렇게 흘러보내고 백기처럼
    오래 흔들었습니다
    대낮인데도 밖은 어둡고 무거워
    상처 입은 짐승처럼
    진종일 웅크리고 앉아
    숨죽여 본 사람은 압니다
    아무 욕망도 없이 캄캄한 절벽
    어느새 초침을 닮아버린 우리들의 발걸음
    집중 호우로 퍼붓는 포탄들과
    최신식 비극과
    햄버거처럼 흔한 싸구려 행복들 속에
    가만히 손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생매장된 동물처럼
    일어설 수도 걸어갈 수도 없어
    가만히 손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솨아솨아 흘려보낸 작은 오솔길이
    와락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弔燈이 있는 풍경

     

    이내 조등이 걸리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무도 울지 않았다
    어머니는 80세까지 장수를 했으니까
    우는 척만 했다
    오랜 병석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머니가 죽었다
    내 엄마, 그 눈물이
    그 사람이 죽었다
    저녁이 되자 더 기막힌 일이 일어났다
    내가 배가 고파지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죽었는데
    내 위장이 밥을 부르고 있었다
    누군가 갖다 준 슬픈 밥을 못 이긴 척 먹고 있을 때
    고향에서 친척들이 들이닥쳤다
    영정 앞에 그들은 잠시 고개를 숙인 뒤
    몇 십 년 만에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아니, 이 사람이 막내 아닌가? 폭 늙었구려
    주저 없이 나를 구덩이 속에 처박았다
    이어 더 정확한 조준으로 마지막 확인 사살을 했다
     못 알아보겠어
    꼭 돌아가신 어머니인 줄 알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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