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김성수의 마술 "난 민족주의자야!"
우파의 가면을 쓴 모리배 ①
현 정권은 용산 참사를 이데올로기화해서 색깔론으로 몰아갔다. '나봇의 포도원'에서 봤듯이, 살인 행위를 정당화하고자 하느님을 파는 짓을 한 것이다.
좌파 정권 10년간 떼잡이 문화를 양산해 법과 원칙이 무너진 결과라며, 좌파가 희생자들의 목숨을 정치 공세에까지 이용한다고 강변한다. 용역과 경찰이 합동 작전을 편 결과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는데도 정당한 법 집행이라고 우기면서 말이다. 당시 텔레비전에서 김석기 전 서울경찰청장이 퇴임하는 장면을 보았는데, 공권력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두 뺨에 주르륵 눈물 흘리던 그 모습을 도저히 잊을 수 없다.
이데올로기를 통한 진실의 조작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사에서 긴긴 역사를 자랑한다. 쉽게 말해서, '도둑이 되레 매를 드는 적반하장'이 이데올로기를 통해 정당화되는 일이 멀리는 상고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니까.
여기서는 아주 가까운 20세기만 돌아보자. <동아일보>를 창간하고 고려대를 세운 김성수는 친일파인데도 민족주의자로서 우익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어 있다. 친일파가 어떻게 민족주의자가 될 수 있는가? 그런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백주대낮에, 그것도 근 100여 년 동안 전 국민이 보는 가운데 아주 당당하게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도둑이 주인이 되어 외려 주인을 도둑으로 몰 수 있었던 것은 '언어를 통한 조작'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 조작은 '언어에 대한 인간의 오해'에 기반하고 있다. 20세기 들어 철학계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轉回)를 일으킨 비트겐슈타인은 바로 그 점을 탐구하였다. 그의 사상은 전후기로 갈리는데, 전기를 대표하는 <논리철학논고>에서 '이름의 의미는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이라고 한 명제를 스스로 뒤엎고, 후기의 <철학적 탐구>에서 '이름과 명명된 사물은 별개이며 전혀 다르다'는 것을 논파하였다.
"한편에는 이름이 있고, 한편에는 명명된 것이 있다. 여기에 나무라는 말이 있고 저기에 실제 나무가 있다. 두 사물은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그것들을 연결하는 어떤 자연적 관계도 없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어떻게 해서든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전자는 후자를 지칭하고 후자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게 이 연관성이 이루어지는가? 어떻게 종이 위의 글씨에 불과한 말이 그 자신을 넘어서 그 자신과 전혀 다른 대상과 관련을 맺는가? 그러면 이름과 명명된 것—혹은 간단히 언어와 세계 사이의 이러한 이상한 관계는 무엇인가? 이 질문은 전기와 후기의 비트겐슈타인의 모든 저작을 관통하는 주제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죠지 핏처 지음, 박영식 옮김, 서광사 펴냄)
전기의 비트겐슈타인은 이름의 '의미'는 이름이 나타내는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이때 의미라는 정신적 행위는 대상에 어떤 본질이 숨어 있다는 전제 아래 이루어지므로, 이름(언어)은 대상(세계)의 본질과 필연적으로 관련을 맺는다. 반면 후기의 그는 "의미하는 것을 정신적 행위라고 부르는 것보다 잘못된 일은 없다"고 단호히 말한다. 이름의 의미는 쓰임에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쓰임을 배제한 채 언어를 무균의 실험실에 고립시켜 추상적으로 고찰하였다. 이는 본질을 찾으려는 열망, 즉 '일반성에 대한 열망' 때문이다. ("이 열망이 너무 강해서 우리는 모든 것이 실제로 본질을 갖는다고 가정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241쪽.)
바로 여기서 철학적 혼동이 일어나고 언어에 대한 오해가 발생한다. 이를 바로잡으려면 말(또는 이름)을 '문맥'과 '실제 상황' 속에서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험실을 박차고 나와 삶 속으로 들어가면, 단일성이 아니라 다양성, 즉 말의 다양한 의미가 활기차게 나타난다. 이 다양성, 다양한 쓰임새이야말로 말(또는 이름)이 본질(단일성)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뚜렷한 반증이다. 말들은 오직 쓰임(use) 속에서만 생명을 얻는다. (비트겐슈타인은 말의 의미와 말의 쓰임(use)을 동일시한다. 또한 말의 의미를 마음속에 일어난 무엇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의미가 정신적 행위로 말미암아 생기는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모든 기호는 혼자서는 죽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엇이 기호에 생명을 주는가? 사용될 때만 기호는 살아난다." (<철학적 탐구>,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지음, 이영철 옮김, 책세상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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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전기의 비트겐슈타인처럼) 이름이 어떤 대상의 의미를 가리킨다고 알고 있는데, 이 오해를 없애지 않으면 이데올로기를 통한 진실의 조작에서 결코 빠져나올 수 없다. 언어에 대한 오해의 예를 하나 들어보자. 만약 이름이 실제와 같다면, 눈앞에 있는 이 실제의 의자가 영어로 chair, 중국어로 倚子, 스와힐리어로 kiti 등 왜 이렇게 다양하게 불리는가? 이것은 마치 사물에 이름표를 붙인 것과 같지 않은가? 이름표에 적힌 이름은 의미와 상관없는 기호에 해당하며, a, b, c, d로 표기된 기호보다 더 의미 있는 어떤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름-의자'가 '실제-의자'에 내재한 본질적인 요소를 지칭한다고 생각한다.
후자가 파괴되어도, 전자는 의미를 잃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이름의 소지자와 이름의 의미가 별개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여러분이 각각의 이름에 대응하는 본질이 있다고 믿는 한, 플라톤(이데아론이 대표적이다) 이래 수천 년 동안 철학이 저질러온 미혹에서 벗어날 길이 없을뿐더러, 철학이야 어찌 됐건 관심 없다고 도리머리를 쳐도 현실적으로 날마다 부딪치는 것들과 어떤 의미를 교환하며 살 수밖에 없는 마당에야 여러분은 이데올로기의 조작에 놀아나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중요한 것은 낱말이 아니라 낱말의 의미라고 한다. 그리고 그때에 의미를 낱말과 다르기는 하지만 낱말과 같은 종류의 사물로서 생각한다. 여기에는 낱말, 여기에는 의미. 돈, 그리고 그것으로 살 수 있는 암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 돈, 그리고 돈의 이용.)" (<철학적 탐구>, 120절)
이 내용은 매우 중요하다. 쉽게 말해서, 기호에 해당하는 이름표는 사용가치가 아니라 의미를 구입할 수 있는 화폐라는 것이다. 낱말은 돈이고 의미는 돈으로 살 수 있는 암소이거나 돈의 이용. 자, 그렇다면 '이름-의자'라는 돈으로 살 수 있는 '의미-의자'는 무엇일까? 의미-의자는 비유컨대 구두일까 염소일까? 나는 실제로 의자의 의미를 의자라는 말이 사용되는 일상 속에서 취득하면서도, 의자의 의미를 곰곰이 또는 철학적으로 생각하자마자 의자의 의미는 단숨에 하찮은 일상을 박차버리고 모든 문맥을 떠난다. 나는 '절대적으로 단순한 것'(사물의 본성 속에 있는 존재론적 신비)을 의미로서 추구하지만 이렇게 해서 발견한 의미는 '환영'에 불과하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철학자의 임무는 오해에서 비롯된 환영을 제거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오해를 통해, 특히 언어에 대한 오해를 통해 환영을 만들어왔다.)
이들 곰곰이 또는 철학적으로 생각하는 자들은 기기묘묘한 온갖 환영을 만들어내어 그것이 진정한 의자의 의미라며 판매한다. 판매가 이루어질 때, 의미라는 환영은 시장에서 교환가치의 형태를 띤다. 교환가치는 사용가치에 기반을 두지 않고서는 홀로 존재할 수 없다. 물신(物神)이라는 환영이 사용가치에 빙의되어 시장에서 활동하는 것이 교환가치다. 화폐는 '이름', 사용가치는 '실제-의자', 교환가치는 '의미-의자'에 비유할 수 있다. 시장에서 가격은 교환가치이므로, 이름(=화폐)은 언어시장에서 의미(=교환가치)가 된다. (물신숭배는 인간이 상품을 생산했음에도 불구하고, 상품이 인간과 관계없이 고유한 힘을 가지고 활동하는 것처럼 생각하여 상품 등 인간의 생산물을 숭배하는 현상을 말한다.)
실제 물건(=의자=사용가치)을 교환가치로 만드는 환영(물신)은 실제 물건을 정신적인 분위기로 에워싼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름(낱말 또는 문장)의 의미를 물신 숭배한다. 당신이 '이름-의자'(화폐)로 산 '의미-의자'는 구두나 염소, 또는 악마가 앉는 자리이거나 천사가 앉는 자리다. 의미가 실제(사용가치)를 떠나서 당신한테 마술을 걸면 마술에 걸린 당신은 의미에 무릎을 꿇고 복종한다.
이렇게 해서 친일파가 민족주의자로 둔갑한다. 김성수 일파가 자신들이 행한 실제의 사실(친일행위=사용가치)을 환영을 통해 조작해 만든 상품이 '의미-민족주의'인바, 이는 마치 발암 물질로 만든 상품을 항암 제품이라고 선전해 파는 것과 똑같은 반사회적·반윤리적 행위다. 여기서 이중의 질곡이 나타난다. 정상 제품이라 해도 '환영'의 문제가 제기될 터에 반사회적인 제품을 만들어 사업을 해도 처벌은커녕 오히려 존경과 인기를 누리는 '시장'이 한국이라는 것이다. 이 이중의 질곡은 앞서 말한 대로 멀리 삼국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데올로기 조작의 비옥한 토양이다.
모리배들의 언어 조작술 "빨갱이는 악마!"
우파의 가면을 쓴 모리배 ②
지금까지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지만, 언어 조작술이야말로 이들이 성공한 비결이었다. 구체적으로, 김성수 일파가 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항일 독립 운동의 정통을 내세울 수 있었던 것도, 이름과 대상이 일치한다는 오해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름은 대상의 본질을 가리킨다고 모두들 굳건히 믿고 있지 않은가. 실제의 사용에 근거해서 이름을 부르는 것만이 근본적인 처방이다. 김성수 일파의 활동을 볼 때, 친일파 또는 기껏해야 민족개량주의라는 이름이 알맞다. 그들이 가슴에 달고 다니는 민족주의라는 이름의 훈장은 한시 바삐 떼어내 수거돼야 한다.
한 사회에서 국권론을 옹호하는 세력을 우파라 하고 민권론을 옹호하는 세력을 좌파라 할 때, 친일파나 민족개량주의자가 우파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들은 매국노일 뿐이다. 그러면 이자들이 우파로 행세하는 데 이용한 환영들을 알아보자.
민족이라는 낱말은 근대 식민지 사회에서 신과 같은 아우라를 가지고 있다. 근대란 근대국가 없이는 존립할 수 없기 때문에 식민지 인민들은 자주적인 근대국가 수립을 열망하는 것이며, 따라서 민족주의 진영이든 사회주의 진영이든 민족개량주의 진영이든 민족의 이름을 걸지 않을 수 없다. 일례로, 중국 공산주의나 북한 공산주의도 기실은 민족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서구에서는 근대국가의 구성원을 국민, 근대사회의 구성원을 시민이라고 부르는 데 견주어, 식민지에서는 민족과 민중이 이를 대신한다.)
이때 민족은 핏줄과 혈통을 본질—본질은 환영이다—로 하므로 자연히 단군이 부각될 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국권론에 목숨을 거는 우파와 민권론을 생명으로 하는 좌파가 민족을 이해하고 거기에 부여하는 의미가 서로 다를 것은 자명하다. 여기서는 그 차이를 설명하는 게 목적이 아니므로 개량주의자들이 '민족'을 자기들의 특허 상표로 차지하게 된 사정에 집중하겠다.
대종교와 임시정부 등 민족주의자들의 항일 투쟁이 얼마나 가열(苛烈)했는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개량주의자들이 느낀 열등감과 콤플렉스와 증오가 어떠했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민족주의자들을 국수주의자, 테러리스트 또는 사회주의자라고 부르면서 세계성과 과학성을 결여했다느니, 사회주의자들과 한패가 되어 계급 투쟁으로 민족을 분열시킨다느니 맹비난을 퍼부으며 자기들만이 진정한 민족주의자라고 자처한다.
친일로 부귀영화를 누리는 이들은 민족주의라는 간판밖에는 살 길이 없으므로 거기에 사활을 거는데, 그 간판은 그들의 활동과는 정반대인 까닭에 환영을 통한 조작 말고는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언어 조작에 온 힘을 쏟는다. 그들은 빨갱이라는 말을 탄생시키고, 정국을 민족주의 대 빨갱이로 양분하는 구도를 만든다. 반대 세력은 모두 빨갱이로 몰아붙여야만 그들만이 민족주의 세력이 될 수 있다.
그들의 민족주의는 빨갱이를 통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단독으로는 존립할 수가 없다. 그것은 빨갱이처럼 실체가 없는 '환영'이다. 환영이 햇빛 속에 사라지면 빨갱이 없는 그들의 실체가 친일파라는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나기 때문에 그들은 죽자 살자 장막을 가리고 있는 것이다.
빨갱이는 민족사회를 분열시킨 악마이므로 대척점에 선 그들은 당연히 민족일체의 수호자가 된다. 단군과 홍익인간이 민족일체의 이념으로 등장한다. 외관상 전혀 손색이 없을뿐더러, 이름과 대상이 일치한다는 사람들의 믿음 위에서 '환영'은 '실제'의 위력을 발휘한다. 이 모든 게 언어를 조작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이들에게는 환영을 생산하고 유통시키기 위해 언론과 교육과 문화가 절대적으로 중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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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호도 탓에 실상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대한민국 교육은 완전히 이들의 이념을 전파하는 곳이다. 교육법 제1조는 교육 이념으로 홍익인간을 내세운다. 안호상은 홍익인간 이념을 기본으로 일민주의(一民主義,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네다")를 주창하여 이승만 독재의 철학을 제공했다.
이는 이미 "1928년 최남선이 <동아일보> 지상을 통해 단군의 건국이념으로 홍익인간을 내세우고, 조선의 구원(久遠)한 생명에 이것이 뿌리이며 조선인의 무궁무진한 창조 진화적 생활에 이것이 추진기라고 한" 말의 연장선상에 있다. (<1910~20년대 동아일보 주도층의 정치 경제 사상 연구>, 김경택 지음, 연세대 사학과 박사 학위 논문, 1998, 184쪽)
일제 강점기 이들 민족개량주의자들은 단군을 이용해 친일 행위와 민족 분열 행위를 민족운동으로 전도하고 미화하였다. 단군의 민족주의는 고려 중기 이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항일독립투쟁에 몸 바친 나철·신채호를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의 핵심 사상이기 때문에 당시 식민지 소비자에게는 오랫동안 사용해본 중에 충분히 검증된 최고로 안전한 제품이라고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 약을 똑같은 이름으로 민족개량주의자들이 발암물질을 넣어 제조 판매하였으니, 소비자는 폭력적인 시장에서 다른 것을 사면 맞아 죽으니까, 아니면 그게 그거려니 하고, 아니면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는 식으로 독이 든 유사 제품을 계속 사 먹은 것이다.
유사 제품을 거의 일생 동안 먹어온 소비자들은 이제 자기들 스스로 지금 복용하는 약이 정상 제품임을 믿어 의심치 않게 되었다. 바야흐로 도둑이 오히려 매를 드는 적반하장이 완성된 것이다. 그리하여 친일파요 민족 분열주의 세력은 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우파 노릇을 하는 데서 적어도 언어 시장에서만큼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게 되었다.
민족개량주의자의 사회발전이론도 그들의 민족 이념과 궤를 같이하여 조작된 것이다. 대표적으로 김성수 일파는 당시 제국주의적 세계 질서를 옹호하고 있던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여 일제의 침략을 정당화하고, 민족의 진로가 일본자본주의의 이식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가히 지금 한국 사회에서 뉴라이트가 주장하는 식민지근대화론의 선구라 할 만하다.
이들은 약육강식과 우승열패를 특징으로 하는 사회진화론을 사회발전 모델로 삼아 민족이 개조되어야 하며(민족개조론) 독립을 위해서는 그만한 실력을 갖출 만큼 진화해야 한다(실력양성론)는 논리를 펼쳤다. 이는 바로 제국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견해로 민족주의와 정면 대립한다. 그런데도 민족주의의 외피를 쓸 수 있었던 까닭은 발전과 선진화를 향한 사회의 열망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언어 조작을 통해 환영이 위세를 떨칠 수 있는 좋은 토양이었던 것이다.
민족개량주의자들은 이런 기름진 토양을 활용해 사회발전론에서도 좌파의 계급투쟁론과 대항하는 구도를 만들어냄으로써 반사적으로 우파의 자리를 확보했다. 좌파의 계급투쟁론을 빨갱이의 민족 분열 책동으로 맹비난함으로써 매판자본이 민족자본으로 둔갑한 것이다. 교과서에서 김성수 일가의 경제 활동을 민족자본으로 규정하는 것이 좋은 예다.
뉴라이트의 당당한 고백 "우리는 '친일파'다"
우파의 가면을 쓴 모리배 ③
그러면 시대를 건너뛰어 뉴라이트에 대해 살펴보자. 이들의 핵심 이론인 식민지근대화론이 일제 강점기 민족개량주의 이론의 현대판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신보수라면 얼마든지 장밋빛 이념을 내놓을 수 있었을 텐데, 하고 많은 이론 중에서 왜 하필이면 이 이론을 들고 나왔을까? 낡아빠지고 친일파를 옹호하는 이 이론은 이른바 보수 우파의 거짓 없는 자기 고백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말하자면 이제 조작을 그만두고 정확한 이름을 찾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그만큼 세상이 변한 것이다.
뉴라이트는 냉전의 종식과 함께 불어닥친 세계화의 물결, 신자유주의와 네오콘(미국의 신보수주의자들)의 득세, 민주정부 10년이라는 객관적인 조건 속에서 자기를 무장했다. 이 시기에는 '민족'이라는 화두가 쇠퇴하고 '선진화'가 급부상하기 좋은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민주정부 10년 동안, 정권이 민족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는 관계로 민족주의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이 열렸다. (친일파를 기반으로 한 이승만과 일본군 장교였던 박정희가 민족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그것을 보상하기 위해 민족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을 수 없었던 것과 비교가 된다.) 게다가 민주정부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는 데 앞장섰다. 이런 흐름 속에서는 이념보다는 전문성이 각광을 받았다. 동시에 고급 교육에 대한 수요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뉴라이트는 이념에 구애받지 말고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 특히 역사 문제를 객관적인 사실을 통해 구명하자는 논리를 들고 나왔다. 여기에다 높아진 국민의 교육 수준—그 결과, '합리성'이 가치 척도의 기준이 된다—도 한몫해 새로운 의미 조작의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합리성·전문성·객관성 등이 사회 운영의 원리로 자리 잡으면서 뉴라이트는 그들 선배들이 명분으로 내걸었던 민족의 짐을 벗어던지고, 옛날 역사를 오직 '발전'이라는 객관적 사실에만 근거하여 민족 감정에 치우침 없이 실증적으로 구명하겠다고 나섰다. 이들은 그것만이 사회 발전의 발목을 잡는 이념에서 벗어나 한국 사회를 선진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같은 선상에서 이명박 정권은 사회 발전의 방향을 '선진화'로 확정했다.
이처럼 한국 사회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흐름을 내면화하는 과정에서 '선진화'는 가장 식욕 좋은 '욕망'이 된 것이다. 과거에 '민족'이 그랬던 것처럼 현재는 그 자리를 '선진화'가 차지했다. 이명박 정권과 뉴라이트는 옛 선배들의 전례를 본받아 적반하장 식으로 이 단어를 선점했다.
어떻게 적반하장인지 간단히만 보자. 군사독재에서 민주화로 가는 선진화를 가로막은 게 누구인가? 그리고 자신이야말로 산업화의 주역이라고 금과옥조처럼 말하는데, 과연 그 진정한 주역은 누구인가? 독재가 아닌 민주주의를 기준으로 판단하면 그 주역은 '민(民)'임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권과 뉴라이트는 '산업화의 '청사진'에 따라서 '민'을 조직하고 끌고 간 지도력이 중요하다는 이유로 그 공(功)을 자기들(군사 독재 세력)에게 돌린다. 이름하여 개발독재.
이런 의식이야말로 치졸함과 무식의 소치인데, 그 이유로 세 가지를 들겠다. 첫째, 건물이 청사진에 따라 지어진다는 생각은 그릇된 환상이라는 사실이 20세기 학문의 성과로 밝혀졌다. 건물은 건축가가 짓는 것이 아니라 관련된 사람들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낸 결과다. 둘째, 이러한 수구 세력의 허위의식은 어마어마한 사회적 문제를 야기했다. 권위주의 문화, 대규모 도시 빈민의 양산, 폭력과 사회 갈등 등 그 사례는 하도 많아서 일일이 꼽을 수조차 없을 정도다. 셋째, 그러한 흙탕물을 민(民)이 삶 속에서 정화했다.
이처럼 적반하장으로 이명박 정권과 뉴라이트는 그 공을 가로채서 '선진화'라는 단어를 마치 자신들의 전매특허인 양 채택했다. 선진화를 내세운 이들의 언어 조작은 벌써 도를 넘은 지 오래다. 공기업 민영화를 비롯해 가스, 수도, 전기, 국민건강보험 등의 민영화 계획이 국민 여론의 벽에 부딪치자 이를 '선진화'로 이름만 바꿔 시행하려 하고 있다. 심지어 시위 문화의 선진화라는 말까지 만들어낸 마당에, 아마 조금 있으면 언론 통제를 위해 국민 여론의 선진화라는 말도 만들어낼 것 같다.
이명박 정권과 뉴라이트한테 '선진화'를 선점당한 민주 진영은 '선진화'에 대항할 '진지'(단어)를 구축하지 못하고 속앓이를 하고 있다. 이명박 정권이 실제의 진상을 오도한다고만 할 뿐이다. 즉 "선진화는 그게 아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민주 진영이 '진정한 선진화'라도 추구하고 있다는 건가? 정치판을 '가짜 선진화' 대 '진짜 선진화'의 구도로라도 짜야 한다는 건가?
이처럼 선진화의 내용은 정파에 따라 서로 다를지라도 선진화라는 말은 정파를 불문하고 한국 사회의 방향타가 되었다. 이를테면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에서조차 선진화라는 말을 무슨 수로 부정하겠는가? 우리 사회가 선진화돼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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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이석기 전 경찰청장이 눈물 흘리며 용산 참극을 거룩한 성전에 제물로서 바친 하느님이요, 이명박 대통령이 경제를 살리고 법과 질서를 지켜야 했기에 용산 참극을 초래한 잘못에 대해 결코 국민 앞에 사과할 수 없었던 하느님이요, 수구 세력들이 용산 참극을 색깔론으로 몰아갈 수 있었던 하느님, 그 하느님의 실체가 바로 지금 우리 한국 사회의 '선진화'라는 사실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민족을 제치고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되었다. 이 나라에서 선진화의 실제 기능은 '부자 되게 해주는 것'이다. 더욱이 이 나라는 선진화라는 의미를 조작하거나 왜곡할 필요도 없이 거짓 선진화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명박 정권과 뉴라이트는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이른바 '이념을 제거한 실용주의'를 주창하면서 좌파를 선진화의 발목을 잡는 이데올로기 세력으로 매도한다. 그래서 이들은 민주정부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그러나 떠올려보라. 민주정부 10년 동안 개인주의가 얼마나 팽배하고 '부자 되세요'와 '웰빙'이 얼마나 붐을 이루었는지. 이것이야말로 신자유주의의 활약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바로 이 기름진 토양 위에서 핀 꽃이 현 정권이 내거는 '선진화'다. 이들은 오직 돈이 목적인 사업을 계획하면서 여론의 반대에 부딪치면 선진화라는 말로 바꾸고 있다. 선진화가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민족'만 해도 그렇다. 이중질곡의 시장에서 의미를 왜곡하려면 독재가 필요했는데, '선진화'에 이르러서는 의미의 왜곡이 불필요해지면서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자진해서 왜곡된 의미를 진정한 의미로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그렇게 주장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수많은 희생을 통해 쟁취한 민주화의 내용이 그 알량한 다수결 원칙 말고는 아무것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우리 사회는 가짜-선진화의 독무대가 되기에 안성맞춤인 토양을 제공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 사회는 말 그대로 돈이 판치는 세상이 되었다.
이러한 비옥한 토양에서 뉴라이트는 '식민지 근대화⟶박정희의 개발 독재에 의한 근대화⟶선진화'라는 한국 근현대사의 뼈대를 새 교과서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파시즘(재벌을 물적 기반으로 하는)을 향한 이론 구축 작업이다. 이대로 가면 민주주의는 종언을 고하게 된다. 그러나 6·2 지방선거에서 보았듯이 아직은 우리 국민에게 이를 저지할 힘이 있다. 문제는 정치 세력이다. 민주 세력이 파시즘에 대항해 어떠한 민주주의를, 어떠한 사회 발전을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을지 몹시 궁금하다. 그 대안을 제시하면서 선진화의 허구를 정면으로 돌파해야만 하는데, 과연 정면 돌파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이 글의 주제도 아니려니와 내 능력을 벗어난다. 다만, 내 나름대로 선진화의 허구와 관련해서는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글 '진보는 퇴보의 다른 이름'에서 철저히 비판했음을 말해둔다. 그리고 '선진화'에 대항할 민주 진영의 '진지'(단어)로서 '자연화'를 제안한다.
펜이 칼보다 무섭다고 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언어는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다. 우파의 가면을 쓴 모리배들은 언어 조작술을 통해 권세를 누려왔다. 그들의 가장 빛나는 업적은 빨갱이라는 말을 생산한 것이다. 국어사전에는 빨갱이가 공산주의자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나와 있지만, 실제로 사용되는 것을 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다. (이른바 우파들이 현대 중국 공산주의자들을 빨갱이라 하기는커녕 얼마나 잘 모시는지를 보라.)
우리 사회에서 빨갱이는 반드시 처단해야 할 악마와 같은 존재로 취급받는다. 그러니까 아합 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을 욕심에서 나봇이 하느님을 욕했다고 누명을 씌워 죽일 때와 같은 상황에서 쓰는 말인 것이다. 이 빨갱이야말로 우파의 가면을 쓴 모리배들이 자기 존립을 위해 만들어낸 환영 그 자체로만 이루어진 유령이다.
이 유령 때문에 한국의 정치판은 아주 기형적이 되었다. 우파를 기준으로 정파들의 위치가 자리매김 되는 한국의 정치지형에서 우파가 없다는 사실은 참혹한 비극이다. 가짜-우파는 허상의 좌파를 설정하여 김대중과 노무현을 임의적으로 그 자리에 세우고서 '좌빨', 즉 좌파 빨갱이라는 이미지를 덧씌웠다.
과연 전 세계적인 우파 정책인신자유주의를 추진한 두 사람이 좌파일 수 있을까? 정치인과 정당의 성향을 정책을 바탕으로 평가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을 토대로 한단 말인가! 더욱이 김대중은 김성수 일파의 한민당을 계승한 옛 민주당의 신파(新派) 출신 아닌가? 그리고 그가 이끈 정당에서 나온 노무현은?
이들이 이끄는 세력을 사람들이 좌파라고 부르는 순간, 우파 활동이라는 이름이 가리켜야 할 실제 대상(민주정권의 정치 활동)을 좌파 활동으로 받아들이는 기형적인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또 신자유주의 정책 탓에 빚어진 심각한 양극화가 마치 좌파가 내놓은 정책이 잘못되었기 때문인 것처럼 간주되면서 실제 좌파의 정책은 그 그늘에 묻히게 될 가능성이 높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정명(正名)을 찾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가장 시급한 것은 'MBC에 정명을 찾아주는 일'-지난 2008년 방송문화진흥회 20주년 기념식장에서 최시중 방통위원장이 MBC를 비난하기 위해서 한 말. "MBC는 공영방송인가 공민영방송인가 민영방송인가. 과연 MBC의 정명은 무엇인가를 돌아볼 시점이다."-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이름들의 정명을 찾아주는 일이다.
이데올로기 조작은 이름의 의미가 지닌 정신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오피니언 리더들은 의미의 공급자이기 때문에 자의든 타의든 이데올로기 조작의 주역을 맡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과 같은 공급자 일변도의 언어 시장에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은 소비자운동이다.
정명은 사용자가 붙여줄 수밖에 없다. 이때의 대원칙은 실제 쓰임새와 일치하는 이름만을 구매하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아닌 소비자가 모든 불량품과 허위 제품을 반품하고 불매 운동에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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