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명 또는 바람의 잔상(殘像)
- 김경주 시에 대한 메모
이명원/ 문학평론가
시를 읽는 방식은 다양하겠지만, 때로는 분석적 태도보다는 직관이 감지해낸 어떤 이미지를 몽상하는 일이 맞춤해 보일 때가 있다. 김경주의 시집을 읽으면서도 나는 체계적으로 각각의 시편을 분석하는 것보다는 이 시인의 인식론에 대한 나의 직관에 가까운 사유를 펼쳐놓는 것이 좋을 듯했다. 시쓰기의 뿌리로서의 김경주의 세계인식의 방식을 내 식대로 유추해 보고자 했던 것이다.
시집을 열면, 많은 독자들이 깊은 인상을 느꼈음에 분명한 「내 워크맨 속 갠지스」라는 시가 보인다. 이 시는 “외로운 날엔 살을 만진다”라고 말한 후에, “내 몸의 내륙을 다 돌아다녀본 음악이 피부 속에 아직 살고 있는지 궁금한 것이다”는 행이 이어진다. 피부 속에 음악이 살고 있었다는 표현은 낯선 것이고, 음악이라는 추상어가 돌연한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이런 표현 속에는 시인의 몸 자체가 하나의 악기와 같다는 인식이 숨어있는 것 같다.
이 시인의 몸-악기는 그의 시 전반을 통해서 쉴 새 없이 바람의 잔상(殘像)을 남기고 있다. 김경주의 시 속에는 유난히 빈번하게 바람의 이미지가 등장하는데, 바람이 소리를 만들고 그것은 공명에 의해 가능해진다. 몸이 하나의 악기로 인식될 때, 사람의 울음조차도 사실 시인에게는 음악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세계와의 불화라는 표현을 우리는 많이 쓰는데, 그럴 때 울음은 마치 삶의 협화음에로 도달하기 위한 불협화음의 긴장과도 유사한 것이다.
바람은 그 기원을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소멸조차도 목격할 수 없다는 점에서, 고대인들에게는 ‘신의 호흡’처럼 신비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성경에도 태초에 ‘말’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그 소리(몸속의 바람!)의 형태로 존재하는 말이란 단번에 천지를 창조할 능력이 있을 정도로 신비하고 마술적인 힘을 가진 것이었다. 바람의 마술성은 우리 몸을 떠돌고 있는 바람이 빠져나감으로써 죽음이 완성된다는 간명한 진실에서도 확인되는 바다.
들숨과 날숨이 정지되고도 지속되는 삶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다. 그런 점에서 김경주의 시 속에서 울려 퍼지는 피아니시모(pp)로부터 포르티시모(ff)의 강도로 울려퍼지는 소리, 바람, 음악이라는 것은 시인의 세계인식론의 뿌리로 느껴지는 것이다. 김경주는 바람의 공명을 통해 가능해지는 소리, 그 비가시적인 율동과 소멸의 양식을 현실의 삶과 유비적 관계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인식론을 그의 시쓰기의 주선율로 보여주고 있다.
「내 워크맨 속의 갠지즈」에서 시인은 “지구의 반대편으로 날아가고 있는 메아리”를 생각하지만, 곧이어 반향처럼 “반대편에서 날아오”는 “영혼”을 기다린다고 말한다. 이때 바람은 영혼의 은유처럼 보이는데, 이어지는 연에서 시인은 붓다의 “방랑”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산양의 “외로움”에 대해서 말한다. 그럴 때 산양조차도 먼 곳의 별자리를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붓다를 빌어 시인이 말하고 있는 방랑, 외로움, 먼 곳에의 그리움(fernweh)은 이 시인이 지속적으로 변주하고 있는 낭만적 상상력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데, 그것은 바람의 방랑과 유사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바람에게 시인이 말하는 이역(異域)이란 게 있을까. 있다면 거쳐가는 모든 곳이 이역이고, 그런 점에서 바람은 영원한 방랑자와 유사한 것이다. 게다가 바람은 기원조차도 알 수 없고 그 소멸조차도 확인 불가능하다. 지구가 자전을 멈추지 않는 한 바람은 정주할 거처 없이 윤회와도 같은 자신의 생을 계속해야 하는데, 김경주가 생각하는 시인의 고행을 동반한 낭만적 방랑이란 이 바람의 속성과 유사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바람, 소리, 음악 등의 시적 동기(motif)들이 반복적으로 발성되는 김경주의 시속에서 그것들이 자주 죽음의 이미지와 연결된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탐닉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김경주 시의 바람은 “죽은 자들의 언어”(「저녁의 염전」)처럼, 어둡고 순간적이지만 적요로운 정지의 풍경을 독자들에게 자주 제시한다. 「저녁의 염전」에서 “죽은 사람을 물가로 질질 끌고 가듯이//염전의 어둠은 온다// 섬의 그늘들이 바람에 실려온다”고 시인이 말한 후에, 염전을 일컬어 “빛도 닿지 않는 바다 속을 그 소리의 영혼”이라고 부르면 안 되냐고 자문할 때, 무늬만을 그려놓고 떠나간 바람 없는 염전은 죽음의 처소가 된다.
김경주는 도달할 수 없는 것에 도달한다는 것의 비극적 열정과 이로 인해 파생된 도저한 절망을 ‘바람의 연대기’로 명명하기도 한다. “바람은 살아 있는 화석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사라진 뒤에도 살아남아서 떠돈다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 속에서 운다 그러나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바람의 세계 속에서 운다”(「바람의 연대기는 누가 다 기록하나」)는 시적 진술에서 그것은 잘 나타난다. 몸 속에서 공명하는 바람이 울음이고, 지구 전체가 생사(生死)의 끝없는 순환 속에서 내뿜는 울음이 바람이다. 인간의 유한한 울음은 기껏해야 그 영겁회귀하는 자연 속 바람의 울음에 비하자면 “희미한 웃음”에 불과하다는 것이 시인의 감각적 인식이다.
김경주가 ‘바람’이미지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이러한 인식은 소리(/음악)에 대한 그의 인식론적 태도에서도 동일하게 변주되고 있다. 다만 김경주가 그의 시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소리(/음악)은 대체로 단조의 어두운 음색을 동반하고 있거나, 쇤베르크의 무조음악처럼, 생의 발랄한 앞면보다는 어둡게 침잠하는 죽음의식의 잔상(殘像)을 환기시킨다.
주전자 속엔 파도소리들이 끓고 있었다
바다에 오래 소식 띄우지 못한
귀먹은 먼 곳의 물소리를 만지고 있었다
심해 속을 건너오는 물고기 떼의 눈들이
꽁꽁 얼고 있구나 생각했다
등대의 먼 불빛들이 방 안에 엎질러지곤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푸른 멀미를 종이 위에 내려놓았다
목단 이불을 다리에 말고
편지(片紙)의 잠을 깨워나가기 시작했다
위독한 사생활들이 편지지의 옆구리에서 폭설이 되었다
쓰다 만 편지들이 불행해져갔다
빈 술병들처럼 차례로
그리운 것들이 쓰러지면
혼자서 폐선을 끽끽 흔들다가 돌아왔다
외로웠으므로 편지 몇 통 더 태웠다
바다는 화덕처럼 눈발에 다시 끓기 시작하고
방 안에 앉아 더운 수돗물에 손을 담그고 있으면
몸은 핏속에서 눈물을 조용히 번식시켰다.
이런 것이 아니었다 생각할수록
떼죽음 당하는 내면들,
불면은 몸속에 떠 있는 눈들이
꿈으로 내려가고 있다는 건가
눈발의 마을의 불빛마저 하나씩 덮어가는데
사랑한다 사랑한다 그 안 보인다는 혹성 곁에
아무도 모르는 무한(無限)을 그어주곤 하였다
- 「폭설, 민박, 편지 1」 전문
이 시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폭설이 내리는 어느 민박집에서 “목단 이불을 다리에 말고” 외계를 향하여 편지(片紙)”를 쓰다가는 망설이며 태워버리는 한 외로운 시적 자아의 내면을 잘 드러내고 있는 시다. 지금 시적 화자의 내면은 주전자 속에 갇힌 물처럼 들끓고 있다. 화자는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 같다. 마치 기형도 시의 화자처럼 “이런 것은 아니었다 생각할수록/ 떼죽음 당하는 내면들”이라고 말하다가, 돌연 “사랑한다 사랑한다”라고 외치는 것을 보아, 시적 화자의 내면적 갈증과 동요가 자심함을 알 수 있다. “친구여 나는 위독하다/ 위문 와 다오” 했던 황지우를 연상시키는 “위독한 사생활들”의 기록, 그것이 편지다. 게다가 폭설마저 내리고 있다. 어두운 밤 바다에 내리는 폭설, 제 몸의 형태를 지우면서 심해를 향해 하강하는 눈의 형상은 자연이지만, 그 자연에 대한 시인의 동요로 보아 그것은 일정하게 죽음의식을 환기시키고 있다.
이 침잠하는 죽음의식을 환기시키는 시적 자아의 표상적 게슈탈트(gestalt)는 “폐선”이다. 그 폐선이 처해 있는 상태는 일종의 가사(假死)상태와 유사한데, 그것을 시인은 “귀먹은 배”로 표현하고 있다. 김경주의 시에서 소리의 반향이 사라져 있는 심해는 죽음의식을 환기시키는 한 중요한 표상인데, 그만큼 시인의 상상세계에서 소리가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시 속에서 폐선은 “끽끽” 흔들린다. 이렇게 바다에 귀 막고, 고립되어 있는 폐선의 이미지는 골방 속에서 낑낑거리며 편지를 쓰다 지우다를 반복하는 시적 화자를 닮고 있다. 그러나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폐선의 귀는 닫혀 있지만, 적어도 "심해 속을 건너오는 물고기 떼”가 있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눈조차 꽁꽁 얼어가고 있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또 다른 시적 자아(alter ego)임에 분명한 이 물고기 때들은 그러나 최소한 귀가 열려 있다. 그 열린 귀는 물고기의 몸, 즉 비늘이다. 심해의 물고기들은 인간이 들을 수 없는 가청주파수의 너머에서 소리를 제 몸으로 감각한다.
"폐선"이었던 시적 자아가 "물고기"로 변신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낡아빠진 폐선에서 유영하는 심해어로의 변신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최저희망을 환기시키고 있는 것처럼 나는 느껴진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시적 자아의 변신(metamorphosis)이란 그렇게 돌연한 것이다.
시인이 자아를 “물고기”로 표상하고 있다는 것은 「고등어 울음소리를 듣는다」에서의 어머니를 “고등어”로 간주하고 있는 태도에서도 잘 나타난다. 심해에서 밥상 위로 올라온 고등어의 죽음은 희생제의와 유사하다. 이 시의 시적 화자는 자신을 포함한 가족들(“보라색”)들이 결국 어머니의 살점을 파먹으면서 성장한 것 아닌가 하는 육친에 대한 죄의식에 빠져 있다. 그들의 생태란 “뼈도 남기지 않고 먹어치운 후 입 안의 비린내를 품고 잠드는” 식의 비만한 것이었다. 이제 투명한 고등어가 된 어머니는 “지느러미로 바닥을 치며 등뼈를 세”우고자 하지만, 그것은 도로의 안간힘이다. 오히려 시 속에서의 고등어-어머니는 죽어가고 있다. 아니면 이미 죽은 것이다. “심해 속에 가라앉아 어머니 조용히 보라색 공기를 뱉고 있다 고등어가 울고 있다”라고 시는 종결된다.
어머니에 대한 시인의 무거운 비애와 죄의식, 때로는 꽃무늬 팬티와 같은 다소 놀라운 발견은 김경주의 시에서 제법 빈번하게 등장하고, 특히 어머니의 울음소리는 여러 곳에서 발성되고 있지만,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심해와 물고기와 소리가 결합되는 양상이 김경주 시의 중요한 인식론의 표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이 시적 표상들은 김경주의 시에서, 현실을 아득하게 뛰어넘는 데서 가능해지는,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하강적’ 또는 ‘내재적 초월’의 양상을 띠고 있다. 특히 소리가 그러한데, 그것은 육체의 물질성의 형태를 갖추지 않은 차원에서도 살아 움직이는 비가시적인 실체, 차원의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이동하는 경계이월의 표상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경주의 시에서 사유되는 바람과 소리, 음악으로 변주되는 일련의 이미지들은 그가 초월세계에 비하면 비본질적이라고 판단하는 듯한 현실로부터의 도약과 비약을 가능케 하는 근거로서 작동하는 인식론적 지배소(dominant)인 것 같다. 그래서 김경주의 시 속에서 전개되는 운동에너지는 심해로 하강하거나 우주로 비약하는 것을 빈번하게 연출한다. 어두운 심해의 침묵 속에도 김경주는 명료한 소리의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고, 저 광막한 우주의 행성들도 음악소리를 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그럴 때, 바람은 이곳과 저곳을 막힘 없이 운행하는 초월적 에너지의 일부이고, 그 바람과 마찰하여 파장이 다른 음고(音高)를 연출하는 소리들, 그 소리들의 다발인 음악들이야말로(울음소리를 포함하여), 김경주의 시적 방랑에 깃든 회심의 성소(聖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삶은 공명하는 소리들의 불협화이고, 그럴 때 시쓰기란 결코 포착할 수 없는 소리의 잔상(殘像)들에 대해, 언어화할 수 없는 형태이지만 적어도 시쓰기를 통해, 그것을 인식론적으로는 사유할 수 있다는 청년다운 야심, 거기서 김경주 시의 한 고유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바람과 소리, 음악에 대한 인식론적 사유와는 별개로, 그의 시가 언어 자체를 감각적으로 향유할 수 있을 시어의 리듬과 기법에 대한 예민한 탐구 쪽으로의 관심이 약해 보이는 점은 아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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