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산동 반지하동굴 유적지 / 김성규
가슴을 풀어헤친 여인,
젖꼭지를 물고 있는 갓난아이,
온몸이 흉터로 덮인 사내
동굴에서 세 구(具)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시신은 부장품과 함께
바닥의 얼룩과 물을 끌어다 쓴 흔적을 설명하려
삽을 든 인부들 앞에서 웃고 있었다
사방을 널빤지로 막은 동굴에서
앞니 빠진 그릇처럼
햇볕을 받으며 웃고 있는 가족들
기자들이 인화해놓은 사진 속에서
여자는 아이를 낳고 젖을 먹이고
사내는 짐승을 쫒아 동굴 밖으로 걸어나갔으리라
굶주린 새끼를 남겨놓고
온몸의 상처가 사내를 삼킬 때까지
지쳐 동굴로 돌아오지 못했으리라
축 늘어진 젖가슴을 만져보고 빨아보다
동그랗게 눈을 뜬 아기
퍼렇게 변색된 아기의 입술은
사냥용 독화살을 잘못 다루었으리라
입에서 기어다니는 구더기처럼
신문 하단에 조그맣게 실린 기사가
눈에서 떨어지지 않는 새벽
지금도 발굴을 기다리는 유적들
독산동 반지하동굴에는 인간들이 살고 있었다
고시원은 괜찮아요 / 차창룡
이 선원의 선승들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오직 혼자이지요
홀로 존귀한 최고의 선승들입니다
108개의 선방에는 선승이 꼭 한명씩만 들어갈 수 있어요
여느 선방과 달리 방 안에서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습니다
잠을 자든 공부를 하든 밥을 먹든 자위행위를 하든
혼자서 하는 일은 무엇이든 괜찮습니다
가끔 심한 소음이 있어도 자기 일이 아니면 가급적
상관하지 않습니다 정 참지 못하면
총무스님에게 호소하면 됩니다
중국 일본 필리핀 말레이시아 방글라데시 그리고 한국
식탁에는 온통 외국인뿐입니다
이곳은 외국인을 위한 선원인 것이지요
금지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공양간에 함께 모인 선승들은 말이 없습니다
말은커녕 입도 벌리지 않고
그들은 밥을 몸속으로 밀어넣습니다
다년간 수행한 덕분이지요
오래 수행한 선승일수록 공양할 때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뱃속으로 고요의 강이 흐르고 흘러 바다에 이르면
가끔 화장실에 갑니다 화장실은 늘 만원입니다
괜찮습니다 참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수행법이니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불이 나도 괜찮아요
13호실에 비상용 사다리가 있지만
서로 간섭하지 않는 미덕이 습관이 되어
나와 직접 관계되지 않은 일에는 끼어들지 않습니다
괜찮아요 불이 나도 어차피 열반에 들면
누구에게도 방해되지 않을 테니까요
이것이 날개다 / 문인수
뇌성마비 중증 지체 언어장애인 마흔두살 라정식 씨가 죽었다
자원봉사자 비장애인 그녀가 병원 영안실로 달려갔다
조문객이라곤 휠체어를 타고 온 망자의 남녀 친구들 여남은 명뿐이다
이들의 평균수명은 그 무슨 배려라도 해주는 것인 양 턱없이 짧다
마침, 같은 처지들끼리 감사의 기도를 끝내고
점심식사중이다
떠먹여주는 사람 없으니 밥알이며 반찬, 국물이며 건더기가
온데 흩어지고 쏟아져 아수라장, 난장판이다
그녀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정은 씨가 그녀를 보고 한껏
반기며 물었다
선생님, 저 죽을 때도 와주실 거죠?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왈칵, 울음보를 터트렸다
정식이 오빤 좋겠다, 죽어서........
입관돼 누운 정식씨는 뭐랄까, 오랜 세월 그리 심하게 몸을 비
틀고 구기고 흔들어 이제 비로소 빠져나왔다, 다 왔다, 싶은 모
양이다 이 고요한 얼굴,
일그러뜨리며 발버둥치며 가까스로 지금 막 펼친 안심, 창공
이다
'운문과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영효 <저녁의 황사> (0) | 2015.01.23 |
---|---|
최하림 <굴참나무 숲에서 아이들이 온다>外 5편 (0) | 2014.10.17 |
조정권 <산정묘지(山頂墓地) 1> 外 (0) | 2014.09.25 |
이규리『 웃지마세요, 당신』 (0) | 2014.08.12 |
김충규 <우체국 계단>外 (0) | 2014.08.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