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에 감염된 개미보다 비참한 현대인이여!"
[김영종의 '잡설'·1] '잡설'의 연재를 시작하며
- 간디스토마 아기 코만도' 이야기
자연 다큐멘터리 <파브르 곤충기>를 보면, 양의 간으로 들어가기 위해 개미의 뇌를 장악한 간디스토마 기생충 이야기가 나온다. 그 영상물을 본 지 벌써 5년쯤 지났지만, 현대인의 처지가 바로 저거라고 생각하며 소름끼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간디스토마 기생충이 개미의 뇌를 장악해 무슨 짓을 하는지만 간단히 소개한다. 개미 뱃속으로 들어간 여러 마리 유충 중에서 아기 코만도 한 마리가 개미의 뇌로 들어가 뇌의 통제권을 잡는다. 턱을 열고 닫고 하는 신경 근처에 자리 잡고 앉은 아기 코만도는 개미들을 매일 저녁 밖으로 나오게 할 뿐 아니라 식물의 꼭대기까지 기어오르게 한다.
이 명령에 따라 개미들은 양이 풀을 뜯으면서 자신들을 먹으러 와주기를 기다리며 양턱으로 꽃이나 잎의 줄기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꽉 붙들고 있다. 아무도 먹으러 와주지 않는다 해도 이렇게 턱을 꼭 다물고 몸을 떨면서 해가 다시 뜰 때까지 꼼짝 않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때 간디스토마 유충이 개미의 뇌와 턱을 동시에 놔주면 개미는 정상으로 돌아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니, 내가 지금 어디에 와 있는 거야? 아, 그리고 뭘 하고 있는 거지?"
풀에서 내려온 이들 개미는 간디스토마 유충이 들어 있지 않은 정상적인 개미들과 어울리며 논다. 그러나 이것도 자기 뇌의 통제권을 빼앗기기 직전까지 잠시뿐이다. 더더욱 이상한 점은 꼭 신들린 듯한 이 개미들이 아무 풀에나 가서 매달리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은 양이 좋아하는 풀, 즉 목동주머니라 불리는 냉이와 개자리풀 같은 곳에 매달린다.
간디스토마 유충은 개미의 뇌를 놔주기라도 하지만 현대 문명의 유충은 결코 그런 자비조차 베풀지 않기 때문에, 현대인은 이 개미보다 더 비참하다고 할 수 있다. 나는 현대 문명 속에서 무엇이 이 코만도 유충인지 정체를 파헤치고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 탐색하기 위해 잡설의 연재를 시작한다.
원래 이 원고는 서로 관련이 깊은 세 권의 원고 가운데 하나인데, 가장 나중에 완성됐으면서도 가장 먼저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참고로, 모두 출간을 준비하고 있는 이 원고들을 잠시 소개하면, '바보 여신'이 현대 문명을 비판하는 <헤이, 바보 예찬>은 일종의 연설문으로 '잡설'은 바로 이 연설문의 주석서 격에 해당하며, <심씨부녀전>은 '잡설'의 사상이 녹아 있는 현대판 소설 심청전으로서 (판소리체의 연장선상에 있는) '잡설체'로 쓰였다.
거대 담론과 일상에 대한 오해 ①
술자리에서 들은 말이다. 작가 아무개 씨가 어린이 책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데 인기가 좋다고 한다. 거창한 소리보다는 일상의 이야기를 잘 꾸며주어야 아이들이 그것을 통해 교육적으로 훌륭하게 계발된다는 것인데, 혹할 만한 얘기라 하겠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그 작가가 쓴 책을 보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역겨움 섞인 조소가 흘러나왔다. 기억도 하고 싶지 않은 내용으로, 시장 안에 있는 상점에서 엄마가 아이와 함께 옷가지들을 사고 어쩌고 하는 생활 이야기다. 이 가냘픈 작가와 다투고 싶지도 않거니와 내가 다루려는 주제도 아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살펴볼 일도 없다.
그러나 거대 담론이 퇴조하고 일상이 각광받는 시류에 편승해 여기저기서 오피니언 리더들이 일상의 담론을 들고 나오는데, 이게 참으로 가관이다. 이들은 이런 흐름을 이끌어낸 포스트모던 사상의 절박성에는 눈감은 채, 단어가 풍기는 인상 정도를 그럴듯하게 만들어 말하면서 마치 새로운 깃발이라도 든 것처럼 아우성을 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왜 이렇게 짝퉁이 판치는지 불쾌하기 짝이 없다.
밀레는 감자가 석류보다 아름답지 못하다는 건 일반적인 견지에서 바라보는 눈일 뿐이라며, 목적이 고상하기만 하면 지상의 모든 사물이 숭고함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소재라고 말했다. 여기서 일상의 강조는 '일반적인 눈'을 부각시키려는 게 결코 아니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 즉 일반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거대 담론에서 벗어나 개별의 것을 특별하게 보는 것이다.
자질구레한 일상, 그건 그냥 자질구레할 뿐이다. 도대체 그게 무슨 수로 삶을 기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아이가 예쁜 신발을 선물 받고 뛸 듯이 기뻐하는 이유는 생활 따위를 훌쩍 뛰어넘어 그 신발이 아이의 분신이자 정령이기 때문이다. 여행이 즐거운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일상에서 벗어난 해방감, 그리고 선물로 대하는 여행!
자본주의는 현대의 일상을 생산한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 삶의 불꽃을 빼앗는 일상, 다른 생명과의 유대를 말살하는 일상을 생산하는 것이다. 작가라는 자가 이런 것을 어린아이에게 교육적인 양식으로 주려 한다니!
예쁜 신발은 돈을 주고 사야 한다. 사지 않으면 선물할 수가 없다. 그러나 아이를 기쁘게 하는 것은 그걸 살 수 있는 돈이 아니라 선물이다. 상품으로서의 예쁜 신발이 아닌 것이다. 일상이 기쁨을 주는 까닭은 그것이 바로 선물로서의 일상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의 일상이란 우유병이 아줌마가 되고, 아빠의 라이터가 태권도장 아저씨가 되는 세계다. 아이들은 판타지 속에서 살고 있다. 친구가 신은 예쁜 신발을 갖고 싶을 때 아이들은 자기 얼굴을 친구의 얼굴과 바꿔버린다. 갓난쟁이는 까꿍 할 때마다 새로운 우주와 만난다. 우리는 아이들의 이 세계를 왜 그토록 아름답게 여기는가? 바로 아이들의 일상이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가나 평론가, 교육자, 기자, 편집자 등 이른바 오피니언 리더들이 최근 생활 동화다 조기 교육다 해서 그 판타지를 깨부수고 있다. 이들은 자기들이 자본주의의 첨병인 줄도 모르고 자본주의의 획일화에 대항해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 착각의 근저에 바로 거대 담론에 대한 짜증과 일상에 대한 아첨(이익)이 있다. 시류에 따르니 돈을 쉽게 벌 수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단어가 풍기는 이미지가 '개성을 중시하는 다양화'로 보이지 않겠는가. 그러니 꿩 먹고 알 먹기다.
이런 풍토에서 거대 담론과 일상에 대한 오해가 생겨났다. 오피니언 리더들이 잘못된 눈을 하고 있기 때문에 오해가 생긴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인가? 그들은 적어도 각 분야의 내로라하는 전문가들 아닌가? 사실을 말하면, 그렇기 때문에 잘못된 눈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전문가란 '방식'을 통해 본래의 목적을 제거해버림으로써 '이전의 체계'를 견고하게 만드는 자이니 안 그럴 수 있겠는가? 게다가 대부분 수박 겉핥기 전문가들이라, 자기들 하는 일이 이전 체계를 견고히 하고 있다는 것조차도 모른다. 전문가의 자의식이라 할 수 있는 내성(內省)마저 이들에겐 없으니, 똥인지 된장인지 분간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다.
수많은 세월 동안 눈앞에 널려 있던 일상에 대해서 단 한 마디도 없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서양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너나없이 일상을 주워 삼키는 이들은 일상을 꼭 '방식'으로서 설명한다. 그래야 전문가 소리를 듣고 밥 빌어먹고 사니까 이해는 간다. 아무튼 일상은 이들에게 '새로운 방식'인 것이다. 앞에서 말한 작가도 일상을 생활동화라는 '방식(형식)'으로 꾸며내자고 이야기하고 다닌다지 않는가. 이 같은 '방식'의 속임수에 대해서는 다른 장에서 상술할 것이다.
오피니언 리더들이 그들의 잘못된 눈에서 벗어나려면 어린이의 눈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일상이 밀레의 감자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려면 '선물로서의 일상'이 돼야 한다. 그것은 어린애가 선물로 받은 예쁜 신발이다. 이것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보자.
"오피니언 리더? 바로 그들의 말을 의심하라"
거대 담론과 일상에 대한 오해 ②
마르셀 모스는 <증여론>에서 원시 사회뿐 아니라 문명 사회에서도 예전에는 물건이 모두 선물의 의미를 가졌음을 밝혔다.
레스(res : 물건을 뜻하는 라틴어-필자)가 원래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에 불과한 무기물(無機物), 즉 오늘날과 같이 된 거래의 단순한 수동적인 대상이 아니었다는 것은 틀림없다. 이 말에 대한 가장 훌륭한 어원 연구는 그 말을 증여, 선물, 마음에 드는 물건이라는 뜻을 지닌 산스크리트의 라(rah)·라티흐(ratih)와 비교하는 것인 듯하다. 레스는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증여론>, 마르셀 모스 지음, 이상률 옮김, 한길사, 204~205쪽)
과연 독자 여러분은 과거와 현재의 개념 중 어느 것이 마음에 드는지? 인류 수백만 년 동안 선물로서의 일상을 살아왔다. 그리고 사람과 물건을 구별하지 않았다. 물건을 효용과 이익의 개념으로만 본 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아주 짧은 시간에 불과하다. 물건에는 생명이 숨 쉬고 있다. 옛사람들은 '살아 있는' 물건을 가족으로 대했다. 그래서 교환이라는 경제행위를 하더라도 선물의 증여라는 형태를 취했다.
이처럼 생명감 넘치던 인류의 일상이 삶의 상승과 고양을 상실함으로써 어떻게 상품의 일상으로 주저앉아버렸는지 아래의 예는 잘 보여준다.
"정령이 깃든 나무가 있다. 원시인들의 영혼은 나무를 통해 하늘로 올라 다녔다. 문명이 발달하여 나무의 역할을 사다리가 대신하게 되었다. 천국에 오르는 계단이라는 것은 나무의 대역인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인간은 상승할 수 있었다.
계단을 둥글게 말면 톱니바퀴가 된다. 기계는 톱니바퀴가 두 개 이상 맞물려 도는 메커니즘이다. 이 기계가 아날로그 세계를 다룬다. <모던타임스>에서 찰리 채플린은 톱니바퀴 안에 들어가 아무리 뛰어도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아무리 뛰어도 절대로 상승할 수 없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엘리베이터 없는 도시를 상상할 수 없듯이 현대인은 톱니로 돌아가는 엘리베이터 안에 갇혀 오르락내리락할 뿐이다.
톱니바퀴를 0과 1로 철저히 단순화시킨 것이 디지털이다. 인류는 톱니바퀴와 디지털에서 편리한 상품을 제공받는 대가로 하늘로 오르는 우주목도 천국에 오르는 계단도 잃어버렸다. 현대인의 일상은 러닝머신 위에서 열심히 달리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문명의 형벌이 아닐 수 없다." (오래전에 본, 문명 비판을 다룬 다큐멘터리의 내용을 희미하게나마 기억을 살려보았다-필자)
세상이 망조가 들어서, 어린이 책 작가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선물을 고대하는 동심에다 대고 엄마랑 상점에서 산 예쁜 옷이 정령이 아니라 상품이라고 교육하고 있다. 아이의 예쁜 옷은 누가 더 많은 돈을 줘도, 또는 잃어버려도, 또는 도둑맞아도 끝까지 아이의 옷이다. 그 옷은 아이를 예쁘게 해주는 정령이고 가족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나마 동심에 비견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도 동심 이상으로 현실의 도전을 받고 있다. 사랑은 아주 특별한 선물인데, 이 특별함은 사람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찾아온다. 사랑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이 아름답게 감자를 그린다. 밀레처럼. 사랑은 상품이 되지 않으려고 격렬하게 저항한다. 상품이 되면 감자보다 석류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일상의 모든 것에 효용과 이익이 아니라 선물과 사랑의 태도를 취한 사람들은 세계에서 도태되었다. 미개인으로, 열등 민족으로, 사회 부적응자로, 실패자로, 혁명가로. 그러나 간디와 같은 위인들은 이런 사람들 속에서만 나온다.
인류가 추구하는 삶은 결국 어떤 의식과 감정으로 어떻게 살아가느냐로 귀착된다. 이것은 거대 담론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요컨대 어떤 사회인가를 떠나서는 무의미하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사회를 바꾸려는 시도가 줄기차게 있어왔고, 거대 담론이 위력적일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근대의 혁명 또는 개혁은 선물로서의 일상을 파괴하는 데 충실했다. 이것이 대중이 거대 담론을 기피하는 진정한 이유다.
거대 담론은 비판받아야 한다. 좌건 우건 간에 어떠한 거대 담론이든 자본주의가 관철시키는 일반화(밀레가 비판한 '일반적인 눈'. 일반화는 본질주의에서 나온다)를 견고히 하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서는 2부에서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그렇다면 선물로서의 일상과 궤를 같이하는 거대 담론은 무엇일까? 특별한 어떤 체계를 만들어내자는 게 아니다. 기존의 거대 담론을 파괴하고 전복해야만 '선물로서의 일상'이 동토를 뚫고 새싹처럼 나올 것이다. 지금 오피니언 리더들이 멋모르고 쓰고 있는 '일상의 담론'은 거대 담론의 줄기에서 뻗어 나온 수많은 가지나 잎사귀에 불과하다.
오피니언 리더들이 학계에서, 문단에서, 화단에서, 평단에서, 신문에서, 방송에서, 인터넷에서, 이러저러한 장에서 거대 담론을 폄훼하고 일상을 찬양하면서 거대 담론과 위상이 다르지 않은 일상을 거의 발악하다시피 전파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는 완전히 몽매한 소치다.
일상의 담론을 올바르게 제기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은 '일상'의 구체성을 통해 거대 담론의 문제를 폭로하고 있다. 16세기 이탈리아에 살았던 어느 방앗간 주인의 수난을 다룬 <치즈와 구더기>(카를로 긴즈부르그, 김정하·유제분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같은 역사서가 대표적이다. 방앗간 주인은 15년에 걸쳐 세 번 고발당하고 두 번의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가 결국 교황청에 의해 처형당했는데, 그 방앗간 주인의 일상과 항변을 통해 16세기 유럽 사회를 지배한 거대 담론의 허구성과 유해성을 생생히 들여다볼 수 있다.
자본주의는 '거대 담론의 위세'와 '일상의 초라함'도 좋아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거대 담론의 퇴조'와 '일상의 각광'도 즐긴다. 장사꾼에 불과한 오피니언 리더들이 떠들어대는 이야기 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위의 어느 경우에도 자신의 진실을 폭로하는 예언자들만큼은 싫어한다.
"죽은 예술 살리는 '소년 검객'이여 나오라"
검객과 제관
서산대사의 <선가귀감>에 "대장부는 부처님이나 조사 보기를 원수같이 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나는 이렇게 고쳐 말하고 싶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칼을 벼리고 검법을 익혀서 검과 한 몸이 되어 거대한 우상을 베어버리는 예술가를 찬미하고 싶다. 하나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이런 예술가가 보이지 않는다. 어찌된 일일까? 혹시 선비의 겸손이 인격의 기준이 된 오랜 전통 때문일까? 공자는 자신의 저술이 옛사람들의 가르침을 따른 것일 뿐 창작이 아니라고 했으니, 유서 깊은 한국 사회에서 충분히 그럴 법도 하다.
예술가의 혼이 자유롭게 날려면 먼저 알을 깨고 나와야 할 텐데, 그러기는커녕 혹시나 누가 알을 깰까 감시의 눈길을 떼지 않고 있다. 자신이 태어난 기존의 가치를 산산조각으로 부수어버리지 않고는 예술가는 아무것도 창작할 수 없다. 이것을 예술가로 거듭 태어남, 즉 재생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무당이 되는 과정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무당 역시 신이 내리는 순간, 몸이 산산이 부서지고 가마솥에 끓여지고 등등의 체험을 견뎌내면서 조각나고 용해된 그 몸이 새로운 몸으로 다시 맞추어지는 것이다.
이 새로운 몸에 대한 예술적 비유가 있다. '노퉁(Notung)'이라는 검이다.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니벨룽의 반지>, 리하르트 바그너 지음, 엄선애 옮김, 삶과꿈 펴냄)에 나온 신의 검. 이 검만이 세계를 지배할 권능을 지닌 '반지'의 소유자 용을 물리칠 수 있다. 그러나 검은 오래전에 두 동강이 난 채 접합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세계 최고의 대장장이가 반지를 차지할 욕심에 자신의 모든 기술을 쏟아붓지만 허당이다. 신의 검 노퉁이 용접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노퉁은 완전히 새로 태어나기를 원한 것이다. 어떤 최고의 기술로도 용접만 가할 뿐 새로 태어나게 할 수는 없었다.
신은 어느 날 나그네의 모습으로 나타나 대장장이에게 "공포를 결코 경험해보지 못한 자만이 노퉁을 새로이 불리리라"고 예언하는데, 그 직전에 대장장이는 이렇게 자조 섞인 한탄을 늘어놓았다.
"제일가는 대장장이도 도리가 없네!
내가 하지 못하는데, 이제 누가 그 칼을 용접하랴?
기적, 그것을 내가 어찌 알리!"
신이 가고 난 뒤 대장장이는 '공포를 결코 경험해보지 못한 자만이 노퉁을 새로이 불리리라.' 그런 일을 하기엔 난 너무 현명하지"라며 실의에 빠진다. 하지만 그는 '공포를 결코 경험해보지 못한 자'를 젖먹이 때부터 거두어 키우고 있었으니, 바로 이 작품의 주인공인 소년 지크프리트다.
소년은 대장장이한테서 조각난 노퉁을 가져다가 자신이 직접 칼을 불리고자 화덕 앞에 앉는다.
대장장이 : 네가 부지런히 기술을 연마했더라면 지금 정말로 도움이 되었을 것을. 그렇지만 너는 항시 배우는 데 태만했으니, 이제 와서 무슨 일을 제대로 하겠니? 소년 : 매일 복종만 했다면, 대가가 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 소년이 할 수 있겠어? 이제 꺼져. 일에 끼어들지 마. 안 그러면 함께 불 속에 떨어지고 말걸!
소년은 칼을 조각조각 나누어 이글거리는 용광로에 집어넣고 용해시킨다. 노퉁은 힘차게 되살아난다. 그사이, 대장장이는 소년을 죽이기 위해 부엌에서 몽혼약을 만든다. 소년은 그런 대장장이를 보고 소리친다. "예술가 미메(대장장이)가 이젠 요리하는 법을 배우신다 이거지. 대장질은 더 이상 입맛에 맞지 않나 보군."
어떤가? 오늘날 예술가는 이 대장장이와 같지 않은가? 노퉁을 집어 들고 용을 죽이러 가는 소년. 소년은 공포를 모르기 때문에 해낼 수 있었다. 숙달과 통달 후에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예컨대, 르레상스 미술서 바로크 미술이 나온 것은 르네상스 미술의 자연주의적 신조를 더 철저히 관철시킴으로써 이루어진 진보의 국면이 아니라 '새로운 심미안'의 발달에 연원을 둔 것이다. (<미술사의 기초 개념>, 하인리히 뵐플린 지음, 박지형 옮김, 시공사 펴냄)
새로운 심미안을 가진 예술가는 당대의 심미안이 매너리즘에 빠졌을 때 나타난다. 기왕 예로 든 르네상스 미술을 보자.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로 대표되는 16세기 고전미술은 그 정점(미켈란젤로)에서 예술가들이 자기 눈으로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었다. 이들은 당대의 신화가 된 미켈란젤로의 양식으로 작업하기 위해 벌거벗은 육체에만 매달리고, 균형 잡힌 아름다움은 모조리 도외시한 채 거대 효과만을 추구하며, 또 쓸데없이 육체를 비틀고 뒤틀어 단순한 몸짓과 자연스런 동작이 무엇인지에 대해 무감각하게 되었다."
이처럼 미켈란젤로의 광풍 이후 모든 아름다움은 그의 작품을 척도로 측정되었다. 예술은 이제 완전히 형식화하여 자연과는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았다. 무섭도록 눈이 멀어서 자기들의 타고난 풍요로움을 내던지고 거지처럼 가난해져버렸다. 매너리즘에 빠진 예술가들은 자기가 보고 느낀 것을 표현하는 기쁨을 잃어버린 채 현재의 세계 저편에 놓여 있는 '보편성'을 추구했으며, '도식화'한 작업은 훈련으로 익힌 고대 흉내 내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 결과, 16세기의 찬란했던 고전기 르네상스 미술은 뿌리부터 죽어갔다. 최고 수준의 기념비를 만들어내겠다는 허영심이 이런 과정을 재촉했다. 예술은 스스로 젊어질 수 없고, 오직 밖으로부터 구원받아야만 했다. (<르네상스의 미술>, 하인리히 뵐플린 지음, 안인희 옮김, 휴머니스트 펴냄, 295~301쪽)
여기에 소년이 노퉁을 들고 나타나 타락한 용을 단칼에 베어버린 것이다. 렘브란트로 대표되는 바로크 미술의 작품에서야 비로소 화가의 직접적인 관찰과 체험의 느낌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매너리즘 화가들의 거짓된 진술은 이런 태양빛을 받자 황량한 꿈처럼 부서지고 만 것이다." (<르네상스의 미술>, 301쪽)
한국의 화가를 배출하는 미술대학은 말 그대로 매너리즘의 전당이다. 석고 데생과 정물 수채화 등이 시험 문제로 나오고, 학생들은 몇 년 동안을 학원의 형광등 불빛 아래 팔이 떨어져나가도록 그리고 또 그린다. 그마저도 개성대로 그리는 게 아니라 대학이 원하는 그림을 공식처럼 외워서 그린다.
가장 감수성이 풍부한 청소년기는 이렇게 해서 구제불능으로 망가져버린다. 청춘이 구만리인 화가 지망생은 새로운 심미안을 가질 수 있는 토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생동하는 아름다움에서 아무런 기쁨도 느끼지 못하고 우상숭배자로 전락할 운명이 되는 것이다.
예술 교육을 전담한 대학은 거짓된 진술을 가르치고 등용문은 이들이 장악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매너리즘에 빠진 예술은 미켈란젤로라는 우상을 숭배하게 된다. 한국의 대학은 미켈란젤로 시대 이상으로 우상을 섬기는 기관이고, 거기에 빌붙어 먹고사는 자들은 우상의 위패를 모시는 제관들에 불과하다. 이들은 대장장이 미메처럼 예술을 빙자해 생기로 가득 차 있는 예술을 살해하고 있다.
두려움을 모르는 소년 검객이 나타나 우상을 단칼에 베어버리고 죽은 예술을 다시 살리기를 대망하는 건 과욕일까? 과욕이건 뭐건 그전에 명심할 사실이 있다. 절대적으로 자연에 대한 직접적인 감동만이 그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 감동은 반드시 밖에서 온다는 것. "예술은 스스로 젊어질 수 없고, 오직 밖으로부터 구원받아야만 했다"는 앞의 인용을 상기하자. 다시 말해서, 매너리즘에 빠진 예술은 알 속의 세계만을 전부로 알고 있기 때문에 알을 깨고 나올 수 없다는 것. 어미가 따뜻하게 품어주는 온기가 불가결한데, 어미의 이 온기란 바로 대자연이 아니고 무엇일까?
근대를 경과해오면서 경제 발전만을 중시한 결과는 예술 분야에서 특히 참혹하게 드러난다. 바그너 작품의 주인공인 소년 지크프리트는 낭만주의의 예술가상(像)이다. 낭만주의는 세계 예술사에서 이처럼 혁명적인 공헌을 했다. 근대 미학은 낭만주의 없이는 성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정확한 말이다. 그런데 한국은 낭만주의를 경험하지 못했다. (그런 마당에 낭만주의는 다시금 비판되어야 한다. 주제가 산만해지므로, 여기서는 비판을 나중으로 미루도록 한다.)
시대와 사조를 불문하고 예술은 자연에서 활력을 얻으며, 중심을 뒤바꾸는 변화는 반드시 변두리에서 일어난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다. 중심은 매너리즘이 활약하는 무대이며 우상이 숭배되는 본처다. 예술가가 검객이 되어 중심을 쳐부수지 않는다면 예술은 영원히, 비유컨대 죽은 부처, 죽은 예수를 봉향하는 우상숭배를 면할 수 없다.
보이지 않는 교활한 손은 중심이 아닌 곳에서는 예술이 아무 데도 설 자리가 없도록 모조리 학교로 거두어 가버렸다. 사정이 옛날과는 판이하게 달라져서, 공포를 모르는 소년이 더 이상 나오지 못하게 제도화해버린, 진보한 자본주의의 위력을 실감한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눈만 뜨면 다시 밖의 구원이 아름답게 펼쳐진다는 진실에서 힘을 얻는다. 마치 르네상스 매너리즘 화가들의 거짓된 진술이 젊은 루벤스나 렘브란트 같은 화가가 빚어낸 태양빛을 받자 황량한 꿈처럼 부서지고 만 것처럼, 단 한 사람의 검객만으로도 그런 기적은 일어난다.
'평론과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영종의 잡설} 소비 시대의 미학 (0) | 2010.06.12 |
---|---|
이명원 - 공명 또는 바람의 잔상(殘像) (0) | 2010.06.03 |
보이는 시와 보이지 않는 시의 결혼과 이혼 (0) | 2010.05.24 |
도종환<달은 져도 하늘을 떠나지 않는다> (0) | 2010.05.20 |
비극과 희극의 차이 (0) | 2010.05.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