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시와 보이지 않는 시의 결혼과 이혼
그게 아니더라
시인은 시만 쓰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
깊숙이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달라치면
덥석 시를 주곤 했는데
그게 아니더라
글자 한 자
詩句 하나에 매달리다가
고심하다가
마침내 찾아냈을 때의 기쁨
그 희열로 살았는데
그게 아니더라
전부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더라
- 임강빈(현대시학 2008.3)
홀연 忽然
홀연..... 다운 말이다
흘리는 말이다
상상력을 주는 말이다
고도를 기다리는 말이다
그 말에 기대어 아침을 본다
그 말에 기대어 기도한다
철로에 누워 하늘을 보는 마음
서로 사랑한다면 두려울 것 없으리, 그런 마음
홀연.....누구나 그 꿈을 갖는다
홀연 누구나 그 사랑을 갖는다
홀연 누구나 어깨를 기대고 싶은 말이다
누구나 알고 싶은, 그러나 알 수 없는
슬픈 내일 같은 말이다
-김승희(불교문예 2008.봄)
시를 맹렬히 보고 쓸 때는 여름날의 플라타나스처럼 수사가 무성한 시들이 좋더니 이제는 시 나무의 줄기가 잘 보이는 가을 날 같은 시들이 잘 보인다. 나이가 들어가는 증거인데 이러다가 늙으면 골계미만 남은 禪詩취향이 되겠지. 시의 정열이 드러나면 에너지가 화려한 여름나무 시가 되고 감추어지면 에너지가 뿌리로 내려간 겨울나무시가 된다. 임강빈시인은 31년생이니 올해로 만 77세가 되고 인생의 겨울에 사는 시인이다. 젊은 시절에도 군더더기가 없는 시들을 썼다. 개인취향으로 고백하자면 너무 맹숭맹숭한 시를 쓴다고 생각했는데 요새는 다르게 생각된다. 이 시는 드러내지 못한 시(삶, 전체로서의 기의)의 회한을 시의 불완전성과 시인의 한계를 통해 드러냈다. 그러나 역으로 독자는 시인의 시로 충족되지 않는 나머지가 무엇인가 같이 고민해보는 상상을 고통스럽게 하게 된다.
김승희 역시 忽然이라는 기표에 의지하고 있지만 드러내지 못한(결국 이루지 못한) 마음의 욕망(기의)를 열거하고 있다. 꿈과 사랑과 인생이란 글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여분을 남긴다. 개인사 뿐만 아니라 인류사 문화사가 다 그렇다. 문화라는 기호와 무늬로 표현된 양이 백분지 일쯤은 될까? 시인은 홀연忽然이라는 미묘한 마음의 상태를 빌어서 하지 못한 말씀을 하고 싶으나 그 역시 불완전하다. “누구나 알고 싶은, 그러나 알 수 없는/슬픈 내일 같은 말이다“라는 홀연 忽然 그 자체가 몽환이기 때문이다.
내가 죽어서
내가 죽어서 벌레의 집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내가 죽어서 뽀얀 재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내가 죽어서 물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내가 죽어서 바람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내가 죽어서 벌레 한 마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걸 생각하면
내가 죽어서 봉놋방 데울 마른 나무도 되지 못한다는 걸 생각하면
내가 죽어서 물 한 방울 되지 못한다는 걸 생각하면
내가 죽어서 바람 한 줄기 되지 못한다는 걸 생각하면
내가 죽어서,
내가 죽어서,
-도종환(시인시각 2008.봄)
단식
-성희직의 노래
나는 한 달을 굶는 동안
광산촌 바위들이
파도 소리를 듣는 것을 발견했네
나의 침묵에도
슬픔과 걱정을 녹이는 피가 도는 것을
봄날처럼 느꼈네
쉰한 살의 내 몸뚱이
아직은 다이너마이트 같은 바람을 품고 있기에
시퍼런 화살이 될 수 있다네
광산촌 바위들처럼 나도
진폐 환자들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귀를 여네
-맹문재(시에 2008.봄)
도종환은 인간의 죽은 다음에 어떤 모습으로 자연과 우주에 귀속되는지를 염려한다. 사후는 대체로 유물론자의 생각과 신비주의자의 생각들로 나누어진다. 시인의 의도는 생태주의자의 신비가 들어간 노장과 불교의 윤회 시각을 표현한 것 같다. 나는 그냥 유물론자의 시각으로 보고 싶다. 신비주의자는 영혼을 전제하는데 이 시에서는 영혼의 냄새는 나지 않는다. 자연의 순환질서에 생명존재에 편입되는 평화와 그렇지 못하는 존재의 불안을 대비하고 있다.
맹문재에게는 사후의 결과보다는 생전의 현실이 더 급하다. 광산촌 인부들이 단식하는 非常상황에서 시인의 감정은 非常으로 증폭된다. 단식은 현실의 거부이기에 일상에서는 비현실이었던 바위의 존재가 현실등가물(투쟁자들)처럼 여겨지고 바위가 가지는 상징과 속성은 투쟁하는 인부들의 존재로 투사된다. 바위가 인부이고 인부가 바위인 同化와 坐忘 心齋의 경지에서 화두는 대동단결의 투쟁이다. 모더니즘과 동양사유의 시각으로 해석했지만 작자의 의도는 실존의 절실함이겠지. 이런 시에서도 미학을 읽어내려는 내 눈도 병이다.
덕유산 香積峰
살아서 겨우 살아 있는 척하다가
죽어서 죽어 있는 것
하루살이가 참 길게 쫓아온다
하느님이 하루살이와 같은 것은
살아서 겨우 살아 있는 척하는 것
다른 것은 죽어서 살아 있는 척하시는 것?
죽어서 살아 있는 척하시는 것?
덕유산香積峰 정상
朱木이 참 많다
죽어서도 천년이라고 하는 것
-박찬일(시를 사랑하는 사람들,2008,3.4)
하루살이
암놈은 허공을 날아다니며 발버둥칩니다 딱 오늘 하루뿐인데
사랑을 모르는 수놈을 어떻게 유혹해야 하나, 언제 사랑을 연습해서
언제 어디로 데리고 가 사랑을 나누어야 하나, 처음인데 옷은
어떻게 벗겨야 하고 마추어야 할 입은 입술을 빨아야 하나, 날개는
접어야 하나, 앞다리는 오므려야하나, 뒷다리는 벌려야 하는지!
얼마나 숨은 차 오를까 심장이 끓어올라 피가 솟아 넘치면
신음 소리는 어떻게 내야 되는지, 사랑을 느끼는 수놈은 어떻게
몸을 뒤틀까!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하는지, 아무 말이건
속삭여야 되는지, 눈은 떠야 되는지, 꼭 감아버려야 되는지,
끝내는 둘이 미쳐버려도 할 수 없는지! 미쳐서 날뛰다 하루가 가면
끝나지 않아도 죽어야 하는지!
- 허의행 (정신과 표현 2008.3.4)
하루살이라는 소재를 비교해보기 위해 두 시를 골랐다. 하루살이는 짧은 인생의 허무를 드러내는 단골주제이다. 박찬일은 긴 우주의 시간에 비추어 하루살이 같은 인생이 겨우 살아있는 척 하는 시늉에 지나지 않는 다는 인식을 보여 준다. 반면에 朱木과 같은 긴 수명의 나무는 죽어서도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애매하면서도 서로를 반면거울처럼 쳐다보게 한다. 허의행은 하루살이 같은 인생이기에 하루의 사랑과 번식이 중요하다고 설파한다. 생명의 목적이 종족보존이라면 맞는 얘기이다. “끝내는 둘이 미쳐버려도 할 수 없는지! 미쳐서 날뛰다 하루가 가면/ 끝나지 않아도 죽어야 하는지!”라는 격정적인 언사가 역시 삶과 죽음의 신비를 대비하고 있다. 인생이 하루살이로 끝나는가? 그렇다면 쾌락제일주의가 현명하다. 인생이 하루살이를 넘어선 긴 시간의 부분인가? 그렇다면 다음시간을 위해 힘을 아껴야 하니 견인주의자가 된다. 각자의 선택.
꽃이 피면
꽃이 피면 내 마음도 피어날 것이다 꽃봉오리 송글송글 맺힐 때까지 젖 먹던 힘까지 써가며 꽃나무들은 용틀임을 친다 꽃을 피게 할 수 있는 행복은 아무에게나 오지 않는다는 듯이 꽃봉오리 햇빛을 받아 활짝 얼굴을 드러낸다 꽃 피우는 일은 마음에도 환하게 꽃 피우는 일은 멀어진 고향 가기보다도 더 어려운 일 이윽고 꽃잎 난분분 흩어지는 날이 되면 나는 꽃의 곁에서 노래를 부르리라 떨어지는 꽃 이파리 한 장 한 장 세어가며 어릴 때 잠들며 젖 먹던 그 때처럼 세상의 환한 얼굴 다시금 그려가며 이내 고운 잠에 빠질 것이다
-정공량 ( 시작 2008.봄)
꽃 속에 맨홀
그대 앞을 지날 때면 왜 발이 뜨거워질까
무릎이 불타오를까
심장이 재 될까
왜 얼굴만 남아 대롱대롱 흔들릴까
허공의 序文을 읽으며
꽃 속에 들어간다
이 붉은 글은 누가 쓰고
누가 읽고 찢어버릴까
추억에 발이 빠진 날
지옥에 발이 빠진 날
사랑에 발이 빠진 날
감쪽같이 나를 삼켜버리는
불멸의 죽음
헐떡거릴 수 없는 고요한 사랑이
꽃 속에 숨어있다
깜깜하다
꽃봉오리에 꽝꽝 부딪히는 빗방울
바닥에 떨어진, 해방된 꽃잎들 밟으며
집에 간다
다시 긴 대롱 끝에 매달리기 위해
흩어진 얼굴을 수습한다
- 박서영 (시인시각 2008.봄)
사방에 봄 꽃이 만발하니 꽃에 관한 시를 골라본다. 꽃은 식물의 섹스이니 꽃앞에 서면 同氣感應이라 동물인 인간도 색욕과 생명력을 느낀다. 식물과 동물은 음양이 반대여서 인간은 머리가 하늘에 가고 발이 땅으로 가는데 식물은 머리(뿌리)가 땅으로 가고 발(가지)이 하늘로 간다. 꽃이라는 생식기는 역시 하체에 있는데 동물과 공통점이다. 음양으로 설명을 안해도 시인들은 꽃의 생명력을 에로스로 인식한다. 정공량은 꽃이 피는 환한 순간의 기쁨을 담담하게 그려냈는데 “꽃 피우는 일은 마음에도 환하게 꽃 피우는 일은 멀어진 고향 가기보다도 더 어려운 일”라는 인식으로 꽃이 피었던(생명이 태어났던) 원초의 순수가 문명의 세사가운데 있는 인간에게서 사라지고 있음을 비판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 꽃 피는 순간이 귀중한 축복임을 깨닫게 된다. 한시에도 명귀절이 있다. “歲歲年年花相似 歲歲年年人不同 작년에나 올해나 꽃은 똑같이 피는데, 작년에나 올해나 사람은 똑같지 않구나”
박서영은 꽃 속에서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동시에 보고 있다. “사랑에 발이 빠진 날/감쪽같이 나를 삼켜버리는/불멸의 죽음/헐떡거릴 수 없는 고요한 사랑이/꽃 속에 숨어있다”는 인식은 죽음의 강도와 에로스의 강도를 동일하게 말하고 있다. 에로스란 분리된 자아가 타자(연인.애착물)와 하나가 되려는 소망이고 죽음도 자아를 타자로 귀일시켜려는 욕망이니 결국 같은 욕망의 뿌리이나 방향만 다를 뿐이다, 에로스란 죽음의 제어를 받아 천천히 불타오르는 생의 기름이다. 제어를 받지 아니한 에로스(사랑의 광기)는 일시에 기름을 써서 불타오르고 곧바로 죽음의 시간으로 간다. 박서영은 꽃(에로스)에서 어둠(죽음)같은 사랑을 표현함으로서 긴장을 드러냈으나 산화하는 사랑은 아니다. 꽃이 떨어지는 때와 다시 꽃이 피는 때의 순환이 반복되는 현실을 읽고 있으니.
Λ
유비와 유추의 모형
비교는 투명한 유리판이다
두 개의 세계
거시물리의 환영과 미시물리의 상징
의미는 미시적 현상계에 있지 않다
그러나,
깊은 미감은 미시물리의 정신을 직관한다.
기호란,
드러나지 않은 세계를 의식으로 옮기는 것.
미시적 공간으로 날아드는
날갯짓
기호는 환각 물질
그러나, 상징은
명료한 신기루를 벗어나는 일이다
- 변의수 (시작 2008.봄)
X파일
쑥이 구황식품일 때 동네언니들 따라 저수지까지 쑥 캐러가는 길 지루함을 덜자고 한 가지씩 소원을 말했을 뿐인데 석양을 머금은 자갈 몇 톨을 쌀 몇 말 값으로 바꿔 놓으신 후 예닐곱 어린 눈빛과 마주치게 하신 것 내 보물찾기의 시작이었을까 ( )를 위해 하숙을 치며 청춘을 물들일 때 물방울 속에라도 길을 내려는 듯 내 안의 鯤이 휙휙 포물선을 그으며 날아올랐는데 點點이 무지개가 되었는데 무려 별 다섯을 花冠에 달아 무지개다리에 올려놓으신 것 내 보물찾기의 시련이었을까
화관을 쓴 눈에는 보물찾기도 심드렁해 죄와 상처로 십수 년을 연명할 때 내 죄 내 상처들의 다비를 위해 ( ) 앞에서 최면 걸어주신 것 그러니까 붙잡은 땅바닥이 패일 듯 天丁을 뚫어버릴 듯 고래고래, 아픈 시간들을 다 뱉어 내 화관을 찢으며 흘려보내주신 것 내 보물찾기의 절정이었을까 사는 일이 캄캄해 부싯돌인 양 제 몸을 치며 견딜 때 거짓말처럼 수묵화의 벽이 나타나 환한 길을 오려내 주신 것 안 본이들에게 어떻게 전할까 X, 그를 내가 알기 전에도 함께였다는 것
- 박라연(시작 2008,봄)
기호란 사람의 의지 감정 지식을 타인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사물’의 모사인 동시에 인간 내 심적 작용과의 결합물이다. 기호자체를 의미 대상으로 삼는 고전기호론자들의 생각들이 있지만 나는 별로 찬동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세계의 무한운동과 생생한 감각을 놔두고 죽은 시체를 만지는 장의사같은 사람들이다, 죽은 시체가 최고의 석학이나 미인인들 무엇하겠는가. 屍姦症 환자가 아닌 바에야 살아있는 현실에서 의미를 얻어내야 한다.
변의수는 인간의 정신이 기호를 통해 보고 있는 세계현실을 그려내고자 했다. “기호란,/ 드러나지 않은 세계를 의식으로 옮기는 것.”이라는 표현으로 기호가 인간의 정신작용의 반영이기는 하나 세계 전부를 그려낼 수 없다는 신비주의자의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 “기호는 환각물질”이라는 표현도 기호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말이다. “그러나, 상징은/ 명료한 신기루를 벗어나는 일이다”는 결구는 상징을 매개로 해서 다른 세계를 인식하는 인간의 고도한 정신작용이 더 훌륭한 방법이라는 뜻이다. 상징은 세계자체를 드러내기도 하고 감추기도 한다. 상징이 단순히 개인의 의식작용으로 보기 어려운 집단무의식과 관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박라연은 “X화일” 이라는 미스터리시리즈의 제목을 빌려와서 X라고 표현되는 실재와의 관계를 드러내고자 했다. ( )라는 괄호 안에 넣은 현실에 대한 애착물을 상상하게 만든 기법이 재미있다. 인생을 보물찾기의 과정으로 은유하고 X라는 상징으로 설정된 타자와의 긴장을 드러낸 시다. 같은 기호인데 X는 무한상징으로 읽히고 ( )는 현실의 폐쇄상징으로 읽히게 한 시인의 의도가 그런대로 성공했다.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해야 하는 이런 실험기법들이 우리시단에는 다소 낯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현실과의 생생한 커뮤니케이션으로 상상을 이루어 낸다면 새로운 시적기법이 될 수도 있으리라.
달팽이
귓속이 늘 궁금했다
그 속에는 달팽이가 하나씩 산다고 들었다
바깥 기척에 허기진 그가 저 쓸쓸한 길을 냈을 것이다
길 끝에 입을 대고
근근이 당도하는 소리 몇 낱으로 목을 축일 것이다
달팽이가 아니라
실은 도적굴로 붙들려 간 옛적의 누이라고도 하고
골방에서 평생을 난 앞 못 보던 외조부라고도 하지만
슬프고 옹색하게 생긴 저 구멍 너머에서는
누구건 다 달팽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달팽이는
천 년쯤을 기약하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고 한다
귀가 죽고
귓속을 궁금해 할 그 누구조차 사라진 뒤에도
길이 무너지고 모든 소리와 갈증이 그친 뒤에도
한없이 느린 배밀이로
달팽이는 오래오래 간다는 것이다
망해버린 왕국의 標章표장처럼
네 개의 뿔을 고독하게 치켜들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더듬더듬
그토록 먼 길을
- 김사인 (현대문학 .2008.2)
조롱 속에서
햄스터가 밤새 쳇바퀴를 돌린다 삐걱삐걱 살아 있음을 알리려는 듯 삐걱삐걱 비애의 뼈는 잠시도 쉬지 않는다 허공에 내딛는 앞발을 뒷발이 도르르 따라 달리지만 나아가는 순간 같히고 마는 작고 하얀 발이여 너는 조롱 속에 갇힌 공포를 벗어나려고 쳇바퀴에 갇히고 말았구나 젖은 톱밥위에 뒹굴기도 하다가 벽을 기어오르며 미끄러지기도 하다가 다시 쳇바퀴를 돌리며 발가락이 하얗게 운다 조롱을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광기에 가까운 끈기로 쳇바퀴를 돌린다 삐걱삐걱 허공의 페달을 밟으며 달아난다 달아나면서 갇힌다 갇히면서 달아난다 나는 베란다에 쭈그리고 앉아 발꿈치가 아프도록 조롱을 들여다본다 이 막막한 겨울밤을 한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조롱 밖의 조롱 속에서 내 발가락도 하얗게 운다
- 나희덕(시안, 2008.봄)
상황에 갇힌 인간이나 사물의 실존을 은유하는 시들은 그 절실함의 강도와 긴장에 의해 성공한다. 김사인은 인간의 귀에 있는 ‘달팽이관’을 소재로 상상력을 발휘했다. 소리라는 말은 한마디도 안하고 달팽이로 표상된 소리가 인간이 죽은 후에도 살아남아 자연 속에 있다는 은유를 생생하게 그려냈다 “망해버린 왕국의 標章표장처럼/네 개의 뿔을 고독하게 치켜들고/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더듬더듬/그토록 먼 길을“는 마지막 연은 소리에너지가 시공으로 무한으로 퍼져가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현실상황의 서정적 긴장을 드러내온 기존 시작과는 다른 김사인의 시작태도가 흥미롭다. 내게는 이 시가 더 시적인 상상력을 제공한다.
나희덕은 조롱 속에 갇힌 햄스터를 통해 쳇바퀴처럼 살고 있는 자신과 일상인의 삶을 비판한다. 이런 주제의 시는 많이 있다. 그러나 같은 주제라도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느냐에 따라 진부와 긴장이 결정된다. 나희덕은 ”내 발가락도 하얗게 운다“라는 마지막 행으로 긴장을 엮어냈다. 나머지는 이 행을 위한 상황설정의 구조로 처리했다. 나희덕은 평범한 진술과 묘사를 한 순간에 반전시키는 기법에 능하다. 이 시인의 시가 독자에게 편하게 읽히면서도 시적긴장으로 독자를 몰아가는 이유가 있다.
기억
날개를 떼인 잠자리는, 펄럭거렸다 기억으로 없는 날개를 펄럭거렸다
볕이 무척 뜨거운 날 밀폐된 무덤이 답답한 죽은 자는, 육체를 가졌었다는 기억으로
제 육체 사라진 줄도 모르고 뚜벅뚜벅 산길을 산책했다
어미가 객사한 줄도 모르고 새 새끼가 울먹거리는 숲,
내가 걷고 있는 앞쪽 길에서 전생의 내가, 내 육체를 수거하려고 걸어왔다
기억이라는 올가미에 묶여, 한생이 너무나 길게 느껴지는데 지루했는데 잘 됐다 싶었다
한순간,
사람이 아니라면 내가 사람이 아니라면
훅 스치는 바람 같은 것이라면...그런 생각이 불쑥 솟구쳤다
깃털 무성한 나무들은, 얼마나 날아가고 싶으면 저리 긴 울음을 우는 것일까
한때는 나무였으면 싶어서 숲에 갈 때마다 부러워 나무를 껴안곤 했는데
나무들은 어떤 기억으로 생을 견뎌내는 것인지
스스로 말라죽는 나무는 그 기억 얼마나 끔찍했던 것일까
모든 생명을 죽음으로 인도하려고 하늘에 弔燈이 걸렸다, 태양!
- 김충규( 애지 2008.봄)
백화수복
한 잔
눈이 내리고 펄펄 나는 기차를 탔다
나라 지킨다고, 나라가 시킨다고 줄서서 머리를 밀었다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면서 눈송이 어린 것들은
의무실 창밖에서 손을 비볐다 군복에 때가 끼고 알약이 쏟아졌다
마분지에다 편지를 썼다 찢어진 아리랑이나 명랑잡지를 들췄다
되돌아오기만 하던 편지 사이로 연필가루가 날렸다
위문편지가 도착하고 보급창고에서 동기 한 명이 쥐약을 먹었다
위문편지는 한결같이 우리들이 씩씩하다고 눈이 올수록 씩씩하다고 부추겼다
나는 반공도덕책 속으로 들어가 총을 내려놓고 연병장을 돌았다
눈이 그치고 국군아저씨! 뒤에서 불렀지만 나는 절뚝거렸다
아저씨,아저씨
멀리서는 씩씩하다네 나는 백화수복을 마시네
두 잔
강바닥은 마르고 쫄쫄 나는 위경련을 앓았다
돌멩이 화전이 싫어 겔포스 같은 구름만 들이켰다
수수밭을 들락거리며 신물을 토했다 우수수 먼지 뿐인 빚뿐인
늦콩을 털었다 지붕에선 밤새 고추가 모가지에 이슬을 받았다
기차가 지나갔지만 결행은 못하고 진땀만 흘렸다
들머리가 추워지자 느릿느릿 관광버스는 트림을 해대며 신작로를 지나갔다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 차차차! 스피커는 단풍들고 그러다가 지쳤다
스피커는 한결같이 우리들을 아름답다고 놀이 번질수록 아름답다고 직직거렸다
나는 군청게시판 안에서 삐딱하게 맥고자를 쓰고 낫을 들었다
어이 새마을지도자! 읍내에서 나는 진종일 비틀거렸다
새마을, 새마을
멀리서는 아름답다네 나는 백화수복을 마시네
석 잔
비가 오고 나는 용산역에서 엎어졌다
꿈꾸는 볼펜으로 이력서를 쓰고 목장갑을 꼈다
야근은 두꺼운 책과 같았다 쇠로 된 책 --넘기다가
밀링머신이 손가락을 먹어치운 날은 유행가를 듣는게 슬펐다
배호를 따라 부르면 식당의 나무젓가락도 소름이 돋았다
조간신문에 낀 전단지가 석유를 먹는 것처럼 술을 마셨다
포마드를 바른 시찰단이 오는 날은 풀을 뽑고 휘파람을 불었다
사찰단은 한결같이 우리들을 희망이라고 오줌보가 탱탱할수록 희망이라고 얼렀다
나는 조국근대화 플래카드 앞에서 연장을 치고 사진을 찍었다
비가 그치고 헤이 산업의 역군! 해는 빛났지만 나는 푸석거렸다
근대화, 근대화
멀리서는 희망이라네 나는 백화수복을 마시네
넉 잔
그대여,그대들이여
멀리서는 진부하다네 나는 백화수복을 마시네
-한우진 (내일을 여는작가 2008.봄)
김충규는 “기억”이라는 제목으로 현실 밖의 일, 구체적으로는 죽은 후 영혼의 기억이 다른 세상으로 가는 윤회를 시로 형상화 했다. 영혼과 윤회에 대한 확신은 세계관을 다르게 한다. “만들어진 신”이라는 저서에서 도킨스는 인간은 죽는 공포와 존재의 불안 해소를 위해 신과 사후세계를 만들었다고 기술했다. 과학적 증거란 측정가능한 사실과 경험만을 다룬다. 현상이 있으나 합리적사고로 설명할 수 없으면 과학영역 밖이다. 종교와 다른세계에 대한 믿음의 원천은 신비주의자들의 비전과 체험에 의한다. 그런 신비주의자들의 체험에 예수나 석가 마호메트와 같은 성인들이 있으며 종교인들은 이들의 체험이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김충규는 “모든 생명을 죽음으로 인도하려고 하늘에 弔燈이 걸렸다, 태양!”이라는 언술로 마지막 연을 썼다. 태양이 생명의 양육과 죽음의 인도라는 야누스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시적 발상이 참신하다.
한우진은 철저하게 현실의 이야기를 드러냈다. 군대와 농촌새마을 지도자, 공장에서 일하는 개인이 사회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착취와 소외를 당하는 고통과 슬픔을 그려냈다. 막간을 넘기는 한 잔 술이 고통을 달래야 하는 인생에 대한 패러독스이면서도 현실적이다. 한잔 두잔 석잔 넉잔으로 이어지는 점층이 관객이 바라보는 고통과 슬픔의 강도가 증가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몽상가들은 꿈을 마시고 고통을 달래지만 현실인들은 술로 해결한다. 꿈과 술. 전자는 정신을 취하게 하고 술은 육체를 취하게 한다. 세상을 취생몽사로 넘어갈 수 있는 자는 행복하다. 이 시가 고통이면서도 원거리 풍경의 아름다움처럼 보이는 이유도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인간의 유머 때문이다.
표현된 시가 있고 표현되지 않은 시가 있다. 보이지 않는 시가 보이는 시보다 더 큰 부피와 무게로 다가올 때 시의 긴장과 사유는 높아진다. 양자는 시라는 용기 안에서 행복한 결합을 해야 한다. 연인들이 한 몸이 되어 엑스타시에 이르듯이 보이는 시와 보이지 않는 시는 연인들의 정신으로 결합되는 연결고리로 시의 기쁨을 제공한다. 이 글의 주제를 위해 인용한 위 시들에서 행복한 결혼을 하고 있는 시는 어떤 시들일까?. 또 서로 경멸을 하고 있으므로 곧 이혼에 이를 시는 어떤 시들일까? 각자 독자의 판단에 맡기고 쓰다 보니 길어져서 손가락이 아픈 이 글을 끝내자.
표현된 시들과 표현되지 않은 시들에 관한 생각
○ 心魂이란 자아를 초월하는 정신의 자율성이며 신성한 힘(Numinose)이며 강렬함과 자유로움을 가지고 있다(이부영, 『아니마와 아니무스』)
○ 일상의 속악한 사물에서 聖의 속성을 발견한 시인의 눈은 예언이나 찬양으로 흐르지 않는다. 비밀은 일상의 수면아래 잠겨 있으며 시인은 그 비밀을 은밀한 인식아래 감춘다. 시인의 욕망이 바라보는 ‘오브제 쁘디 아’(라깡)로서의 사물은 환상의 기쁨과 시적인식의 원천이다.
○시들은 다 불행과 憂愁의 시들이다. 밝은 주제도 수면아래 리듬과 운율의 그늘을 깔고 있어야 밝은 주제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극도로 절제된 지적계산이 들어간 감정일 때 시인이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냉혹하다.
○시를 맹렬히 보고 쓸 때는 여름날의 플라타나스처럼 수사가 무성한 시들이 좋더니 이제는시 나무의 줄기가 잘 보이는 가을 날 같은 시들이 잘 보인다. 나이가 들어가는 증거인데 이러다가 늙으면 골계미만 남은 禪詩취향이 되겠지. 시의 정열이 드러나면 에너지가 화려한 여름나무 시가 되고 감추어지면 에너지가 뿌리로 내려간 겨울나무시가 된다.
○꿈과 사랑과 인생이란 글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여분을 남긴다. 개인사뿐만 아니라 인류사와 문화사가 다 그렇다. 문화라는 기호와 무늬로 표현된 양이 백분지 일쯤은 될까? 시인은 홀연忽然이라는 미묘한 마음의 상태를 빌어서 하지 못한 말씀을 하고 싶으나 그 역시 불완전하다.
○삶과 죽음은 경계가 애매하면서도 서로를 반면거울처럼 쳐다보게 한다. 생명의 목적이 종족보존이라면 하루의 사랑과 번식이 중요하다. 인생이 하루살이의 시간처럼 일회적인가? 그렇다면 쾌락제일주의가 현명하다. 인생이 하루살이를 넘어선 긴 시간의 드러난 부분인가? 그렇다면 다음 시간을 위해 힘을 아껴야 하니 견인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꽃은 식물의 섹스이니 꽃앞에 서면 同氣感應이라 동물인 인간도 색욕과 생명력을 느낀다. 식물과 동물은 음양이 반대여서 인간은 머리가 하늘에 가고 발이 땅으로 가는데 식물은 머리(뿌리)가 땅으로 가고 발(가지)이 하늘로 간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 꽃 피는 순간이 귀중한 축복임을 깨닫게 된다. 한시에도 명 귀절이 있다. 歲歲年年花相似 歲歲年年人不同 (작년에나 올해나 꽃은 똑같이 피는데, 작년에나 올해나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은 똑같지 않다).
○에로스란 분리된 자아가 타자(연인.애착물)와 하나가 되려는 소망이고 죽음도 자아를 타자로 귀일시켜려는 욕망이니 결국 같은 욕망의 뿌리이나 방향만 다를 뿐이다, 에로스란 죽음의 제어를 받아 천천히 불타오르는 생의 기름이다. 제어를 받지 아니한 에로스(사랑의 광기)는 일시에 기름을 써서 불타오르고 곧바로 죽음의 시간으로 간다.
○기호란 사람의 의지 감정 지식을 타인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사물’의 모사인 동시에 인간 내 심적 작용과의 결합물이다. 기호자체를 의미 대상으로 삼는 고전기호론자들의 생각들이 있지만 나는 별로 찬동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세계의 무한운동과 생생한 감각을 놔두고 죽은 시체를 만지는 장의사같은 사람들이다, 죽은 시체가 최고의 석학이나 미인인들 무엇하겠는가.
○영혼과 윤회에 대한 확신은 세계관을 다르게 한다. 『만들어진 신』이라는 저서에서 도킨스는 인간은 죽는 공포와 존재의 불안 해소를 위해 신과 사후세계를 만들었다고 기술했다. 과학적 증거란 측정가능한 사실과 경험만을 다룬다. 현상이 있으나 합리적사고로 설명할 수 없으면 과학영역 밖이다. 종교와 다른세계에 대한 믿음의 원천은 신비주의자들의 비전과 체험에 의한다. 그런 신비주의자들의 체험에 예수나 석가 마호메트와 같은 성인들이 있으며 종교인들은 이들의 체험이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몽상가들은 꿈을 마시고 고통을 달래지만 현실인들은 술로 해결한다. 꿈과 술. 전자는 정신을 취하게 하고 술은 육체를 취하게 한다. 세상을 취생몽사로 넘어갈 수 있는 자는 행복하다.
○표현된 시가 있고 표현되지 않은 시가 있다. 보이지 않는 시가 보이는 시보다 더 큰 부피와 무게로 다가올 때 시의 긴장과 사유는 높아진다. 양자는 시라는 용기 안에서 행복한 결합을 해야 한다. 연인들이 한 몸이 되어 엑스타시에 이르듯이 보이는 시와 보이지 않는 시는 연인들의 정신으로 결합되는 연결고리로 시의 기쁨을 제공한다.
○시인들의 사회적 보상이 낮은 사회이다. 천신만고 애간장을 끓여 시를 생산해보았자 누가 알아주는 사람들이 있어야지. 돈이 되나. 권력이 있나. 명예라도 얻어야 분이 덜할 것인데 이만 명 인플레시인사회에서 시인들은 이름 내기도 어렵다. 시인들이여 눈물을 그쳐라. 좋은 시라면 눈 밝은 사람들이 읽어준다. 자화자찬해서 나 같은 사람이 읽어주고 소개한다.
김백겸(시인. 웹진 시인광장 主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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