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그린 두 소년
- 두 편의 시에 담긴 유년과 자연 풍경
까치발처럼 생긴 윈도우브러쉬로 한 번에 쓸어내릴 수 없는 눈을 욕하며 출근을 했다. 시샘인지 생뚱맞은 놀래킴인지, 3월에 내리는 눈 때문에 어깨가 시리고 뻐근하다. 눈 때문이라고 뱉고 나니 새삼 웃긴다.
연차 휴가를 내고 오늘은 연신 블록질이다. 내용을 읽지 않고 지나친 것이 있어서 둘러보는 중이다. 글 욕심이 많은가. 글 앞에선 연신 체하고 꺽꺽댄다. 팔자소관도 지나간 말이다. 갈증으로 시작된 여인의 독백 그것이 세월의 강물을 타고 구독(求讀)의 여행으로 이어졌다. 물살처럼 잽싸게 스치기도 하고 잡히기도 하는 언어의 무한 유희, 불분명한 가운데 서 있다. 그 한 가운데 진을 치고 누웠다. 누운 길이 게으르고 한가하고 망아지경(忘我之境)이다.
애써, 홀로의 시공을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너는 아직도 누구인가?
흰 길이 떠올랐다 / 정윤천
1
어떤 나이든 여자는 자신의 책을 내면서, 표지에 젊은 날의 사진을 골라 버젓이 실어놓았다. 그리하여 기인 생머리칼 자락이, 그녀의 한가로운 閑談集 안에서 물비린내를 흠씬 풍기며 출렁이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터질듯이 부풀어 오른 그 나이든 여자의, 과거의 상반신에 대하여(탱탱한 유방 근처와......) 그리고 그녀의 현재의 저의(?)에 대하여, 상당한 의혹과 유감을 가져보기도 하였다.
2
어머니는 한땀 한땀 힘들게 바늘귀를 놀렸다. 당신의 그런 집착과 망아의 시간 곁에서, 나는 곧잘 실패라거나 골무 등속을 가지고 놀았다. 그리움에도 빛깔이 있다면...... 내게 있어 그 시간들은(귀머거리와도 같았던!), 어쩌면 온통 회색의 색감이었다.
어머니는 손바닥만씩한 헝겊을 덧대어, 상보라거나 책보 같은 걸 기워놓곤 하였다. 언젠가 내게 힘들게 들려준 적이 있었다.(얘야, 나는 내 안팎의 상처를 깁곤 했구나.)
3
마음의 실꾸리에 감긴 좌절을 재료삼아 그렇게 자신을 기웠노라던 한 여자(어머니), 내게도 문득 흰 길이 하나 떠올랐다(흐릿한 길......), 혹시 그 여자들은(늙은 여류 한담가와 어머니), 제각기 혼신의 힘으로, 자신의 옛날 사진 한닢과 손바닥씩한 헝겊조각들 속에서, 푸르름의 길모서리 하나씩을 글썽한 눈매로 떠올려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며, 내게도 오래 전의 먼길이 하나 떠올랐다. 거기 가뭇한 유년의 강둑(---강변)을 지나, 그 미루나무 숲길 위를 아무렇게나 배회했던, 빛나는 이마를 가진 소년이 하나, 이제 막 맨발의 푸른 길 너머로 길게 이어진 희미한 배경 속에서, 마치도 생시처럼 아프게 어려주었다.
팔 다리가 차고 근육이 군데군데 들쑤시는 한담(寒痰)보다야 한담(閑談)이 낫겠지만, 소년1이 그녀의 처녀시집(처녀가 아닐수도 있고) 혹은, 산문집을 한담집이라고 표현한 건 에누리가 없어 보인다. 좋게 말해 나이든 여자 심하게 말하면 늙어빠진 여자가(그런데 문제는 왜 꼭 여자에 꽂혀야 되는지) 자기가 뭐 아마존의 여전사라도 된다고, 긴 생머리칼에 물비린내까지. 흠씬이 뭐냐니까.
탱탱함을 빠져나온 쭈글쭈글함. 긍정의 배후에 전제되어 온 지난한 강요와 부정의 실타래에 소년1은 몹시 불만이다. 그녀가 보여준 젖가슴 그 이면에 혹시 실리콘이라도 넣지 않았나 하는 저의를 캐묻는다. 물론 또 다른 저의도 있겠다. 많이 알려고 하는데서 유감천만의 결과는 오는 것. 책 표지만 보고서는 그녀의 현시감을 도저히 느낄 수 없다. 소통불능의 만남은 자기회귀로 접어든다.
여자에 대한 회의감이 넘치면 어머니라는 숭고한 이름이 떠오른다. 소년1은 시인 이상(李霜)의 취미활동(아내가 외출한 방에서 실금실금 그녀의 구루므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거나 돋보기로 햇살을 모아 종이를 태우며 놀기) 못지않은 패미니즘적 취미를 가지고 있다. 골무나 실패를 가지고 놀다 달팽이관을 통해 환청이라도 들렸을까. 너는 내 꼬니까 내가 나간 후에도 꼼짝말고 골무속에 있으라거나, 불어난 실패를 차분하게 정리해놓으라거나, 좀 더 나아가 소년1의 회색 기억 속에는 어머니 이전 한 여자일 수밖에 없었던 당신, 그녀의 뚫린 상처를 메워주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작동되었거나, 예스나 노우 가부간의 획일적인 답을 요구하지 않는 상상. 나의 시 읽기는 결국 자기 그림자를 투영시키며 노는 반사활동일 것이니.
드디어 흰 길이 떠올랐다고 말하는 소년1의 길 세 번 째 단락에서는 긴 서사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것은 누구의 것이랄 수 없는 공동경험과 사유의 길이다. 역사요 자그만 시간이다. 시인가 소설인가 하는 장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시인은 소설 세 권 분량 혹은 삼겹살 정도로 질기고 두꺼운 어머니의 좌절을 듣는다. 이미 들었을 이야기를 떠올린다. 그때 동시진행형으로 떠오른 길은 흰 길이 아니라 푸른 길이다. 아주 들래놓고서 늙은 여류 한담가라고 말하며 것도 모자라 돌아가신(살아계실지도 모르고)어머니와 결합을 시켜 버린다. 소년은 삼각형구도의 한 꼭짓점에 서 있고 두 여자는 나머지 길 모서리에서 각각의 글썽한 눈매로 앉아있다. 소년이 의혹스러워했던 것처럼 셋이 떠올린 각자의 세계가 나도 궁금하긴 마찬가지다. 길은 각자 머릿속의 그림으로 이어놓은 푸른 환상일까.
르네 지라르의 삼각형 욕망 이론에 보면 모든 욕망은 중재자에 의해 암시된 가짜 욕망으로 삼각형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한 개인이 무엇을 욕망하다는 것은 그 개인이 지금의 자기 자신으로 만족하지 못해 자기 자신을 초월하고자 하는 것이며, 이때 초월은 자기가 욕망하게 되는 대상을 소유함으로써 가능하다는 뜻이다. 돈키호테가 이상적인 방랑의 기사가 되기 위해 아미디스라는 전설의 기사를 모방했듯이. 소년1도 결국 자기를 중심점으로 시작하여 두 여자의 소실점을 더 이상 분절시키지 않는다. 나이든 여자와 오래된 여자 이쪽저쪽을 하나로 본 다음에서야 가뭇한 유년의 강둑을 지나, 그 미루나무 숲길 위를 아무렇게나 배회했던, 빛나는 이마를 가진 소년과 해후를 갖는다. 표지 겉장에 그려진 상당히 유감스럽던 그녀와도 화해를 한다. 그녀의 늙어빠짐과 자신의 그것 아니, 그녀의 푸르른 유방과 자신의 반짝이는(햇살에 반사되어)이마가 한 절정을 만난다. 만나는 곳이 곧 길이다. 회색에서 출발하여 희고 푸른 길로 돌아가고 있다. 우리가 찾는 길 역시 푸른 자리일까.
우리 밟고 가는 모든 길들은 / 정우영
1
길 위로도 길이 지나고 길 아래로도 길이 지난다. 이 평범한 사실을 깨달은 게 그리 오래지 않다. 사람도 웬만큼 나이를 먹으면 예지가 번득이는 모양이다. 어느날 갑자기 길이 느껴졌다.
2
내 말이 믿기지 않거든, 내가 시키는 대로 한번 해보라. 저녁 어스름 얕게 깔리는 시각, 오래된 느티나무에 등을 기대고 반드시 동남방을 향하여 오줌 줄기를 세울 것(나무는 신령기가 느껴지는 나무라면). 그리고 골고루 당신 주위에 뿌릴 것. 마치 비의(秘儀)를 집행하는 접신자처럼, 그리하면 틀림없이 당신의 발밑에서 신음소리 같은 게 들려올 테니. 그때 눈 쫑긋 세워 둘러보면 마침내 보일 것이다. 당신 발아래 웬 사람의 어깨가 놓여 있음을. 걸어온 길 돌아다보면 그 길이 실은 수많은 사람들의 어깨와 등과 머리였음을. 거기에 화인처럼 찍힌 당신의 익숙한 발자국들을.
3
곤혹스러워 발 떼려고 할 때, 분명 당신 어깨가 시려올 것이다. 고개 들어 쳐다보지 않아도, 누군가 당신을 밟고 지나가는게 선득하게 느껴질 것이다. 어르신들이 유달리 어깨가 시리다 하고 등이 저리다 함은 다 이 때문이다. 살아오신 동안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어깨나 등을 내맡겼던 것이다.
푸르다고 느낄 수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빛의 배경 때문이다. 더듬으며 지나왔던 길이 번득이는 예지 속에서 느낌만으로 일어선다. 길은 대지와 바람과 막다름의 통로이기도 하나 유일한 방편이요 여러 방법이기도 한 모습으로 흔들렸다. 소년2는 미루나무가 아니라 느티나무 아래서 자신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한다. 모든 자동차들이 속도를 내기엔 시야가 희미한 저녁 오륙시, 다소 위험한 시간의 스릴을 안고 오줌을 누는 소년2의 희열을 본다. 느티나무가 마주서서 본다. 나무의 이름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여자의 방사야 한 남자 앞에서만 이지만 남자의 방뇨는 굳이 특별한 나무 앞에서 하란 법이 없다. 다만 비의(秘儀)를 집행하는 접신자처럼 골고루 뿌려주면 된다. 이때 후자의 행위가 더 신비스럽다고(이렇게 말하면 남성존중사상을 가졌다고 찬탄을 들을지도)한다면 그건 비의를 집행하는 제사장의 모습을 갖추었을 때의 경우에서다. 모든 길 모든 아버지의 가슴에 화인처럼 찍어두었을 발자국들이 곤혹스럽다.
어깨가 시린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3월에 내리는 눈(雪)때문이 아니었다. 발밑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로 혼란스럽던 것이 차츰 어깨를 밟고 지나갔을 또 지나갈 발자국들로 선득해진 까닭이다. 층층계단을 화급히 올랐던 발자국들이 뜨거운 횃불을 들고 달리던 말밥굽 소리들이 매양 한 자리에 정지된 얼룩으로 남겨진 것을 본다. 가끔은 고인 물처럼 얼룩이 살아나 눈깃과 어깨선을 넘어 출렁이기도 할 것이나 눈발의 눈부심으로 곳곳으로 흩날리기도 할 것이나 그것은 고통의 어깨요 오래전 너무나 쉽게 너무나 자주 따스하게 빌렸던 무너진 너의 어깨였던 것이다. 언제 한 번 더 저 먼 바다를 건너와 여린 손톱 위에 앉았다 사라질 아침이슬을 보며 화사하게 기댈 것인가.
2010. 3. 11 오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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