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최하림 <굴참나무 숲에서 아이들이 온다>外 5편

미송 2014. 10. 17. 21:44

 

굴참나무 숲에서 아이들이 온다 / 최하림

 

굴참나무는 공중으로 솟아오른다
해만 뜨면 솟아오르는 일을 한다
늘 새롭게 솟아오르므로 우리는
굴참나무가 새로운 줄 모른다
굴참나무는 아침 일찍 눈을 뜨고
일어나자마자 대문을 열고 안 보이는
나라로 간다 네거리 지나고 시장통과
철길을 건너 천관산 입구에 이르면
굴참나무의 마음은 벌써 달떠올라
해의 심장을 쫓는 예감에 싸인다

그때쯤이면 아이들도 산란한 꿈에서
깨어나 자전거의 페달을 밟고 검은 숲 위로
오른다 볼이 붉은 막내까지도 큼큼큼
기침을 하며 이파리들이 쏟아지듯 빛을
토하는 잡목숲 옆구리를 빠져나가
공중으로 오른다 나무들이 일제히
손을 벌리고 아이들이 일제히
손을 벌리고 아이들은 용케도 피해간다
아이들의 길과 영토는 하늘에 있다

그곳에서는 새들과 무리지어 비행할
수가 있다 그들은 종다리처럼 혹은
꽁지 붉은 비둘기처럼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포르릉 포르릉 날며 흘러
내리는 햇빛을 굴참나무처럼 느낄 수 있다

 

 

밤에는 고요히 어둠을 본다 최하림

오늘 아침에도 버드나무가 몸 비비는 소리 들으며
눈을 뜨고 일어나려니 저 멀리 立巖山 쪽으로
새들이 골짝을 만들며 내리는 것이 보인다

강가에서 다 자란 풀들이 시끄럽게
이파리를 날리며 동쪽으로도 서쪽으로도 쏠린다

오후엔 굵은 비가 들녘을 때렸다
순간 자연의 평화가 깨지면서 넘실거렸다

나는 버드나무 아래로 송사리 피라미 물방개 같은 것들이
굽이치는 물 속으로 거칠고 맵시있게 노닐면서
사라지는 것을 본다

밤에는 고요히 어둠이 온다
나는 더듬거리며 '어둠이여'라고 부른다
어둠이 이불처럼 감싸고 잠들 준비를 하게 한다

시집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1998)

 

  

 

빈약(貧弱)한 올페의 회상(回想) / 최하림

 

나무들이 일전(日前)의 폭풍처럼 흔들리고 있다

먼 들을 횡단하여 나의 정신(精神)은 부재(不在)의 손을 버리고
쌓여진 날이 비애처럼 젖어드는 쓰디쓴 이해(理解)의 속
퇴각하는 계단의 광선이 거울을 통과하며 시간을 부르며
바다의 각선(脚線) 아래로 빠져나가는
오늘도 외로운 발단(發端)인 우리

아아 무슨 근거(根據)로 물결을 출렁이며 아주 끝나거나 싸늘한 바다로
나아가고자 했을까 나아가고자 했을까
기계(機械)가 의식의 잠속을 우는 허다한 허다한 항구(港口)
내부(內部)에 쌓인 슬픔을 수없이 작별하며 흘러가는 나여
이 운무(雲霧) , 찢겨진 시신(屍身)들이 걸린 침묵 아래서 나뭇잎처럼
토해 놓은 우리들은 오랜 붕괴의 부두를 내려가고
저 시간들, 배신들, 나무와 같이 심은 별
우리들의 소유인 이와 같은 것들이 육체(肉體)의 격렬한 통로(通路)를 지나서

불명(不明)의 아래아래로 퍼져 버리고
울부짖음처럼 눈발이 날리는 벌판의
차가운 가지 새에서
헤매임의 어휘에 걸려 나나히
무거운 팔을 흔들고

나의 가을을 잠재우라 흔적의 호수(湖水)
지금은 물속의 봄, 가라앉은 고향의
말라들어가는 응시에서 핀
보라빛 꽃을 본다

나무가 물속처럼 커오르고
푸르디푸른 벽에 감금한 꽃잎은 져내려
분홍빛 몸을 감싸고
직모물의 무늬같이 부동(不動)으로 흐르는
기나긴 철주(鐵柱)를 빠져나와 우리들은 모두 떠오른다

여인숙(旅人宿)에서처럼 낯설게 임종한, 그 다음에 물이 흐르는 육체(肉體)
아득히 다가와 주고 받으며 멀어져가는 비극의 시간은
서산(西山)에 희고 긴 비단을 입고 오고 있다
아주 장대하고 단순한 바다 위에서
아아 유리디체여!
(유리디체여 달빛이 흐르는 철판 위
인간(人間)의 땀이 어룽져 있는 건물 밖에는
달이 떠 있고 달빛이 기어들어와
파도소리를 내는 철판 위
빛낡은 감탄사를 손에 들고 어두운
얼굴의 목이 달을 보면서 서 있다

푸르디푸른 현()을 율법(律法)의 칼날 위에 세우라
소리들이 떨어지면서 빠져나가는 매혹하는 음절로 칠지라도
너는 멀리 고향(故鄕)을 떠나서 긴 팔굽만을 슬퍼하라
들어가라 들어가라 계량하지 못하는 조직 속
밑푸른 심연 끝에 사건이 매달리고
붉은 황혼이 다가오면 우리들의 결구(結句)도 내려지리라 

아무런 이유도 놓여 있지 않은 공허(空虛) 속으로
어느 날 아이들이 쌓아올린 언어
휘엉휘엉한 철교에서는 달빛이 상처를 만들며 쏟아지고
때없이 달빛이 걸린 거기

나는 내 정체(正體)의 지혜(知慧)를 흔든다.

들어가라 들어가라 하체(下體)를 나부끼며
해안(海岸)의 아이들이 무심히 선 바닷속으로

막막한 강안(江岸)을 흘러와 쌓인 사아(死兒)의 장소(場所). 몇 겹의 죽음.
장마철마다 떠내려온, 노래를 잃어버린 신()들의 항구(港口)를 지나서.

유리를 통과한 투명한 표류물(漂流物) 앞에서 교미기(交尾期)의 어류(魚類)들이 듣는 파도소리
익사한 아이들의 꿈

기계가 창으로 모든 노래를 유괴해간 지금은 무엇이 남아 눈을 뜰까

……하체(下體)를 나부끼며 해안(海岸)의 아이들이 무심히 선 바다 속에서.

 

 

굴참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 만져보며 한가하게 나무와 숲과 바람과 아이의 얼굴을 해 가지고 놀고 싶다. 우연히 본 그의 시에는 아이들이 자주 등장한다. 기다림의 상징 혹은 신성한 은유로 느껴지는 아이들 아이들의 모습. 새소리로 새의 날갯짓으로 그려진 아이들은 맑고 투명하다. 어쨌든 아이들처럼 놀고 싶은 주말, 아이들과 놀기 위해 (일의 개념도 있지만집을 나선다세 번째 시는 약간 난해하다 느꼈는데, 4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읽으니 적중한 예언처럼 느껴진다섬칫하다   2010. 4 - 2014.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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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白雪賦 1/ 최하림

 

  몇 번씩이나 철이 바뀌고 殘雪이 들을 덮어도

  달라지는 것 없는 산이여

  올해도 大關嶺에서는 산사람들이

  겨울을 맞아들이면서 자작나무 불을 피우고

 

  얼어 꺾어지는 가지와 가지 나무와 나무 산과 산

  하늘에는 별이, 별에는 눈이, 눈에는 산사람들의

  꿈이 결빙하여 얼어터지는 소리

  그 소리 위로 내리는 밤눈 소리

 

  눈에 보이는 사물들은 모두 다

  제 나름의 소리를 하고

  소리들이 모여들어 산을 울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의

  事理를 만든다

 

  언제나 가난하게 하고

  언제나 산에서 살게 하는

  事理 어리석은 事理

 

  이런 밤엔 새로운 기억과 말을 가지고

  平原으로 가 밤눈 소리를 들어야 한다

 

  모든 죽어간 사람들의 얼굴을 그리고

  그들의 마지막 표정에 새겨지던 고난의 희망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또 이런 밤엔

  거리에서 방황하는 사내와 옥중 죄수들

  그들의 경험 속에 내포된 벽지의 술집여자 눈먼 아이

  그들의 눈과 발 그들의 아픔

 

  그밖에도 그들의 것으로 인식되어지지 않는 경험이

  우리들에게서 사랑으로 화하는 것을 확인하고

  그 사랑의 밤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야 한다

 

  사랑이란 있으면서 없는 것

  짐승과 인적이 지나도 하얗게 雪原은 열려 있는 것 

 

  근육이 튼튼한 사내들이 밤거리를 헤매는

  척박한 식민지 밤 눈이 내리고

  民家의 불빛 따뜻한 모습으로 길을 비춰주는데

  끝없구나 살아서 걸어가는 길

  학대받고 걸어가는 길

  친구도 이웃도 형제도 나를

  문 밖으로 밀어내어

  유랑의 무리로 밀어내어

  홀로 걸어가게 하는 길

  이다지도 자욱한 눈 속을

  걸어가게 하는 길

  어느 강가에서 어느 벌판에서

  우리들의 유랑은 끝날 것인가

  눈뜨지 못하는 넋들이 한 마음으로 모여들어

  어느 강물이 되고 바람이 되고 폭설이 되어

  가지도 지붕도 없이 넘어뜨릴 것인가

  걸어가거라 陳勝의 넋이여

  근육이 튼튼한 사내들이 밤거리를

  헤매는 척박한 식민지 밤

   시집 우리들을 위하여(창작과비평사, 1976)

 

 

  수천의 새들이 날갯짓을 하면서 / 최하림

 

  끝을 모르는 시간 속으로 새들이 띄엄띄엄 특별할 것도 없는
  날갯짓을 하면서 산 밑으로 돌아나간다 강물이 흘러 내려가고
  나무숲이 천천히 가지를 흔든다 이윽고 나무숲 새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와 번쩍이면서 수천의 그림자를 지운다
  새들은 하늘 높이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하늘 속으로 들어가 멈추어 있다가
  시간의 거울 속으로 빠져나가면서 
  거울과는 반대 방향으로 날갯짓을 한다
  하늘에는 수천 새들의 날갯소리로 시끄럽고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요요마는 거울 속에서
  거울의 부축을 받으면서 연주한다 황혼이 거울 속으로
  돌아든다 새들이 또다시 띄엄띄엄 간격을 두고
  날아가면서 꾸르륵꾸르륵 운다  

 

  계간 작가세계2000년 겨울호 발표

 

 

  

 

   가을편지 / 최하림

 

   그대가 한길에 서 있는 것은 그곳으로 가을이 한꺼번에 떠들썩

   하게 빠져 나가고 있다고 나에게 말해 주고 있는 셈이겠습니다.

   그대가 역두(驛頭)에 서 있다든지 빌딩 아래로 간다든지 우체국으

   로 가는 것도 수사가 다르긴 하되 유사한 뜻이 되겠습니다

   날마다 세상에는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나고

   바람과 햇빛이 반복해서 지나가고

   보이지 않게 시간들이 무량으로 흘러갑니다

   그대는 시간 위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대에게 나는 지금 결정의 편지를 써야 합니다

   결정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시간 위에 떠 있는 우리는 도무지 시간의 내용을

   알 수 없으니 결정의 내용 또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계간 작가세계 2006년 봄호 발표

 

 

최하림[崔夏林, 1939. 3. 7 ~ 2010. 4. 22] 시인

1939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  1964 조선일보신춘문예에貧弱한 올페의 回想>이 당선되어 등단저서로는 시집으로우리들을 위하여,작은 마을에서, 겨울 깊은 물소리,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 풍경 뒤의 풍경,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와 시선집 사랑의 변주곡, 햇볕 사이로 한 의자가, 판화 시선집 겨울꽃, 자선 시집 침묵의 빛그리고 시전집 최하림 시 전집등이 있음 그 밖에 미술 산문집 한국인의 멋, 김수영 평전 자유인의 초상과 수필집 숲이 아름다운 것은 그곳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최하림 문학산책 시인을 찾아서등을 펴냄. 11회 이산문학상, 5회 현대불교문학상, 2회 올해의 예술상 문학 부분 최우수상 수상. 전남일보 논설위원, 서울예술대학 교수 역임. 2010년 간암으로 他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