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과 칼럼

[김영종의 잡설] 산조 정신과 애니미즘 미학

미송 2010. 6. 24. 23:24

기독교, 빛의 이름으로 탄생한 '노예의 종교'

 산조 정신과 애니미즘 미학 ①

 

나는 엇모리장단을 '태양의 춤곡'이라 부른다. 엇모리장단을 들으면 거나하게 술에 취해 비틀비틀 춤추는 듯한 느낌인데, 영락없이 이글이글 타는 태양이 은하계를 중심으로 비틀거리며 자전과 공전을 하는 바로 그 모습이다.

이때의 태양은 디오니소스라 할 수 있다. 니체는 밤을 디오니소스에 비유했지만, 실은 빛 자체가 디오니소스다. 다시 말해서, 빛이라 일컬어지는 이성 자체가 디오니소스적인 도취와 엑스터시를 본성으로 한다는 것이다. (엑스타시의 전문가 샤먼이 고대에는 가장 이성적인 존재였다. 오늘날도 야생의 지대에서는 샤먼이 과학자이자 의사다.)

이성은 현대인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 달리 인류가 진화해온 만큼이나 서서히 형성돼왔다. 무(無)에서 생겨났는지 원래 있던 맹아에서 자라났는지 모르지만, 이성을 배양한 기름진 토양은 축적의 욕망이다. 이성이 자리 잡을 공간인 내면이나 양심이 아직 호메로스의 인물들에게서는 보이지 않는다. 정신과 육체가 아직 제대로 분화되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 분리가 확실해진 것은 근대적 인물이라 할 수 있는 햄릿에 이르러서다. (<일리아스>,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숲 펴냄, 768~771쪽)

이성의 자랑인 명철성과 합리성은 자나 컴퍼스, 저울로 상징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물질적인 욕망에서 온다. 인류가 떠돌이 생활을 멈추고 정주하게 되면서 성을 쌓아 도시를 만들고 부를 축적하는데, 이것을 '문명'이라 한다면, 문명의 욕망이 인간의 육체 내에서 이성을 자라나게 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에 견주어 디오니소스적 이성이란 육체와 정신이 분화되기 전의 이성, 즉 원시적 이성 또는 민담적 이성이다. 뒤에 이야기하겠지만, 광대 그리스도는 대표적인 디오니소스적 이성이다.

애니미즘 미학을 말하는 데서는 문명의 이성과 원시적 이성을 구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 구별은 빛과 어둠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와 직결돼 있다. 이 점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촛불은 어둠에 감싸여 있다. 이것이 빛의 진정한 모습이다. 원래, 빛과 어둠은 투쟁의 대상이 아니라 상대가 없이는 존립이 불가능한 공존의 대상이다. 낮과 밤 없이 존재할 수 없는 자연을 보면 확연한데도, 문명은 줄곧 이 공존을 부정하는 쪽으로 달려왔다.

'문명'의 빛인 전깃불은 켜자마자 한순간에 어둠을 내쫓는다. 그래서 전기의 빛은 정복자의 빛이다. 현대인의 이성은 전기의 빛과 같아서, 자기 안에서 어둠을 일소하기 위해 엄청난 교육을 받는다. 결과는 참혹하다. 그 때문에 노예를 자초하고 스스로가 무너지고 있다.

원시인에게 그리고 유목민에게 빛은 어둠과 공존했다. 빛은 어둠에서 나왔다. 빛에서 어둠이 나올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가 태양을 맞이하는 때는 짙은 어둠이 깔린, 새벽 직전이다. 어둠이 태양을 출산하는 장엄한 순간이다. 이렇듯 어둠은 어머니이고 우주의 모성이다.

몽골어나 투르크어 등에 '검다(黑)'에 해당하는 '카라'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는 신성한 것을 가리킬 때 사용한다. 몽골제국의 수도 카라코롬이라든가 위구르제국의 수도 카라발가순, 그리고 탕구트족이 세운 서하(西夏)의 수도 카라호토 따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곳에 쓰인다.

한국에서는 '검다'의 고어인 '고마'에 나타나 있는데, 고마→곰으로 진화해서 곰뿐 아니라 신을 뜻하기도 한다. 금강의 경우 웅진(이때 웅은 '곰' 웅)을 떠올리면 쉽게 알 수 있듯이 그 의미는 곰강≒검은 강≒신의 강이다.

 

 

인류가 정주 생활을 시작하면서 성과 도시를 지킬 왕의 지배 집단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이데올로기로 태양이 이용된다. 고대 천문학의 관점에서 태양은 최고신이다. (이집트의 호루스를 비롯해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페르시아의 미트라, 인도의 크리슈나 등이 모두 태양을 상징한다.) 왕이 태양과 같은 존재가 되는 동시에 태양은 악한 어둠을 물리치는 지고의 선신(善神)이 된다. 이 이데올로기는 곧바로 종교가 되는데, 이집트의 태양 신학이 그와 같은 종교들의 모델 구실을 한다.

빛이 어둠과 투쟁하는 구도는 원시 시대의 애니미즘과 완벽하게 대립한다. 역사적으로 말하면, 태양 신학은 원시인의 신앙인 애니미즘의 우주관을 파괴해 원시 사회의 구성원을 노예로서 지배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다. 여기서 빛은 야욕의 도구로 전락해, 빛의 이름으로 진정한 빛을 완전히 왜곡하고 만다.

이집트의 태양 신학 이후, 자연신관을 벗어난 윤리 종교로서 빛과 어둠을 선과 악으로 가장 확실하게 나누어 교리화한 종교는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다. 예언자 조로아스터(=자라투스트라)는 유목을 악으로, 농업을 선으로 선포하여 유목민을 악마의 화신이라고 규정했다. 여기서 인류 역사상 가장 명확한 형태의 정주적(定住的) 윤리가 완성된다.

내 가설이지만, 기독교는 조로아스터교의 토양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기원전 1~2세기에 로마제국을 휩쓴 종교가 조로아스터교의 후신인 미트라교로,예수의 출생과 행적뿐 아니라 기독교 의례의 대부분이 미트라교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2세기에 기독교철학자 유스티누스는 "사악한 악령들이 그리스도가 올 것이라는 예언자의 말을 듣고 신의 아들이라는 자들을 미리 만들어냈다(미트라 신앙이나 디오니소스 신앙의 신들이 뒤에 성립된 예수의 이야기와 같았기 때문에 : 필자)"고 비난했지만, 이 사실을 어쩔 수 없이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공인된 순간, 빛을 야욕의 도구로 사용하는 태양 신학의 계보에서 기독교는 흑백 이데올로기의 정점에 선다. 다신교를 믿은 로마가 제국을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해 흑백 이데올로기의 유일신이 필요했던 것인데, 박해의 대상이었던 원시 기독교의 그리스도는 원래 사랑의 메시아였던 것이다. 그 뒤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날조와 전도가 스콜라철학으로 완성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계적인 신학자 하비 콕스는 광대 그리스도를 예수의 진정한 모습으로 그리는데, 디오니소스 축제와 같은 축제 정신의 부활을 통해 기독교가 새로워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예수를 디오니소스적 신격으로 보는 것은 내가 본 중에 가장 혁명적인 사상이다. 디오니소스적 예수는 간단히 말해서 애니미즘의 예수다. (하비 콕스는 중세 유럽의 '바보 축제'에서 찾는다. <바보제>, 하비 콕스 지음, 김천배 옮김, 현대사상사 펴냄)

빛이 인간의 야욕에서 벗어나 제자리를 찾을 때 빛에 비유되는 이성 역시 어둠과 공존하는 길을 찾을 것이다. '물병자리 시대'(AD 1년~AD 2150년 : 물고기자리 시대, AD2150년 이후 : 물병자리 시대)라는 천체의 변화를 맞아 어둠의 복권은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비틀거리며 도는 태양의 진짜 모습이 우리의 산조장단인 엇모리장단에서 강렬하게 느껴진다는 것은 산조가 새 시대 애니미즘 미학의 정수로 떠오르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시대의 광대들…조용필과 장기하의 공통점은?

산조 정신과 애니미즘 미학 ②

 

그러면 산조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산조(散調)는 형성의 미학이다. 문자 그대로 흩어져 있는(散) 소리를 한데 모아 어울리게(調) 만든 음악이다. 19세기 말 전남 영암 사람 김창조가 산조의 틀을 만들었다. 당시 민중의 현장에 흩어져 있던 소리 가락(散調)을 대표하는 것은 시나위와 판소리의 가락이었다. 시나위는 본래 굿할 때 연주하는 기악이지만, 굿판을 떠나서도 잔칫집이나 놀이판 따위의 이른바 제도권 밖에서 민중의 흥취를 담아냈다.

 

산조를 '허튼 가락'이라고 하는 것은 즉흥적인 측면 때문이기도 하지만, 클래식이 아닌 속되고 잡된 민중의 가락인 까닭이다. 선비나 양반이 하는 음악을 '정악(正樂)-바른 음악'이라 했으니, 민중의 음악을 허튼 음악이라 한 것은 당연하다. 19세기는 민중의 활력이 봇물 터지듯 분출한 시기로, 대표적인 사례로는 동학과 갑오농민전쟁을 들 수 있다. 형성의 미학은 민중이 활력에 넘쳐 있는 곳에서 가장 흐드러지게 꽃핀다. 형성의 미학은 수많은 물방울과 물줄기가 모이고 섞여서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는 미학이다. 그 예로는 신화나 전설, 옛이야기, 민화(民畵) 등이 있다.

 

형성의 미학에 대립되는 개념이 창조의 미학인데, 앞 장에서도 말했듯이 그것은 자아의 미학이자 인식의 미학이며 자본주의의 미학이다. 세계적으로 이미 근대 미학이 종언을 고한 현시점에서, 유일한 출구는 형성의 미학으로 돌아가는 길뿐이다. 그 길에 이정표가 하나 세워져 있다. 바로 산조 정신이다. 그런데 정말로 중요한 것은, 산조 정신은 (19세기적인) 민중의 활력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19세기에 보인 민중의 활력은 그들의 삶 한가운데 자리 잡은 시나위를 통해서 넘쳐났다. 시나위 가락은 신과 접선하는 아름다운 진동이다. 내가 우산 미학이라 이름 붙인, 원시적 축제에 참여한 모든 이들을 무한원점에 이르게 하는 진동 말이다. 동학과 갑오농민전쟁은 이 진동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현대의 학자들은 (종교 사상으로서의 동학을 비롯한 신흥 종교 비판 등을 통해) 이 진동을 미신이라 하여 19세기 민중적 역량의 한계로 지적한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학자들이 서구적 합리성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이 운동을 근대적으로만 해석하려는 데서 나온, 아이러니컬한 그들의 한계다. 여기서 이 이야기를 더 길게 할 수 없기에, 이 운동은 외려 그 진동(미신/애니미즘)으로 인해 서구적 근대가 아닌, 현대가 봉착한 탈근대 너머의 전망에 맞닿아 있다는 점만 언급하는 것으로 그치겠다. 나는 19세기 산조 정신의 눈부신 승리로서 백낙준이 만든 거문고산조를 들지 않을 수 없다. 거문고는 모든 악기의 왕이라고 하여 백악지장이라 일컬어진, 선비와 양반들만이 타는 악기였다. 이 악기가 드디어 정악이 아닌 천한 백성들의 허튼 가락을 탄 것이다. 이건 어마어마한 사건이다. 상놈이 양반을 가지고 논 것을 넘어 양반의 음악을 평정해버린 것이다.

 

이 놀라운 일은 오직 형성의 미학만이 할 수 있다. 한 예로, 북한에서 근대 미학의 하나인 사회주의리얼리즘에 입각하여 음악 분야를 개혁할 때 유일하게 실패한 악기가 바로 거문고다. 그 결과, 양반 문화의 척결은 고사하고 거문고 연주 자체가 사라지게 되었다. 이는 창조 미학인 근대 미학의 한계가 잘 드러난 단면이다.

 

최근 산조의 현대화라는 말이 많이 나오고 있다. 이에 나는 우려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현대화는 근대 미학에 입각해 산조를 발전시키자는 것인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산조 정신을 위배한, 아니 죽이는 발상이다. 현대화는 대체로 크로스오버나 퓨전으로 나타나며, 서양 음악과의 교배가 핵심인 것으로 보인다.

 

서양에서는 벌써 오래전부터 서양적인 소재에 식상하여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그리고 오지의 야생 부족 등 비유럽 세계의 소재에 열광하고 있다. 심지어 근대 미학을 비판하는 포스트모던 미학에서조차 서구의 멘탈리티 아래 비유럽 세계의 소재들을 이용하고 있다. 얼핏 비유럽 세계의 소재들이 세계 예술의 주류로 부상하는 듯이 보이지만, 이러한 현상은 어디까지나 오리엔탈리즘 부류에 불과하다.

 

산조가 뉴욕의 브로드웨이에서 주목받았다고 해서 산조 정신이 세계 무대에서 꽃을 피운 것이 결코 아니다. 산조 정신은 세계 최고의 음악가들의 평가에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정악에 비견되는 '세계 중심의 음악'을 조롱하며, 그것을 속화시키는 세계 민중의 잡스럽고(그래서 '잡악'이라 불리고) 세속적인(그래서 '속악'이라 불리는) 활기 속에 살아 숨 쉰다. 이른바 산조의 세계화는 세계적인 허튼 가락일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때문에 산조 정신의 계승은 세계적인 상아탑에서 창조주적 작가 정신으로 무장된 음악가들한테서는 조금도 기대할 수 없다.

 

비유럽 세계에 흩어져 있는 소재들의 영혼은 서구의 멘탈리티로 결코 재생될 수 없으며, 그 소재들의 출생지 토양에서만 생명력을 내뿜는다. 마치 유럽의 유명 박물관에 세계 각지에서 가져온 유물들이 진열돼 있지만, 유물들은 원래 있던 그 자리에서만 생명력이 있는 것과 같다. 박물관의 박제화한 유물들을 어떤 천재가 아무리 획기적인 방식으로 살려내고자 해도, 예컨대 생태학적이거나 또는 자연사와 연결한 로컬주의로 진열한다고 아무리 용을 써도, 그 생명력은 결코 살아나지 않는다.

 

재삼 강조하지만, 산조의 발전은 산조 정신 속에서만 가능하다. 산조 정신은 형성의 미학이다. 오늘날 이 땅의 대중이 아무리 서구화했다 해도 산조의 가락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한다. '신중현'이라든가 '조용필', '김수철', '장기하와 얼굴들'의 음악이 그러한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산조 정신은 대중의 가락 세계 속에 흩어져 있는 (산조 장단의) 알레고리-바로 위에서 예로 든, 신중현 등의 음악 속에 녹아들어 있는 산조 장단-를 찾아서 이것들로 새로운 틀을 짜는 작업 속에 있다. 동시에, 이 작업은 산조 정신이 태어난 19세기의 진동과 같은 민중의 진동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내가 애니미즘 미학을 전망으로 제시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산조 정신은 굿(또는 애니미즘)에서 태어났으며, 바로 그런 까닭에 만물에 깃든 영혼과 이야기하는 민중의 심성 속에서 화려하게 부활할 것이다.

 

이 작업을 하는 예술가는 제도권을 기웃거려서는 안 된다. 제도권은 민중의 활력을 죽이는 곳이다. 예술가는 광대여야 한다. 광대는 본디 천한 출생이다. 그는 민중의 사랑과 비웃음을 동시에 받는다. 그래서 광대는 익살을 부리고 분노한다. 민중의 활력은 광대와 함께 요동친다. 하비 콕스가 예수를 스타가 아니라 광대로 본 것처럼, 예술가가 천한 광대이지 않으면 (예수가 민중 속에서 천국의 씨앗을 모았듯이) 민중 속에 흩어진 가락들을 모을 수 있는 열정과 힘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그를 자본의 노리개인 스타가 아니라 영원한 광대로 남게 하는 것은 바로 애니미즘 미학이다. 위에서 말한 (디오니소스적 태양과 같은) 원시적 이성이 태양처럼 어마어마한 빛을 내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바로 그런 사람인 것이다. 물병자리 시대의 그리스도를 통해 빛과 어둠이 암수 뱀처럼 뒤엉킨 원시적 축제의 세상이 열리기를 기대한다.