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과 칼럼

[김영종의 잡설] 유언비어의 사회학

미송 2010. 6. 27. 19:52
 

유언비어의 사회학 ①

당신은 왜 <롤러코스터> 내레이션에 혹하는가?

 

언론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것은 군사 독재 정권이 아니라 '합리성의 메커니즘'이라 하면 어안이 벙벙할 것이다. 그러나 내친 김에 더 이야기하면, 민주주의 이상으로 언론을 잘 통제할 수 있는 사상과 제도는 세상에 나타난 적이 없다. 무릎을 치는 독자도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아무튼 이 방면의 학자들은 이 진실의 문턱에 거의 다다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를 명시적으로 주장하기에는 민주주의라는 절대이념의 권위가 이들을 너무나도 압도하고 있다.

 

루마니아 작가 게오르기우의 <25시>에 나오는 '잠수함 토끼'처럼 숨 막혀 죽을 것 같은 자가 저 스스로 절대이념의 심연을 헤치고 나올 수밖에 없다. 독재 정권의 가시적인 통제는 공포의 대상으로서 공적(公敵)으로 인식되지만, 통제가 내면화하면 모든 이에게 그것을 자발적으로 요구하기 때문에 더욱 무섭다. 그런 점에서 외부의 통제보다는 자기 검열이라는 통제의 내면화가 자유로운 생각을 방해하는 주역이다. 강제는 항체를 길러주어 건강한 저항을 하게 하지만, 자기 검열이 계속되면 자가 면역에 걸리게 되고 마침내는 항체가 자신을 적으로 인식해 공격한다.

 

냉전체제가 무너진 뒤로 세계는 자가 면역 질환의 위기에 맞닥뜨렸다. 적이 없어진 자본주의가 자신을 공격해 자멸하는 것이다. 이를 막으려면 항체가 적을 인식할 수 있도록 일부러 적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기생충에 감염되면 오히려 알레르기(자가 면역 질환)가 줄어들듯이, '북핵'(한국) 또는 '테러'(미국) 등의 기생충을 체제 내로 끌어들임으로써 자본주의(우리 논의에서는 '합리성의 메커니즘')는 피할 수 없는 자기 붕괴의 위기를 연기시키고 있다.

 

말을 통제하는 것은 곧 생각을 통제하는 것이다. 보도, 거래, 계약, 토론 등 언어 생활의 공적인 부분은 '생각'이 아닌 '팩트', 곧 '사실'을 요구한다. 팩트는 증명 체계에서 근거로 작용한다. 누가 대학 등록금이 비싸다는 의견을 말할 때 '팩트'가 아닌 '생각'을 얘기하면 공적 효력을 상실한 채 사적인 견해로 떨어져버린다. 공적인 부분이 이성의 영역이라면, 사적인 부분은 이성의 성(城) 밖의 천민 구역처럼 취급당한다.

 

팩트와 증명에 의지하는 것은 현재를 살지 않겠다는 결과를 초래한다. 가장 최근의 예로는 천안함 침몰을 들 수 있다. 근거 있는 사실을 말해야 하므로 지금 당장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지 않고 증명될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생각을 통제당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이 내용은 차차 충분히 설명될 것이다). '합리성의 메커니즘'이 요구하는 증명 작업은 언제나 뒷북을 치게 마련이다.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주인공의 활약으로 악당들이 다 죽고 상황이 끝난 뒤에야 사이렌 울리며 몰려오는 군경(軍警)처럼.

 

"여러분은 생각을 자유롭게 말하고 삽니까?"

 

공포가 느껴지는 정치적인 사안 등은 제외하고 물어보는 것이다. 잘 모르겠다면, 구체적으로 물어보겠다. "미나리가 얼마나 몸에 좋아요?" 이렇게 물으면, "향이 좋아 식욕을 돋우고, 매운탕 끓일 때 넣으면 숙취에 좋고, 아마 간에도 좋다는 것 같던데······."

이렇게 평소 생각한 것 또는 아는 것을 말하더라도, 상대가 조금만 전문적인 지식을 꺼내면 그만 주눅이 들어 더는 말을 잇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아주 세세한 분야에까지 오만 가지 전문가가 있어서, 일반인의 말은 살아 있는 나무에서 떨어져 나뒹구는 초라한 낙엽 신세다. 자기 생각을 활기차게 표현하지 못한 말은 이미 죽은 말이다. 그래서 현대인의 말에는 생명이 없다.

 

인간에게 사물은 말을 매개로 해서만 인식된다. 예컨대 돌은 '돌이라는 말'을 떠나서는 동물 수준에서 인식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인간은 말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말은 의미이므로 자연히 인간은 의미의 세계에서 살 수밖에 없는데, 의미란 다름 아닌 가상이다. (2부 '우파의 가면을 쓴 모리배'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가상에는 근거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말의 세계'를 근거를 명확히 하는 증명 체계로 움직이려 하는 것은 '기만'인데, 지금 이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바로 지식이다. 교육을 받은 현대인은 모두 합리성에 입각해 사회 활동을 하고 있어서, 합리적이지 않은 것은 스스로가 배척한다. 세상이 확고한 근거 위에서 움직인다고 착각하고 있는 현대인은 그 착각이 일종의 신앙(믿음)에서 온 것인데도 '객관적 사실'로 믿고 있다. 때문에 말의 세계를 증명 체계로 움직이려 하는 근대 체계를 위해 자신과 타인을 불철주야 감시하며 통제한다.

 

말을 지배하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된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잘 알려진 경구가 미진하게 들릴 정도로 현대의 언론은 기능적인 측면 때문이 아니라 '합리성의 메커니즘'을 가동시키는 표제라는 점에서 그 영향력이 상상을 초월한다. 예컨대 '합리성의 메커니즘'이라는 책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 표제에 해당한다는 것으로, 입법·사법·행정에 이어 언론이 제4부의 권력이라든지 하는 문제와는 다른 차원이다. 사전적으로 '언론'에는 '개인의 생각을 표현하는 말이나 글' 또는 '언론기관을 통한 활동', 이렇게 두 가지 뜻이 있다. 전자와 관련해서는, 사회의 개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말을 언론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후자만이 언론 행세를 하는 사이, 전자는 사회의 사각지대에서 유랑자처럼 떠돈다. 말이 힘을 잃은 시대는 육체도 영혼도 없고 그림자만 있는 시대다.

 

현대인은 자기 생각을 말하는 능력이 거의 폐인 수준에 가깝다. 팩트를 말하도록 길들여진데다가, 팩트를 말하느냐 아니면 그러지 못하고 자기 생각을 떠드느냐가 사회적인 우열을 가르는 기준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층민은 중·상층보다, 촌사람들은 도시인보다, 일반인은 전문가보다, 아이는 어른보다 '팩트로 말하는 능력'이 훨씬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팩트를 말하는 목소리는 재미없고 무미건조하다. 풍부한 육질이 느껴지지 않아 씹는 맛이 제로다. 교육받은 사람일수록 말을 할 때도 논문투를 연상시키는 문어체를 사용하는 까닭에 마치 표준화한 공산품처럼 느껴진다. 말의 다양성은 사라지고 모두들 비슷비슷한 말을 하고 있다.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제품 매뉴얼을 읽는 기계음 같은 말과 별로 다를 바 없다.

 

요즘에는 <롤러코스터>라는 케이블TV 프로그램에서 그런 목소리가 유행하고 있다. 어느덧 현대인들은 감정이 배제된 소리를 더 편하게 받아들이고, 사람이 아니라 기계와 말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합리성의 메커니즘을 추종한 나머지 생물성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날이 갈수록 말끝에 "~인 것 같다" "~해 보인다" "~일지도 모른다" 같은 말을 많이 쓰는 것도 합리성의 메커니즘에 길들여진 결과다. 자신의 생각을 팩트화하려면 '증명을 기다리는 어투'(~일지 모른다)가 객관적으로 보여 자기도 모르게 쓰게 되는 반면, '단정하는 말'(~이다)은 독단적인 성격 또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비합리적인 인격으로 낙인찍히기 쉬우므로 피하게 된다. 덕분에 세상은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인간들로 넘쳐나고 있다.

 

각 개인의 육체가 내뿜는 생명의 에너지는 합리적인 어법으로는 전혀 만족할 수 없고 되레 억압될 뿐이다. 그것은 사물과 자유자재로 소통·변신하고, 시공을 넘나들며, 기적을 일으키는 마법과 합리적인 어법 바깥에 있는 웃음과 익살과 풍자와 열변과 쾌변, 그로테스크한 과장 같은 야생의 표현 속에서만 만족할 수 있다. 현대인은 육체가 내뿜고 싶어 하는 '에너지로 충만한 말'을 이성이 통제하는 기형적인 상태에서 살고 있다.

 

 

유언비어의 사회학 ②

인터넷 시대에 오히려 입을 닫는 사람들

 

억제된 에너지가 '합리성의 메커니즘'을 강화하는 쪽으로 왜곡되면서, 현대인의 언어생활은 그 '형태'와 '아름다움'이 가꾸는 자의 손에 달려 있는 분재(盆栽)가 된 것이다. 여기서 가꾸는 자는 과연 누구일까? 합리성의 메커니즘을 운영하는 자다. 분재의 이상형은 분재가의 손에 의해서 창조되는, 자연성에 조금도 기대지 않은 완벽한 '합리성의 메커니즘'(원리) 위에 핀 황금 꽃이다. 언론 자유는 '합리성의 메커니즘'을 강화하느냐 저해하느냐의 구도 속에 놓이게 되고, 그 결과 언론의 자유를 추구할수록 언론의 자유를 잃게 되는 아이러니에 빠지고 만다.

 

무슨 말인지 궁금할 터인데, 이 아이러니에 대해 수학의 예를 빌려 살펴보자. 수학에 '리샤르 패러독스'라는 것이 있다. 간단히 말하면 "n이 리샤르적이지 않을 경우, 오로지 그럴 경우에만 n은 리샤르적이다. 따라서 'n이 리샤르적이다'라는 명제는 참인 동시에 거짓이다" 라는 내용이다. (<괴델의 증명>, 어니스트 네이글·제임스 뉴머 지음, 강주헌 옮김, 경문사 펴냄, 81쪽.) 이것은 수학이 합리성의 메커니즘 안에서 자신을 완전하게 정초하려 할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이율배반이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러셀에 이어 힐베르트는 수학에서 '무모순의 절대적 증명'을 시도하려 했다. 그러나 이 '이율배반'을 교묘하게 피해가서 마치 이를 해결한 것처럼 보이게 할 뿐이었다. 자연수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즉 n이 리샤르적이거나 않거나 하는 것이 논리적인 형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제 상황에 의해서 먼저 정의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당시 무명이었던 청년 수학자 괴델이 나타나 기라성 같은 수학자들의 망상을 뒤집고 아주 간단한 '이 사실'(위의 밑줄 친 부분)을 수학식으로 정리한 것이 저 유명한 '괴델의 증명'인데, 그 증명조차도 모순을 안고 있는 추론 규칙을 사용해야 했다.

 

이것이 1세기 전에 수학에서 일어난 대사건이다. '자연수의 도움을 받지 않는, 추상으로만 구성되는 완벽한 수학의 형식 체계'='무모순의 절대적 증명'이라는 것은 자연을 완벽하게 이성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합리주의자들의 망상이다. 여기서 자연 대신 사람을 대입하면 시대의 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수학자들이 무모순성을 증명하려던 당시는 19세기 말~20세기 초반 제국주의의 극성기로, 그들은 '절대이성이 지배하는 하나의 세계정부'를 위해 이성의 기초인 수학에서 그 논리를 찾고자 했다. 이를 토대로 파시즘의 학문인 인종학·우생학·사회진화론 등이 융성했던 것이다.

 

앞서 말한 '언론 자유의 이상형'이 '절대적 증명'과 동일한 욕망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후자와 마찬가지로 전자('합리성의 메커니즘' 위에 핀 황금꽃)도 세상(즉 말의 세계)을 가상이 아닌 실체로 대한다. 그러나 후자('절대적 증명에 의한 무모순의 체계')가 세상을 실체적 토대 위에 완벽하게 구축하려 했지만 실패한 것은 괴델의 증명 외에도 철학의 비트겐슈타인, 건축학의 크리스토퍼 알렉산더 등 여러 분야에서 다각적으로 행해져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 뒤 구조주의는 타격을 받았으며, 해체론이 탄력을 얻게 되었다. 해체론(포스트모더니즘)은 세상, 즉 말의 세계를 가상으로서 대한다. 그러나 우리의 주제인 전자는 아직까지 세상을 실체로 대하면서도 비판받지 않은 상태로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인간이 말로 산다는 것은 의미로 산다는 것이다. 그런데 언론의 자유를 위해 '합리성의 메커니즘'을 완전하게 만들려 할수록 (수학의 절대증명에서 본 것처럼) 형식화에 올인 하게 됨으로써 필연적으로 의미의 배제를 동반한다. '합리성의 메커니즘'은 본질 추구의 결과물인데, 그 본질 추구가 의미의 배제라는 이율배반을 낳은 것이다. 이것이 앞서 살펴보겠다고 한 아이러니의 실체다. 그래서 '말의 자연성'을 '합리성의 메커니즘'으로 방해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물 흐르는 대로 내버려두어야 한다. 4대강 사업 같은 것은 '말의 세계'에서도 하면 안 된다. 말의 다채로움은 사람이 생명력을 향유하고 있다는 징표다. 자기생각을 '팩트나 증명', 곧 '합리성의 메커니즘'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껏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막혀서 썩지 않고 잘 흘러간다. 앞서 말한 구도, 즉 언론의 자유를 '합리성의 메커니즘'을 강화하느냐 저해하느냐로 나누는 구도를 해체할 때에만, 말의 다채로움이 실현될 새로운 길이 열린다.

 

독재 정권의 언론 탄압은 이 구도를 강화시켜주는 좋은 구실이 되어주었다. 옛날과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고 말 못해 죽은 귀신이 없을 만큼 인터넷을 통한 소통이 발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은 논리에 갇혀 과거보다 여러 측면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말의 다채로움 또한 사라졌다. 물론 자신감도 당연히 죽었는데, 이것은 가장 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내 생각에, 논리적으로 하는 말은 대체로 자기의 말이 아니다. 지식에 종속된 '죽은 시인의 사회(말)'라고 할 수 있다. 사상가 존 로크는 언어의 가장 엄격한 사용을 추구했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저작을 '자연 언어'로 읽을 때에야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합리성의 메커니즘'을 기준으로 하는 이 구도를 떠맡고 있는 제도 언론의 기자부터가 민주화를 맞아 가시적인 언론 통제가 사라지자 자신들이 스스로 언론 통제를 하고 있다. 기득권층을 자발적으로 옹호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정치적으로 강력한 진보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해도(이마저도 결정적인 한계를 드러내고 있지만) 자본에 허약하며 이익단체나 기득권층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치가 경제의 손아귀에 잡힌 상황에서 내적으로는 보수화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 예로는 최근 김용철 변호사가 쓴 책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펴냄)에 대한 광고 거부라든가, 한의사 업계의 반발을 의식해 구당 선생의 책을 보도하기 꺼리는 풍토 따위를 들 수 있다.

 

조·중·동의 경우는 1970년대의 동아투위나 조선투위 같은 저항이 다시는 일어날 수 없게 됐는데, 회사 쪽의 장악력보다는 스스로 기득권층이 되면서 합리성을 실현한다는 사명감이 더 크게 작용한 결과다. 합리성은 보수에게나 진보에게나 공통분모이기 때문에, 이쪽이든 저쪽이든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자유 언론을 실천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무장하게 한다. 독재 시절의 죄의식 같은 것은 없다. 누가 누구를 비난하는 것은 그쪽 입장일 뿐이다. 이것이 새는 좌우 날개로 난다는 이른바 '합리적인' 근대언론관이다.

 

좌우 날갯짓으로 나는 새의 비상은 '합리성의 메커니즘'을 실현하는 것인 동시에 운영자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다. 재주는 '좌우의 날개'가 부리고 돈은 되놈이 먹는 이 체계를 이상으로 삼는 것이 근대언론이며, 여기에서 그 모델은 이른바 선진국의 언론이다. 그런데 한국은 비정상적인 좌우 구분과 독재의 유산 따위 때문에 아직은 좌우를 균형 있게 받아들일 처지가 아니다. 근대 언론의 모델은 궁극적으로 '합리성의 메커니즘'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언론의 자유가 확고해질수록 근대 언론의 모델은 견고해진다. 장기를 둘 때처럼 파란 말, 붉은 말 이외의 어떤 말도 개입을 불허한다. 게임의 룰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장기 놀이는 오직 장기 말을 가진 언론만이 노는 놀이다. 이 룰에 따라 소시민들은 장기 말을 가질 수 없으므로 구경꾼이며, 훈수꾼이며, 청팀이거나 홍팀이며, 팬이며, 아니면 기껏해야 불평분자다. 바로 얼마 전 치러진 6·2 지방선거에서 언론이 여론조사를 내세워 살아 있는 민심을 정확히 읽지 못한 것은 말(言語)의 실제 주인들을 말(言語)의 장기판에서 제외시켰기 때문이다. 언론의 장기 놀이는 이미 소시민들의 놀이가 아니게 되었다. 이 모델이 완전하면 할수록 (사전적인 의미의 첫 번째에 해당하는) 소시민들의 언론은 완전히 무시당할 뿐 아니라 유언비어조차 발붙일 곳이 없다. 유언비어가 존재하려면 그도 장기 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독재정권 때는 관보(官報) 대 유언비어가 각각 흰 말과 검은 말을 가진 의사(擬似) 장기 놀이의 상대였다.

 

 

유언비어의 사회학 ③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이유는

 

드디어 유언비어 이야기를 할 차례가 되었다. 유언비어에 관한 글을 쓰려고 생각하자, 20대에 읽으려 했던 책 한 권이 떠올랐다. 책 제목은 이 글의 제목과 같은 <유언비어의 사회학>(원서 출간 1946년, 번역 출간 1977년)이며 저자는 시미즈 기타로(淸水幾太郞), 옮긴이는 이효성이다. 이 책에 나오는 몇 가지 내용을 간략히 검토하면서 내 이야기를 계속해나가겠다.

먼저 이 책에서는 '보도'와 '유언비어'를 사실과 일치하느냐의 여부로는 구별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 둘을 지식으로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오직 신앙으로만 가능하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내용'은 다 아는 바처럼 사실(펙트)이다.

'형식'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나뉘는데, 보도는 정보의 출처가 분명하며 기자가 사실을 취재해 문자로써 객관화한 형식인 반면, 유언비어는 소문의 출처가 분명치 않고 다중에 의해서 사실이 구두로 불안정하게 전달되는 형식이다. 사람들은 보도의 형식을 믿기 때문에 신뢰하는 것이지, 내용에 대한 지식 때문에 신뢰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신앙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보도가 사회라는 환경에서 벌어진 일을 전달할 때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이미지를 전달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환경-이미지-인간'이라는 관계를 설정하여, 인간이 환경에 직접 관계하지 않고 이미지를 통해 관계하는 것으로 보았다. 보도도 직접적인 사실이 아닌 이미지로 전달하고 이미지를 만드는 역할을 한다. 유언비어는 이 이미지가 신뢰를 잃었을 때 당국이 통제하면서 생겨난다.

마지막으로, 인간과 환경 사이에 성립하는 지식은 스스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반면, 인간과 이미지 사이에 성립하는 신앙은 정지된 이미지를 토대로 질서를 유지한다는 것.

나도 언론이 사실의 세계가 아닌 이미지의 세계를 대상으로 한다고 주장하지만, <유언비어의 사회학>의 저자 시미즈 기타로와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은 이미지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다.

시미즈 기타로는 이미지가 실제의 모상 같은 것으로 원상인 실제가 존재한다는 입장이다. (그는 플라톤의 이데아와 모상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음이 틀림없다. 더 많은 설명은 2부 '진보는 퇴보의 다른 이름'을 참고하기 바란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지식에 의해 실제에 다다르는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에, 이미지에 의존하는 언론의 진실은 사실상 실제와는 거의 관련을 맺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이 이미지를 생산하는 만큼 언론에서 지식이 차지하는 비중은 언론을 조종할 수 있을 정도로 막대하다.

이에 반해 나의 이미지론은 '실제' 자체가 '가상'이고 '이미지'라는 것이다. '실제'가 사회 환경을 가리킨다고 보는 점에서는 시미즈 기타로와 다르지 않지만, 나는 사회 환경은 실제인 자연환경과 달리 인간의 '말'이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라고 주장하는 점에서 나는 그와 결정적으로 차이가 난다. 언론에 대한 내 견해는 외형상 시미즈 기타로와 비슷할지라도 결과는 극단적으로 상반되게 나타난다.

 

그러면 내 견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겠다.

가상은 본질을 추구하는 지식이 도달하는 곳이 아니라 실제 말들의 쓰임이 모여 교환되는 시끌벅적한 장터다. 언론은 가상의 세상 그 자체다. 통제나 조정이 필요 없다. 말과 말이 서로 부딪치며 이 물결 저 물결이 엎치락뒤치락 뒤섞이면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합리적 언론관이 우려하는 것 같은 혼란과 파괴, 퇴보, 멸망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계획 도시'처럼 합리성의 메커니즘에 따라 조종되는 언론에서 일어난다. 가상의 언론은 '계획 도시'의 대척점에 서 있는 '자연 마을'에 해당한다. '자연 마을'의 가장 큰 특징은 아름답고, 일반적인 고정관념과 달리 '계획 도시'보다 몇 만 배나 많은 교차점을 가지고 있어 그만큼 더 소통이 잘 이루어지며, 훨씬 '편리하다'는 점이다.

가상의 언론은 '모든 것을 재단하는 절대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다양성이 넘쳐나며 자유롭다. '팩트'나 '증명'은 개인 언론의 장터 속에서 살기 때문에, 전자('팩트'나 '증명')가 낮이라면 후자는 밤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촛불처럼 공존하지 않을 수 없다('산조 정신과 애니미즘 미학' 참고). 반면 합리적 언론관은 전깃불처럼 어둠을 완전히 일소하려 달려든다.

그러므로 가상의 언론에서는 '팩트'나 '증명'이 다양성의 바다에 떠 있는 부표처럼 '상대적 기준'을 형성하게 된다. 원론적으로 말하면, 가상에는 근거가 있을 수 없으므로 '팩트'나 '증명'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 다만 언론의 다양한 쓰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축제 때의 가장행렬처럼 맡은 역할을 놀 뿐이다. 축제가 혼란-죽음-재생을 재연하듯이, '팩트'와 '증명'도 철저히 죽음을 맞아 우주가 재탄생하는 기쁨 속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가상의 언론'이 출현하기는 요원하지만, 근대의 합리적 언론이 등장하기 전만 해도 '가상의 언론'이 세상을 움직였다. '가상의 언론'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이 유언비어다. 태평천국의 난, 프랑스혁명 등 세계역사 속에서 수없이 드러나듯 유언비어는 세상을 뒤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일제 강점기와 독재 시절에 가장 무서운 진실의 힘을 발휘한 것 또한 유언비어였다. '유언비어(流言飛語)'는 '말이 흘러 다니고 말이 날아 다닌다'는 뜻인데, 말의 속성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 어의(語義)는 말의 자유로운 흐름을 막을 경우를 전제한다.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면 말은 어디로든 흘러가고 날아가게 되어 있다. 유언비어가 있기 때문에 말을 가두어둘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말을 막는다는 생각을 아예 지워버리고 말을 통제하는 것이 현대의 합리적 언론 시스템이다. 첫머리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현대인은 자기 검열이라는 통제의 내면화를 통해 말은 고사하고 생각마저도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유언비어도 나올 수 없고, 유언비어가 나온다 해도 맥을 못 춘다.

'합리성의 메커니즘'은 현실적으로 보면 유언비어를 없애는 것으로 완성된다. 따라서 유언비어를 소생시켜야 '합리성의 메커니즘'과의 대결구도를 마련할 수 있다. 유언비어는 반드시 '지금' 그리고 '바로 여기서' 자신을 억압하는 것에 대해 발언한다. 유언비어의 특징은 현재성이다. 미래로 이월시키면 유언비어는 힘을 잃고 만다. '합리성의 메커니즘'이 증명체계를 동원하여 사태에 관한 발언을 자꾸만 미래로 이월시키는 것과는 정반대다.

내가 유언비어를 중시하는 것은 바로 이 현재성 때문이다. 이 글의 주제도 말이 현재성을 상실한 오늘날의 언론 현실에 대한 비판이다. 말의 현재성은 숙명적으로 권력과 부딪칠 수밖에 없고, 그 때문에 살아 있는 소시민(민중)의 언론으로서 유언비어를 열린 자세로 대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신화, 전설, 옛이야기, 시, 소설 따위를 가상이 아닌 실제라고 주장하면, 그래서 사람들이 믿기 시작하면, 통치권력은 이를 유언비어라고 엄단한다. 이처럼 현재의 세상에 관여해야만 유언비어가 되는 것이다. 관여는 세상의 권력과 충돌하는 것을 말한다. 인류사에서 가장 뚜렷한 예가 있으니,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이유는 유언비어를 유포한 죄였다.

▲ "유언비어는 '세상 바깥의 말'(A) 속에 있는 '세상과 충돌하는 말'(B)이다." ⓒ프레시안

유언비어는 '세상 바깥의 말'(A) 속에 있는 '세상과 충돌하는 말'(B)이다. 그러니까 A의 부분집합인 것이다. A를 헛소리라고 한다면, 유언비어(B)는 헛소리 중에서도 세상을 뒤집는 전복의 축제자다.

"내 복에 무슨 난리야"라는 말이 있다. 난리가 복이라는 것이다. 8·15 해방이나 4·19 혁명, 5·18 광주민주화운동, 6월 항쟁 등을 기념하면서 축제를 벌이는 것은 난리가 축제임을, 유언비어가 축제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면 먼저 헛소리(A)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여러 학문 중에서도 헛소리(A)를 가장 배제하는 '역사'와 '과학'에서 헛소리(A)가 얼마나 위대한 것이었는지를 간략히 소개하겠다.

 

 

유언비어의 사회학 ④

그러면 먼저 헛소리(A)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여러 학문 중에서도 헛소리(A)를 가장 배제하는 '역사'와 '과학'에서 헛소리(A)가 얼마나 위대한 것이었는지를 간략히 소개하겠다.

사마천은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사기(史記)>를 집필하면서 권두를 오제(五帝)에서 시작한다. 사마천이 살던 기원전 2세기에도 지식인들은 삼황오제가 황당무계한 전설이라며 언급하기를 꺼렸다. 문장이 우아하지 않고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배척한 것인데, 사마천은 그것을 보고 견문이 좁고 생각이 깊지 못한 소치라고 비판했다.

20세기 초 과학적 사고로 무장한 학자들도 <사기>를 포함한 고문헌의 신빙성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그들도 사마천 당시의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오제'가 가공의 역사라고 배제한 것이다. 그런데 고대 은나라 땅에서 발견된 갑골문자를 조사한 결과, <사기>에 기록된 왕들의 계보가 사실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 시기 중국 최고 지식인들의 실증 정신과 합리적인 태도는 자기 나라의 정신적 원천인 고대(하, 은, 주)를 실종시킬 정도로 지식계에서 폭군 이상이었다. 당시 실크로드를 통한 '문화 전파론'에 경도된 중국의 학자들은 은나라 땅에서 출토된 유물들(청동기 기술, 한자, 천문역법, 심지어 정치 제도까지)의 기원을 모조리 서아시아에서 찾았다. 지금 시각에서 보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학문의 이름으로 버젓이 자행된 것이다. (실크로드상의 문화 전파론에 관한 포괄적인 이해는 졸저 <실크로드, 길 위의 역사와 사람들>, 사계절출판사, 2009 참고.)

사마천이 사료를 대하는 태도를 시공을 초월하여 가장 훌륭한 모범으로 꼽힌다. 헛소리 속에 진실이 있음을 간파하는 사마천의 능력은 궁형이라는 처절한 개인적 고통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터인데, 이것은 이 글의 주제를 벗어나므로 언급하지 않겠다. '헛소리 속에 진실'이 있다는 것은 내가 공부한 '실크로드 탐험사' 자체가 웅변으로 말하고 있다. 전문 학자이자 탐험가들은 실크로드 유적과 유물 대부분을 그 지역에서 나도는 '소문'에 의존해 발굴한 것이다.

과학 분야도 마찬가지다. 일반인들이 아는 것과 달리 서양의 근대 과학은 마술 사상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흔히들 르레상스를 맞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등이 소개되면서 이성 중심의 사고가 자리 잡아 근대 과학이 탄생했다고 이야기하지만, 이성 중심의 사고가 마술·점성술·연금술 등 이른바 황당무계한 헛소리(A)와 주거니 받거니 하는 관계가 아니었다면 근대 과학은 태어날 수 없었다.

근대 물리학을 대표하는 케플러나 뉴턴을 봐도 그렇다. 전자는 점성술사였고 후자는 연금술사였다. 이러한 사실은 합리성을 생명으로 하는 과학마저도 '합리성의 메커니즘' 바깥에서 그것과 대립하는 헛소리(A)의 열린 사고와 지식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반증한다.

헛소리(A)는 '근거' 없음을 본령으로 한다. 그러나 이 '근거' 없음 때문에 생명력을 보장받는다. 신화, 전설, 옛이야기, 시, 소설, 음악, 미술 등 모든 예술이 '근거'를 명확히 두는 순간, 그 생명력은 사라져버리고 만다. 혹자는 예술의 고유한 특성을 사회 전체로 일반화시켜서는 안 된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앞서 설명한 '가상의 언론'을 상기하기 바란다.

헛소리(A)의 토양을 기름지게 하려면 일상에서 쓰는 민간의 말을 활성화하는 일이 시급하다. '노가리' '구라' '야부리' '수다' '말놀이' '허풍' '황당무계' '잡담' '우스개' 따위로 말의 아수라장을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하여 말의 축제가 벌어지면, 현대인의 창백한 얼굴에 연분홍치마 휘날리는 봄날 같은 혈색이 돌 것이다.

다음으로 유언비어(B)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헛소리'에 대비되는 것은 '바른 소리'(正論)다. 후자(바른 소리)는 '합리성의 메커니즘'을 대표하는 언론이다. '허튼 가락 대 정악(正樂)'의 대비를 빌린 것이다(앞의 글 '산조 정신과 애니미즘' 참고). '바른 소리'가 세상을 지배하는 말이라면, '헛소리'는 버림받은 세상 바깥의 말이다.

헛소리가 세상 안으로 들어와 대접받으면 문학이 되고 예술이 된다. 나아가 기적이 일어나 경전이 될 경우에는 오히려 '바른 소리'의 절대기준으로 등극해서 황금률이 된다. 예수의 말은 당시에는 유언비어라 하여 처단을 받았지만, 세상 안으로 화려하게 입성한 뒤에는 '세상의 황금률'이 되었다. 그러자 예수의 말은 헛소리로서의 생명을 거두게 되었으며, 그것은 예수를 영원히 죽게 하고 말았다.

'합리성의 메커니즘'이 지배하는 오늘날, 유언비어 없는 세상은 죽은 세상이나 마찬가지다. <유언비어의 사회학>의 저자 시미즈 기타로는 유언비어 없는 세상을 유토피아로 그렸다. '유토피아야말로 지옥이다'라는 글을 쓴 내가 볼 때, 그가 그런 결론을 내린 것은 아주 당연한 귀결이다. '바른 소리'는 유토피아를 지향하여 미래에 살지만, 유언비어는 전적으로 '지금' 그리고 '여기'에 살기 때문에 세상과 대결할 수밖에 없다.

현실을 한번 보자. 어떤 큰 사건이 터졌을 때 정부는 맨 먼저 과학적인 조사를 들고 나온다. 미국산 수입 쇠고기 파동 때, 서해안 삼성 유조선 사건('바른 소리'인 '보도'는 '태안 기름 유출 사건'이라고 표현한다) 때, 삼성 용산 뉴타운 사건(보도는 '용산 사건') 때, 노무현 죽음 의혹 사건(보도는 '노무현 서거 사건') 때마다 정부와 언론과 오피니언 리더들은 좌건 우건 할 것 없이 공정하고 과학적인 조사를 강조했으며, 그 뒤를 이어 방송과 신문에서 활발한 토론이 진행되었다.

이렇게 당국이 사건의 원인을 찾는답시고 과학적인 절차를 밟는 동안, 시민들은 아무 대책 없이 기다려야만 한다. 시민들이 기다리는 이유는 근거 때문인데, 과학적인 조사가 이루어지는 동안 시민들은 구경꾼의 처지로 떨어진다. 시간이 지나면서 분노는 점점 사그라져버린다. 이를 막는 것은 불가항력이다.

매스컴에서는 매일 전문적인 내용이 쉬운 말로 설명되고, 도표가 만들어지고, 알기 쉬운 그림이 그려지고, 이렇게 해서 예비 과학도가 된 시민들 앞에 모든 문제점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다. 어느덧 시민들의 목소리는 추측에 불과한 대신, 전문가의 발언만이 공식적인 견해가 된다. 전문가들의 견해는 대체로 정당의 수만큼이나 갈린다. 시민들은 전문가들의 견해를 근거로 자기 생각을 말한다. 이때쯤이면 공식적인 견해와 다른 목소리는 진즉에 근거 없는 것으로 취급받아, 인터넷 등의 사적인 공간을 잠시 떠돌다가 사라진다.

현대의 합리적 언론 시스템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과학적 조사에 참여한 전문가의 양심선언이 없는 한 진실은 반드시 사장(死藏)되고 만다. 지난 1987년의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은 양심선언 덕에 진실이 세상에 알려진 아주 특별한 경우다. 모든 사건에서 양심선언을 기대한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보다 더 어렵다. 따라서 진실을 밝히는 문제는 요원해진다.

그러나 사건의 현재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불이 나면 당장 불을 꺼야지, 원인을 밝히고 나서야 불을 끌 수는 없다. 바로 이 현재성을 사멸시키는 것이 '합리성의 메커니즘'인 반면, 현재성을 생명으로 하는 것이 '유언비어'다. 유언비어는 즉각적으로 진실을 밝힐 것을 요구한다. 시간이 오래 지나면 진실이 힘을 잃어서 결국 진실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현자(賢者)는 유언비어다.

현대인의 가장 잘못된 생각은, '합리성의 메커니즘'은 진실을 추구하는 데 반해 '유언비어'는 거짓 소문을 퍼뜨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전도된 생각이다. 유언비어가 중시하는 것은 '진실' 하나밖에 없다. 유언비어야말로 진실의 배후다. 유언비어는 들개처럼 진실에 굶주려 있어서 어마어마한 폭발력을 내포하고 있다.

예컨대 인혁당 사건의 경우, 고문으로 조작된 사건이라는 사실이 40여 년 만에 밝혀짐으로써 ('합리성의 메커니즘'에 따라) 관련 당사자들과 그 가족들이 명예를 회복하고 나라에서 보상은 받았지만, 가해자들에 대한 단죄나 사회의 변화까지 가져오지는 못했다. 진실이 힘을 잃어 이미 진실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유언비어의 현재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일은 역사 속에서 비일비재하게 마주치는 비극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다음과 같은 내용도 이 비극의 대표적인 사례다.

"이번에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문건들은 NARA(미 국립문서보관소) 소장 문서로, 1965년 한일협정 체결을 전후하여 전개된 한미일 3국 간의 비밀 협상 과정과 불법 정치 자금 수수, 독도 문제 등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주로 미 CIA의 정보 보고 및 주한, 주일 미 대사관과 미 국무성 간에 오고 간 전문, 주한미대사관 비망록, 미 국가안전보장회의 문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문서들은 지난 1993년 비밀해제 문건으로 분류되어 일반인 열람이 가능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문서 가운데 일부가 여전히 비공개 처리돼 있어 외교 관계상 치명적인 사안이 많이 남아 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고 하겠다."(<오마이뉴스>, 2004년 8월 12일)


위의 '비밀문서 해제'를 통해 박정희 정권이 한일협정 뒷거래로 5년간 일본 기업에서 6600만 달러를 제공받았다는 진실 등이 알려졌지만, 이것도 인혁당 사건과 마찬가지로 진실이 현재성을 상실해 힘을 잃은 경우다. 꽤나 민주적인 절차로 보이는 '비밀 문서 해제'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유언비어의 싹을 없애기 위한 고도의 편법에 불과한 것으로, 이 또한 '합리성의 메커니즘'의 자기완결성에 불과하다.

진실의 배후인 유언비어가 살아 있는 한, 시간은 현재성을 상실하지 않는다. 헛소리(A)가 비옥하고 풍요로워야만 그것이 가능하다.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바른 소리'는 헛소리에 둘러싸여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근대 이전까지 인류는 그런 삶을 살아왔고, 그래서 세상은 생기와 활력을 잃지 않았다.

창조-혼돈-재창조는 우주의 생리다. 혼돈 없는 창조가 있을 수 없는데도 현대는 그것을 부정함으로써 우주의 생리를 정면으로 거스르고 있다. '헛소리(A)를 혼돈이라 하여 싹부터 완전히 제거하는 것'과 '우주를 인간 이성으로 장악하기 위해 우주의 바깥을 없애는 것'은 '합리성의 메커니즘'이라는 수레의 양대 바퀴다.

우주는 반드시 바깥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옛사람의 지혜를 잠시 빌려보자. 만다라를 보면 우주를 나타내는 원 바깥에 사각형의 우주가 또 있다. 우주가 들어갈 자리가 없으면 우주를 그릴 수 없기 때문이다. 탑의 기단도 그렇게 되어 있다. 우주는 겹겹으로 이루어졌으며, 우주의 바깥은 무한하다.

그 무한한 우주를 유한한 모형으로 만든 것이 현대의 과학이다. 현대 수학은 유한한 우주를 위해 모순 없는 절대적 증명의 '체계'(형식)를 만들고자 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그것이 불가능하며, 동시에 무한의 바깥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과학은 스스로 자신의 토대를 파괴한 것이다.

한국의 언론 환경과 관련해서 말하면, 모순 없는 절대적인 증명 체계를 지향하는 '합리성의 메커니즘'은 이제 대중의 눈에 점점 짜고 치는 고스톱으로 비치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자신을 방해하는 적을 소탕하는 데 (어느 정도 마음을 놓을 만큼) 성공했기 때문에 '합리성의 메커니즘' 스스로 자신의 토대를 파괴할 위험을 드러낸 결과일 것이다. 그럼에도 '합리성의 메커니즘'은 건재하다. 여전히 북한의 위협을 거론할 수 있음으로써 '합리성의 메커니즘'이 계속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첫머리에 말한 바와 같이, 기생충을 체제 내로 끌어들여 자기 붕괴의 위기를 연기시키기 때문이다).

이를 무력화하는 길은 '합리성의 메커니즘'의 생존 전략인 좌우 대결의 구도에 말려들지 않는 것, 즉 헛소리(A)가 '합리성의 메커니즘'을 직접 상대해서 우습게보고, 비웃고, 풍자하고, 농락하고, 간질이고, 꼬집고, 때리고, 오리발 내밀고, 가장 높은 곳까지 올려줬다가 바닥을 치워버리고, 진즉에 내 그럴 줄 알았다고 놀리고, 저거 몇 조금 안 남았다고 호언장담하고·······. 이러한 떠들썩함 속에서 말의 축제를 벌이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